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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든지 죽든지 (신학)/교회사

메노 시몬스(Menno Simons)의 평화주의 연구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13. 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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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장신대 대학원

종교개혁세미나 기말페이퍼로 작성한 글이다... 각주는 생략하는 대신 참고서적 목록을 올려놓겠다.

 

 

메노 시몬스(Menno Simons)의 평화주의 연구

(1534~1561년 그의 저작들을 중심으로)

 

장신대 대학원 역사신학 함신주

Ⅰ. 서론

1. 문제제기

2. 연구 방법

 

Ⅱ. 메노 시몬스(Menno Simons)의 평화이해에 끼친 역사적 배경들

1. 뮌스터(Münster) 사건 (1534~1536년)

  1) 뮌스터(Münster) 사건의 전말(顚末)

  2) 뮌스터(Munster) 사건과 올드 클로이스터(Old Cloister)의 비극에 대한 메노 시몬스 (Menno Simons)의 평가와 영향

2. 평화주의적 Anabaptist 에게 받은 영향

 

Ⅲ. 메노 시몬스(Menno Simons)의 평화주의

1. 메노 시몬스(Menno Simons)의 저서(著書)에서 나타난 평화주의

    1) 메노 시몬스의 초기(1535~1543년) 저서에서 나타난 평화

        ➀ 역사적 배경 (1535~1543년)

        ➁ 메노시몬스의 초기 저서에서 나타난 평화

   2) 메노 시몬스의 후기 (1543~1562년) 저서에서 나타난 평화

       ➀ 역사적 배경 (1543~1562년)

       ➁ 메노 시몬스의 후기 저서에서 나타난 평화

 

2. 메노 시몬스(Menno Simons)의 평화주의와 그 영향

   1) 1632년 네덜란드 도르레흐트(Dorderecht) 메노나이트 고백문서와 무저항

   2) 1963년 메노나이트 신앙고백에 등장하는 평화주의

 

Ⅲ. 결론

 

Ⅳ. 참고문헌

 

 

Ⅰ. 서론

 

 

1. 문제제기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평화라는 단어가 이슈(issue)이다. 그 만큼 전 세계적으로 평화롭지 못하다는 뜻이다. 서점에는 평화에 관한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으며, 한국교회 안에서도 평화에 대한 강단의 외침들이 터져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우리의 주변은 평화롭지 못하다. 무엇이 문제일까? 여전히 세상은 폭력과 다툼으로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것일까? 그러므로 이 시점에서 평화주의자였던 메노시몬스(Menno Simons)를 연구하는 것만큼 의미있는 일은 없으리라 생각된다.

 

평화주의란 무엇인가? 평화주의는 "화평하게 하는자는 복이있다" 라는 말씀에서 왔다. 라틴어

성경에서 화평하게 한다는 Facifici는 말은 영어 평화주의자 Pacifist와 같은 의미이다.

 

메노나이트에게 '십자가', '비폭력', '제자도',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기독교 평화주의의 가장 중요한 개념이고 상징이다. 평화주의의 신학적 토대는 예수의 삶과 가르침이다. 즉 무저항, 평화주의는 모두 복음서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토대로 생겨난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메노나이트의 평화주의의 정신은 메노시몬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연구를 위한 문제제기를 하기를 원한다. 메노나이트들의 평화주의의 정신을 이어받은 메노시몬스의 평화주의의 내용은 무엇이며, 메노나이트들은 어떤 부분을 전수받았을까? 메노시몬스의 평화주의가 공공연하게 전파된 시점은 언제이며, 어떤 역사적 배경과 계기가 있었는가? 메노시몬스가 비폭력, 무저항의 운동을 이룰수 있었던 내적 확신은 무어이엇으며, 메노나이트교회로 지금까지 이어져 오게 되는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2. 연구 방법

 

먼저 메노시몬스의 평화주의가 시작된 역사적 배경의 이해가 필요하다. 그가 회심한 1535년부터 그의 임종 시기인 1561년까지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고, 역사적 배경을 중심으로 저술된 그의 저작들을 중심으로 평화주의를 이해할 것이다.

