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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든지 죽든지 (신학)/교회사

한국교회사 속에 나타난 진보와 보수 -그 새로운 만남을 위하여 를 읽고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14.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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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이덕주 교수의 기독교사상 2002년 1월호에 특집호로 개재된 논문이다.

 

이 논문은 진보와 보수가 한국교회 내에서 어떤 개념인지 어떤 형태로 존재해 왔는지 그리고 더 나아가 이들안에 화해의 노력은 무엇인지를 교회사적으로 정리해 주고 있다.

본 논문을 정리하면

 

       1. 먼저 본 논문은 무엇이 진보이고 보수인지를 묻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글의 저자는 진보와 보수는 상황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해석되기 때문에 개념정리가 필요하다고 한다. 신학사상사적으로

보수주의란 종종 '정통주의', '근본주의' 혹은 '복음주의'등과 혼용되고 있으며 진보주의는 '자유주의'로 확대해석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진보와 보수의 용어를 적용할때면 좀 복잡한 현상이 일어나는데,

예를 들어 1960년대 장로교 전통안에서도 예장 통합이 합동측에 비해 진보적이지만 기장에 비하면 보수적이다. 감리교 신학도 마찬가지로 예장에 비하면 진보적이지만, 기장에 비하면 진보적이다.

아주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 개념을 정리하기엔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이 개념이 다양한 의미로 사용될수 있다는 사실을 가지고 타협과 비타협의 구조로 설명하고있다.

 

이를 테면 보수적이란, 지닌고 있는 어떤 가치나 사상을 고수하려는 성질을 가진 개념이라고 할수있는데, 그러므로 전통적 관습을 고수하려는 비타협적인 자세를 보수적인 입장으로 그리고 융통성을 발휘하여 상황과 환경에 변화에 따라 타협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을 진보주의로 정의할수 있다고 한다.

 

       2. 본 논문은 처음엔 모두 진보적이었다고 밝힌다.

한국 역사적 흐름안에서 근대화의 흐름인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것은 모두 진보적인 지식인들이이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로써 교회는 민주주의를 실험하는 장소가 되었고 기독교는 자연스럽게 한국 사회의 진보세력의 새로운 구심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고 한다.

 

       3. 본논문은 진보적인 기독교가 한국 사회로부터 보수적이란 평을 받게 되면서 보수와 진보의 양갈래가 되는 현상이 일어난 것을 말하고 있다.

 

3.1운동을 겪은 직후로 부터 1920년대 이후로 사회참여적 기독교인들이 등장하면서 그것을지지하지 않은 소위 보수적인 시각이 남아 주류를 형성한것이다.  이들은 정교분리 원칙(1901)을 고수하였고 보수적 선교사들의 영향력도 크게 작용하였다.

그리고 진보적 지식인들은 교회를 배경으로 농촌운동, 절제운동, 국하운동, 물산장려운동, 밀립대학 기성운동, 한글 보급운동, 야학운동 등 민족주의 성향의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흐름은 결국 보수와 진보간의 거리감이 생기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4. 1930년에 들어 보수와 진보의 간격은 더 커지게 되고 이는 1920년대 유학파들이 국내로 들어오게 되면서 신학적 상황에서 갈등으로 번지기 시작한다.

한국장로교 초기 신학은 보수적인 선교사들로부터 보수적인 신학을 이어받게 된다. 즉 정교분리, 교조적 칼빈주의 신학에 충실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1920년대 유학파들이 미국과 일본에서 서구의 신학을 배워 와 다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소위 신정통주의나 자유주의 성서 고등비평학, 양식비평등 선진세력으로부터 지지를 받기 시작하였다.

 

결국 이러한 분위기들이 적극신앙단 사건이나 아빙돈성경주석 사건등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는 결국 해방후 분열사건으로 이어지게 된다.

 

       5. 결국 일제시대를 거쳐 해방이 되면서 진보와 보수는 한국교회의 내부적 분열로 이어지게 된다.

