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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든지 죽든지 (신학)/교회사

서정민, "한국기독교의 현상에 대한 역사적 검토" 를 읽고서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14.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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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후 한국기독교는 어떤 형태였을까? 더욱이 오늘날 친미와 반공으로 일관한 한국 보수적 개신교는 왜 어떤 흐름속에서 발전하여 왔을까?


오늘날 더없이 세대간 계층간 진보와 보수간 대립과 분열을 겪고 있는 시대속에서 교회가 해야할일은 점점 많아지는 것같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침묵하려한다. 

수많은 역사적 과오를 남긴 한국교회의 정치적 활동속에서 제대로 된 반성은 없었는가?

과연 이러한 역사적 과제속에서 한국기독교가 해야할 반성은 무엇인가?

역사를 고찰한다는 것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과거를 살펴봄으로써 현재를 조정하고 미래로 나아갈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내가 살펴볼 글은 서정민 교수의 한국기독교의 현상에 대한 역사적 검토이며, 사회참여 특성에 따른 시기 구분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어디까지나 서정민교수님의 글을 요약한것에 불과하고, 개인적으로 공부를 위한 글임을 감안해서 봐주길 바랍니다.



1. 이데올로기적 기독교 시대, 수용기로부터 대부흥운동 (1880년대~1907년)</li>



초기 한국기독교는 엘리트들에 의해 수용되었다. 이들 엘리트들은 철저히 이데올로기로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좀더 현실적으로는 서구 세력과 연결된 정치적 힘의 배경으로 이해했다. 즉 한국의 당시 지도층은 기독교라는 하나의 사상, 혹은 정치적 세력을 민족의 주권을 지키거나 되찾으려는 방편으로 파악한 것이다,

(263-4, 한국 기독교의 역사,266; 이만열,한말 기독교인의 민족의식 형성과정 19-20.)

반면에 민중계층은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 그리고 부정한 정권들을 보며 현실적 힘을 통해 자신들의 생명을 보호하고자 하는 목적이 개종을 자극하였다. (백낙준,한국개신교사174-5. 이만열,한국기독교와 민족운동,121)

즉 이 초기 수용기의 한국기독교는 종교성보다 정치성 사상성에 중점이 있는 수용분위기 였음이 분명하다. 



2. 대부흥운동 이후의 복음주의 혹은 근본주의시대 (1907년~1930년대)</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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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의 한국교회 대부흥운동은 사회적 참여의 관점에서 보면 &#39;신앙적이며 종교적 측면&#39;을 확립하면서 사회적 문제 보다는 개인 내면의 문제에 치중하는 특징으로 전환된 현상을 지적할수 있다, 저자는 이 내면화되며 몰아적 신앙현상을 보면서 기독교의 사회적 기능 상실에 실망, 교회를 떠나는 사례도 보인다고 하고있다. 

(이러한 사회참여 결여적 부흥운동의 평가에 대해서는 이만열의 글 과 민경배의 글을 참고하면 좋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면화적인 신앙을 양산했던 부흥운동은 신앙적 내면을 확립하게 되었고, 이러한 신앙적 동기는 민족적 에너지로 전환된 사례도 다수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것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3.1운동이다. 하지만 여전히 말세론이나 보수 근본주의적 신학안에서 개인중심의 신앙 내세중심의 신앙이 주류가 되는 분위기를 형성했다. 


(이시기에 잠시나마 고민해야할 것이 있다면, 당시 신학의 보수성에 대한 당시 선교사들의 신학이 어떠했는가 일것이다. 그리고 3.1운동 이후에 사회참여적 기독교와 보수적 기독교간에 어떤 흐름과 양태로 전개되어 가는지도 알아야 한다. 그릐고 왜 당시의 말씀사경회의 특징은 어땠으며, 주요 인물인 길선주에 대한 연구도 그 시대의  보수적 개신교의 특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것이라고 생각된다) 



3. 일제 말기 수난 수용시대 적극적 변질의 한국기독교 시대 (1930년대 후반-1945년)



저자는 일반적으로 이시기를 한국의 기독교의 암흑기로 본다. 신사참배와 신앙적 수난기의 시기이기 때문이다. 

실제 이시기를 한국기독교의 시대적 특성의 중심을 순교와 수난의 시기로 규정하는 데 물론 그것은 하나의 대표적 특징으로 불때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역사적 실상을 들여다 보면, 극소수의 순교와 수난 일정 비율 크리스천들의 적극적 회피와 반대표현, 그리고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의 현실적 순응, 그리고 상당한 비율의 크리스천들이 보인 적극적 변질이 그 분포의 대강이다. 즉 내적으로 체험해야 했던 여러 고통과 시대적 아픔은 인정하지만 역사적 현상으로는 닷의 순응, 소수의 저항, 다수의 가해자와 소수의 피해자라는 역사적 실존현상을 보인다는 의미이다. (266) 


그런데 이시기의 저항과 순교자들의 신앙의 형태는 보수근본적인 신앙의 형태였다는 사실이다.