1차 자료인 메노시몬스의 저작 묶음집인 John C. Wenger, "The Complete Writings of Menno Simons"를 중심으로 살펴 볼 것이다.

 

 

Ⅱ. 메노 시몬스(Menno Simons)의 평화이해에 끼친 역사적 배경들

 

 

오늘날 메노나이트(Mennonite)의 평화주의는 메노 시몬스 (Menno Simons)의 평화주의를 따른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메노나이트의 평화주의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메노 시몬스의 평화에 대한 관점이 어떠했는지를 알아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의 평화에 대한 관점에 앞서서 연구되어야 할 것이 있는데, 어떤 시대적 배경에서 그의 평화관이 등장했는지, 그의 평화는 과연 무엇으로부터 평화인지에 대한 질문이 필요하다.

 

그래서 먼저 우리는 메노 시몬스의 평화주의가 시작된 시점의 연구를 시도하고자 하며, 역사적 배경으로서 두 가지 역사적 배경의 연구를 하고자 한다.

 

먼저 뮌스터(Münster)사건은 아나뱁티스트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다. 이 사건이 메노 시몬스에게 준 충격은 무엇인지 그리고 뮌스터 사건이 메노시몬스의 평화주의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살펴보고자 하며, 둘째는 평화주의 아나뱁티스트(Anabaptist) 가 메노 시몬스에게 준 영향에 대해서 알아보고자한다.

 

1. 뮌스터(Münster) 사건 (1534~1536년)

 

1) 뮌스터(Münster) 사건의 전말(顚末)

 

1532년~35년 사이에 뮌스터(Münster)는 열광적인 제세례파의 중심지였다. 멜키오르 호프만(Melchior Hofmann 1495~1543)의 임박한 종말 사상에 영향을 입은 열광적인 재세례파들이 뮌스터에 몰려들었다. 호프만은 1533년 자신이 6개월 후 감옥에 갇히게 될 것이고 출옥 후에 예수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것이며 그때에 자신은 엘리야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리고 스트라스부르크(Strassburg)는 새 예루살렘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해 5월 그는 스트라스부르크의 당국에 의해 체포당하고 10년 동안 감옥살이 끝에 죽게 된다.

 

그리고 선택된 사람들은 도래하는 새 예루살렘을 준비하기 위해 이 마지막때에 검을 취해야만 한다고 믿었다. 그 중심에는 1531년 스트라스부르크를 방문했던, 최초의 사제인 베른하르트 로스만(Barnhard Rothmann)으로부터 자극되었다.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 마지막 시기에 우리 기독교인들이 검을 들고 세속적인 힘에 대항하여 싸우기를 허락하셨을 뿐아니라 전세계의 모든 악과 부정의 세력에 대하여 복수하도록 그의 백성에게 칼을 쥐어 주셨다... 때가 가까이 왔다.”

베른하르트 로스만(Barnhard Rothmann),1535년, 뮌스터

 

로스만의 외침은 당시 뮌스터의 상황이 어땠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를 힙입어 얀 마티스(Jan Mattys)와 얀 반 레이덴(Jan van Leyden)과 같은 아나뱁티스트의 지도자들이 등장하게 된다.

 

멜키오르 호프만(Melchior Hofmann)의 임박한 종말론의 영향은 감옥에 갇혀있음에도 불구하고 강력했는데, 바로 호프만의 영향을 받은 할렘(Haarlem)에서 빵 굽는 사람이었던 얀 마티스(Jan Mattys) 지도력 때문이었다. 그는 호프만이 주장한 새 예루살렘의 도래가 임박했다는 예언이 옳았다고 확신하게 되었지만, 스트라스부르크가 아니라 바로 민스터(Munster)지역에서 그 예언이 성취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폭력적으로 성격이 변하게 되었다.