일제말기 민족주의 성향을 보여왔던 진보적 인사들이 훼절과 반역의 모습을 보여준 반면 민족운동이나 정치운동에 거리를 두어왔던 보수적 인사들은 일제에 항거하는 정치적 저항의 모습을 보여주었다.(49-50) 이것이 한국교회내에 새로운 분열과 갈등의 요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6. 해방후 정리되지 않은 일제의 잔재와 신앙적 반성이 없는 상황에서 출옥성도들을 중심으로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장로교의 경우 재건교회 분열(1946), 고신파 분열(1946) 혁신복구파 분열(1948), 등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친일행적에 대한 문제를 원인으로 6.25전쟁후에는 보다 강하고 노골적인 형태로 보수와 진보과 나뉘어 지게 된다.

그 대표적인 것이 1953년 예장과 기장의 분열이다. 이는 김재준목사의 신신학에 대한 진보적 인사들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1959년에 일어난 예장 합동과 통합의 분열이다. 1950년중반에 한국교회안에서 에큐매니컬 운동을 중심으로 찬반세력이 분열의 원인이 된것이다.

 

       7. 1970년대에 이르러 한국교회는 보수와 진보간 골은 더욱 깊어지게 된다. 사회현실 참여에 대한 입장의 차이로 더욱 심하되었다. 진보적 세력은 에큐메니칼 운동노선을 추구하여 진보적 교회의 신학은 세속화신학, 하나님의 선교신학, 해방신학등 서구 진보적 신학을 수용하면서 적극적인 사회 현실참여를 추구하였다(53)

이들 교회들은 재야세력을 중심으로 1970년 유신독재와 1980년 신군부세력에 저항하며 사회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반면에 보수적인 교회들은 '정교분리'를 내세워 진보주의를 비판하였고, 선교개념과 내용도 개인의영혼구원과 복음전도에 초점을 맞추어 대규모 전도집회를 개최하였고 해외선교도 활발하게 되었다. (53)

 

1980년대 말 세계 정치적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세계 복음주의자들이 모여 '개인구원'이라는 복음전도의 본질적 사명을 확인하면서도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소위 로잔 언약내용이 복음주의 계열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54)

 

그리고 1980년대에 평화통일 운동과같은 분단극복과 민족 통일에 관련된 교회와 사회운동에 진보와 보수가 연대하기도 했다.

 

       8. 저자는 끝으로 열린대화의 필요성에 대해서 제언함으로 본논문을 마무리 하고있다.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일줄 아는 나아가 뱅려는 열린자세가 너무 아쉬운 역사라고 평하며, 아픈 역사를 반성하며 존중하는 한민족의 신학을 추구할 때가 되었다고 한다.

 

 

9. 본 논문을 통해 배운점은 무엇인가?

 

한국역사에 나타난 진보와 보수간에 나타난 형태가 어떠한지 흐름을 짚어볼수 있었다.

근현대 한국교회사엔 친일문제, 반공문제, 신학적 노선, 정교분리적 입장 등이 주를 이루어 교회의 분열을 야기하였다.

보수주의의 반성은 무엇이며, 진보주의의 반성은 무엇일수있을까?

 

이들의 대립은 사실 오늘에도 그 영향을 끼치고 있다. 정교분리에 입각하여 반공주의를 내세워 친정부적 활동을 하고 있는 보수적개신교회와 자기 반성없이 사회현실적 참여를 외침을 하고 있지만, 오늘날 전혀 먹히지 않는 진보적 형태의 개신교나

오늘날은 서로의 대립보다는 서로 대화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안타까움도 들기도 한다.

 

과연 이들이 대화할수 있을까? 

혹자는 진정한 민주화는 남북의 통일이 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고 믿고, 통일운동에 앞장서야 한다고 한다.

이에 87년 복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평화통일에 대한 사회적 참여의 외침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보수주의자들은 반공주의를 외치며 요동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개인적을 본 논문에서 언급한대로,

일제시대에 대한 반성이 없이, 정권유착의 유산인 이승만정권

그리고 4.19에 대한 반성이 없이, 유신시대의 친정부적인 교회의 모습에 대한 제대로된 반성이 없이

대화가 될수 있을까? 싶은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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