(이 시기에 신앙을 지킨 옥중성도들은 결국 분열을 야기시켰다. 왜 분열할수 밖에 없었는가. 보수적  근본적 신앙형태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성경관인가? 저자는 이들은 정치적 저항가들이 아니라 신앙적 저항가들인데, 일제의 편에서는 이들은 신앙적 저항가이면서 정치적 저항가적 모습을 보일수 있다고 하고 있다. 

이들은 왜 신앙을 지키려고 목숨을 걸었는가? 그리고 대다수의 그룹은 어째서 순응할수 밖에 없었는가? 참고 민경배의 "일제하의 한국 기독교 민족 싱앙운동사 1991 73-4.이러한 구도가 오늘날의 진보와 보수간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었을까? )



4. 분단과 전쟁, 그리고 5.16 군사 쿠데타까지, 정치적, 사회적 기득권층으로서의 남한 기독교 시대 (1945년~1969년)


분단은 한국 민족 뿐만아니라 한국기독교사에서도 또다른수난과 비극의 역사였다, 북한 정권하에서 기독교 세력은 대부분 붕괴하거나 상당수는 남한으로 피난하였다. 

남한의 정부에서 기독교는 미군정기를 거쳐 이승만 정부 수립이후에 사회의 특권층으로 부각하며 유력한 공동체가 되었다. 

대부분의 정치지도층에 기독교인사들이 포진하였다.  그러므로 이시기 기독교는 친정부적 성격을 지녔다.

(이에 관해 강인철의 "해방후 한국 개신교회와 국가, 시민사회를 읽어보면 좋을것같다. 그리고 북한교회사관한 책도 읽어보면 좋을것같다.)

이시기의 교회의 현상과 관련하여 저자는 사회의 기득권으로서 기독교가 반성하지 않은 부분에 관하여 세가지 정도로 제시하고 있다.


첫째 내부적 분열을 거듭하였다. 이러한 내부적 분열은 지도층간의 헤게모니 갈등이나 재산상의 이권문제도 깊이 개입되었던 것도 있었다.

둘째 민족에 대한 희생적 역할을 하기보다 이기적인 공동체로서 이미지를 형성한 측면이다.기독교적인 공동체 중심 교회내부 중심이라고하는 이익공동체로서 이미지를 형성하였다.

셋째 어느시기보다 다수의 기독교계 이단, 사이비 종파가 등장하여 현실도피 반사회적인 집잔으로 몰고 갔다, 

넷째 친 기독교 정부로 불리던 이승만 정부가 정권연장을 위해 독재 부정을 자행하고 선거에서 반민주적 방식과 범죄적 선거를 자행하는 과정에서 기독교는 무조건 이승만정권을 지지했다. (김재성, 4.19혁명과 기독교,2005)


(이시기의 교회는 이승만정부와 어떤 밀월관계가 있었을까? 당시의 교회 지도자들의 설교는 어떤 것이었으며, 당시 신학대학에서 어떤 신학을 가르쳤을까? 이시기에 교단 적 분열의 시기라고 할수 있는데,해방이후 분단을 겪으면서 교회를 재건함에 있어서 이승만정부를 향해 교회가 바라는 것이 있었을까? 이승만정부는 반공과 친미를 위시하여 교회의 관심을 모았다고 하는데, 반공주의가 이시기에는 어떤 형태로 발전했을까?)


 


 5. 소수 진보적 '민중신학'하의 정치적 저항과 다수 보수적 '복음주의파'의 정교유착, 경교유착의 기독교시대 (1969-1990년대)



해방후 한국기독교가 정권에 대해 반대입장을 표명한 것은 박정희 정권이 추진하던 "한일 국교 정상화'였다. 이는 진보 와 보수를 막론하고 모든 개신교 인들이 반대운동을 전개한 최초의 운동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1969년 이른바 박정희의 삼선개헌 문제를 두고 진보와 보수가 나뉘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진보는 재야이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사회적 참여와 반대운동을 전개하였고, 보수의 진정권적 진영은 삼선개헌에 찬성하는 입장으로 전개되었다.

1972년 10월 유신으로 진보진영의 민주화운동은 보다더 강렬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보수적 지도자들은 민족 복음화 운동을 하여 경제계발을 통한 교회의 양적성장에 성공을 거두면서 주요 종교집단이 되는 상황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보수적이라는 말과 복음주의를 구분할수 있을까? 보수주의와 복음주의를 같다고 할수 있을까? 이시기의 보수적 개신교는 왜 양적 성장에 치중하게 되었을까? 박정희정권의 삼선개헌에 찬성하게는 입장으로 그들의 의견을 표명하였을까? 이시기에 박정희 정권이 내세운 것은 무엇이었을까?) 

  

저자는 현대의 진보와 보수간에 대립적 현상에 대해서 글을 쓰고 있지만, 필자가 공부하고 싶은 부분은 이 시기까지라 뒤의 부분은 생략하도록 하겠다.


전체적으로 한국기독교의 현상에 대한 역사적 검토를 할수 있는 좋은 기회였고 좋은 공부였던것 같다. 논문을 고민하면서 자신도 없고, 불안도하지만, 언제 또 공부하게 될지 모르는 상황속에서 내가할수 잇는 것은 최선을 다하고 싶다. 서정민교수님의 글을 통해 여러가지 역사적 진단을 하고 고민하게 되어 너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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