 

대부분 네덜란드에서 온 무리의 아나뱁티스트(Anabaptist)들은 그 지역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었으며 가는 곳곳마다 사람들이 뮌스터로 가서 새 예루살렘의 시민이 되도록 소위 아나뱁티스

트로의 부르심을 공포하였다.

 

이러한 그들의 가르침과 영향은 열광주의자들에게 불을 지피는 것이 되었고 폭력의식들이 고양되었다. 결국 마티스는 1534년 로마 가톨릭의 군대에 의해 죽게 되었고 얀 반 레이덴 (Jan van Leyden)이 지도력을 이어가게 되었다.

 

얀 반 레이덴은 더 폭력적이며, 열광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새 예루살렘을 기다렸으며, 자신을 새 다윗 왕이라고 지칭하고 일부다처제를 도입하였다. 1534년 3월에 300명의 과격한 아나뱁티스트 무리들이 볼스바르트(Bolsward)근처에 있는 오래된 수도원(혹은 올드 클로이스터 Old Cloister)을 점령했다. 결국 장기간의 포위끝에 뮌스터는 함락되었고, 1536년 1월 22일, 결국 얀 반 레이덴은 체포되었다. 그리고 급진주의자들은 무참히 살해되었다.

 

뮌스터의 사건은 오늘날 아나뱁티스트 운동에 있어서 중요하다. 뮌스터 사건을 두고 아나뱁티스트와 관련성에 대해서, 뮌스터 폭동은 진정한 또는 성서적 아나뱁티스트의 운동이라고 할 수 없으며 급진주의자들에 일어난 운동이라고 보는 입장이 있다. 그러나 뮌스터 사건은 아나뱁티스트의 운동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특별히 메노시몬스를 중심으로 평화주의적 아나뱁티스트가 이 사건을 중심으로 부각되었다.

 

코넬리우스 딕(Cornelius J. Dyck)은 그의 책 『아나뱁티스트의 역사』(An Introduction To Mennonite History)에서 이렇게 민스터 사건을 평가하고 있다.

“그들은 뮌스터의 실패에 실망했을 뿐아니라... 그들에게 커다란 오명을 안겨주었다... 이사건 후로 모든 아나뱁티스트들은 뮌스터 사건 때문에 환상주의자들이라든지 혁명주의자들로 분류되게 되었다”

 

즉 그는 뮌스터 사건을 통해서 아나뱁티스트는 환상주의, 혁명주의자들로 분류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스튜어트 머레이(Stuart Murray)는 "The naked Anabaptist" 에서 뮌스터 사건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비록 다른 지역의 아나뱁티스트들이 뮌스터 사건을 지지 하지 않을지라도, 이 도시를 공포에 떨도록 만들었던 뮌스터의 아나뱁티스트들을 아나뱁티스트 이야기에서 떼어낼수 없었다...... 그들은 다른 대부분의 아나뱁티스트들의 평화주의적 신념과 전혀 맞지 않는 폭력을 사용했다. 하지만 그들도 아나뱁티스트들이었다. 역사가들이 그들을 이운동의 대표자들로 간주하지 않듯이 그들을 이 운동에서 제외시키는 것도 정당하지 못하다.”

 

즉 뮌스터 사건은 아나뱁티스트의 전체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아나뱁티스트의 분류에서 떨어트려서 보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뮌스터 사건은 아나뱁티스트들의 운동의 부분이었으며 이 사건을 통해서 평화주의 아나뱁티스트들이 부각하게 된다. 그 가운데 메노 시몬스(Menno Simons)가 있다.

 

2) 뮌스터(Munster) 사건과 올드 클로이스터(Old Cloister)의 비극에 대한 메노 시몬스(Menno Simons)의 평가와 영향

 

메노 시몬스(Menno Simons)는 1524년 28살의 나이로 사제로 임명을 받고 핑윰(Pingjum)교구를 담당하는 가톨릭사제로, 그리고 비트마르숨(Witmarsum)에서 사제로 12년 동안 있었다. 메노의 성직자의 생활은 그렇게 순탄하지 않았다. 1528년부터 1530년까지 성직자로서 메노는 미사를 의심하며 루터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때 그는 성경을 따르기로 결심했고 그는 신앙인의 세례주의를 위한 성서적 명령으로 인해 마음이 흔들렸다.

 

그럼에도 그는 가톨릭사제로 성직을 감당하고 있었지만, 마음속에는 알 수 없는 번민이 생겼고 결국 뮌스터 사건을 통해서 내적인 번민은 심화되었다. 그에게 내적인 혼란을 가져다 준 것은 1535년 뮌스터의 박해로부터 피신해 올드 클로이스터(Old Cloister)으로 도망갔던 약 300여명의 아나뱁티스트들이 비참하게 죽임을 당한 사건과 관련이 있다.

 

메노 시몬스는 그의 동생 피터 시몬스(Peter Simons)의 죽음과 아나뱁티스트들의 비참한 죽음 앞에서 알 수 없는 내적인 혼란스러움이 가증되는데, 특별히 그들이 비록 잘못된 신앙행위를 가졌다 하더라도 교리와 신앙을 위해서 아낌없이 자신을 바치는 모습을 보았다. 메노는 그들을 향하여 ‘불쌍하고 잘못 인도된 양들(Poor misguided sfeep)'라고 하였으며, 메노 자신은 여전히 평안함과 안락함을 가지고 묵인하며 살아온 자신의 삶을 직면하게 되었다.

메노 시몬스는 당시 사건과 관련하여 자신의 내적인 혼란스러움에 대해서 후에 “Reply to Gellius Faber(1554)”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이 열렬한 사람들은 비록 오류에 빠지기는 했어도 그들의 교리와 신앙을 위해서 기꺼이 생명과 재산을 바쳤다는 사실도 보게 되었다.........나 자신은 편안한 삶을 유지하면서 육신적인 안락을 누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회피하기 위해서 그 가증함을 묵인하는 상태였다. 이런 것들을 볼 때 내 양심은 더 이상 견딜수 없을 정도로 나를 괴롭혔다........

오 그들의 흘린 피가, 비록 범죄 중에 흘린 피일지라도 전능자의 심판대 앞에서 나를 향해서 일어나서 내 불쌍하고 비참한 영혼을 향하여 형벌을 선고하지 않겠는가? 내 마음은 내 속에서 떨리고(trembled) 있었다. 한숨과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통회하는 죄인인 나에게 은혜를 주시고 내 속한 정한 마음을 창조해 주시고, 그리스도의 보혈로써 내게 지혜와 성령과 용기와 남자다운(manly) 심령을 주셔서 높으시고 경배 받으실 성호와 거룩하신 말씀을 순수하게 선포하고 주의 영광을 위해 주의 진리를 전파하게 해달라고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리틀(Franklin H. Littell)은 “The Anabaptist View of the Church”에서 메노 시몬스가 뮌스터 사건을 어떻게 평가하였으며, 깊은 내적인 혼란과 함께 재세례파 운동으로 돌아선 것에 관하여 몇 가지를 언급하였는데, 1535년 3월 복음주의자들의 작은 무리(자신의 동생 피터 시몬스(Peter Simons)을 포함하여)가 볼스바르드(Bolsward)의 올드 클로이스터(Old Cloister)에서 그들 스스로 저항하다가 죽었다.... 메노의 입장은 그들이 그릇되게 검(劍)을 차지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들의 비극과 책임져야할 리더십 없는 상황으로 잘못 인도된 것을 불쌍히 여겼고 그는 그들이 진짜 믿음을 위해 희생제물처럼 된 것을 보며 자신은 그러지 못했던 것을 부끄러워했다. 일 년 뒤 그는 성직자로서 그리고 사람들을 목양하는 것으로서 자신을 보호하는 것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그는 뮌스터에서 벌어지고 있는 과격한 종말론자들의 무력적인 횡포와 광신적인 시한부 종말론 운동에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메노 시몬스는 1535년에 『얀 반 레이덴의 신성모독』 “Blasphemy of John of Leiden” 을 작성하였다.

 

이 작은 소책자를 통해서 메노 시몬스는 '검(劍)의 철학의 주창자들'의 비 그리스도교적인 성격을 비판하고, 무저항의 삶을 살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부터 메노 시몬스는 평화주의적인 삶을 선택하게 된다.

 

“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검으로 하는 싸움을 허용치 않는 그리스도인의 전투에 관하여 작은 글을 쓰고자 한다. 우리는 우리 중 누구라도 다윗의 갑옷이 육적 이스라엘인들에게로 향하도록, 스룹바벨의 검이 예루살렘에 그들과 그리고 장차 오는 것의 그림자의 상징인 스룹바벨의 사원을 짓는 그들에게로 향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 (중략) 만약 우리가 이러한 관점을 받아들이면, 그리스도인이 어떤 종류의 무기로 싸움을 해야 하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즉 좌우의 날선 검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야 한다.“

 

메노 시몬스의 초기저작인『얀 반 레이덴의 신성모독』에서는 그의 평화주의적인 입장을 충분히 엿볼 수 있는데, 그리스도인의 투쟁은 검이 아니라 말씀과 십자가를 내세우는 비폭력 평화주의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말씀은 말하기를 그리스도는 검(劍)을 가졌다고 한다. 그러나 어떤 검인가? 그분 스스로가 요한계시록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길 회개하라. 내가 속히 올 것이며 내입의 검으로 그것들과 대하여 싸우리라 하셨다. 만약에 그리스도께서 그의 적들과 그분의 입의 검으로 싸우셨다면, 만약 그가 그의 말씀의 막대기로 땅을 치셨다면, 그의 입술의 숨결로 악한것들을 멸하셨다면, 그의 형상을 따라야(conformed) 하는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적들을 다른 검으로 싸울 수 있을까?"

 

이 소책자에 드러난 몇몇 구절들을 통해서 그의 뮌스터 사건이 그의 평화주의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실제적인 검으로 인한 폭력을 반대하고 있다.그의 폭력과 검에 대한 사용을 성경을 보다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검(劍)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당연히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대항해야 함을 그의 글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루디 배르근(Rudy Baergen)은 그가 뮌스터의 사건과 폭도들의 죽음사건(old Cloisterites)통해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사람으로서 그 대가가 어떠하든지 간에 박해와 고난의 십자가를 져야한다는 사실을 더 이상 부인할 수 없었다. 그는 더 이상 양심과 신앙고백을 거스르며 살수 없었다고 평가하였다.

 

정리하면, 뮌스터(Munster)사건과 올드 클로이스터(old Cloister)의 비극은 메노 시몬스에게 특별한 사건이었는데, 첫째, 그가 가톨릭 사제로서 가졌던 내적인 고민이 뮌스터 사건과 올드 클로이스터에서 자신의 동생을 포함하여 많은 아나뱁티스트들의 무모하고 비참한 죽음을 통해 아나뱁티스트 운동에 뛰어들게 되었다. 둘째, 이 두 사건을 통해 폭력과 저항으로 잘못 인도된 그들을 보며 비폭력 무저항 운동의 평화주의적인 방식을 그가 택했다는 것이다. 셋째, 이 두 사건을 메노 시몬스의 평화주의는 그의 소책자인 『얀 반 레이덴의 신성모독』을 통해서 등장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의 검의 사용과 폭력에 대해 성경을 통해 명쾌하고 날카롭게 오류들을 지적해주고 있다.

 

2. 평화주의적 Anabaptist 에게 받은 영향

 

메노 시몬스에게 뮌스터 사건은 분명 굉장히 큰 충격의 사건이었다. 그 사건이후에 그의 인생의 행로는 평화와 비폭력주의로서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평화주의가 좀더 견고해지고 풍성해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곁에 있었던 평화주의(또는 성서적) 아나뱁티스트들의 영향이 있었다.

 

1535년 로마가톨릭으로부터 떠난 메노 시몬스는 1년뒤 좀 더 깊고 새로운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한 기도의 시간을 갖기 위해 조용하고 평온한 동부 프리즐란드(Friesland)에 은둔해 들어갔다. 그가 운둔한 그곳에 성서적 아나뱁티스트들의 대표단 7~8명이 그를 찾아와 만나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메노시몬스는 『Reply to Gellius Faber, 1554』에서 그들과의 만남에 대해서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그들은 진실로 뮌스터파를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세속적 종파들의 저주 받은(cursed) 혐오스러운(abomination)행위들을 몹시 싫어(abhorred)하였다. 그들은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나에게 가난하고 억압받는 영혼들의 고난과 궁핍에 대해 관심을 가져달라고 부탁하였다.“

 

메노 시몬스를 찾아온 이 형제단은 어떤 단체일까? 이 형제단에 대해서는 아는 바는 없지만, 추측컨대 1세대 아나뱁티스트인 콘라드 그레벨(Conrad Grebel)의 영향 아래에 있는 성서적 또는 평화적 아나뱁티스트들이라고 여겨진다. 적어도 슐라이트하임 조약 아래에 평화적인 아나뱁티스트 형제단이나, 또는 오베 필립스(Obbe Phillips)를 중심으로 한 단체일 것이다.

 

먼저 콘라드 그레벨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1524년 뮌쳐(Müntzer)에게 보낸 글을 보면,

 

“복음과 그것을 믿는 자들은 칼로 보호 받아서도 안되며 그들이 그런 방식으로 스스로를 보호해서도 안됩니다. (중략) 그들이 세상의 칼이나 전쟁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그들과 함께 모

든 죽이는 일은 중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레벨의 영향아래에 있는 평화주의적인 아나뱁티스트들은 메노시몬스와 뜻을 같이 할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충분히 그들의 모임가운데 함께하며 메노는 그의 평화주의가 좀더 견고해 졌을 것이다. 둘째 아나뱁티스트들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슐라이트하임 조약(Schleitheim Confession)에 보면,

 

“제 6항 검(무력): 세속적인 정부는 검(무력)을 사용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의 완전한 교회는 어느 누구에게도 육체적 고통을 주지 않는 권징(ban)을 사용한다..... 그리스도인은 세속적인 통치에 참여해서는 안된다...... 세상의 무기들은 육에 속해있으나 세상과 사탄을 대적할 그리스도인의 무기는 영에 속해있기 때문이다.”

 

슐라이트하임 신앙고백의 내용을 정신으로 삼은 평화주의자들이 메노 시몬스의 평화주의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며, 더욱 굳건하게 했을 것이다. 셋째, 평화주의적 아나뱁티스트는 오베 필립스(Obbe Phillips)를 중심으로 한 무리들이었을 것이다.

 

1536년 후반에 메노 시몬스는 아나뱁티스트 지도자 오베 필립스(Obbe Phillips)에게 침례를 받았고, 그 다음해 1537년 오베 필립스에 의해 그로닝겐(Groningen)에서 성직에 임명(재안수)이 되어 그로닝겐의 아나뱁티스트의 지도자가 되었다.

 

오베 필립스(Obbe Phillips)는 디르크 필립스 (Dirk Phillips)의 형제이며, 아나뱁티스트의 지도자였다. 그는 멜키오르 호프만의 추종자였다. 그러나 그는 그의 형제 디르크 필립스와 뮌스터 사건의 폭동을 보면서 열광주의적이며 신령주의적인 아나뱁티스트들에게 환멸을 느끼게된다. 이러한 그의 투쟁은 『고백,1560』에서 엿볼수 있다.

 

“뮌스터에서도 얀 마티스(Jan Matthijs) 밀사의 이런 가르침과 명령(거짓말, 가짜예언...)이 수용됐다. 그의 이름은 제라르 보에크빈더(Gerard Boekbinder)이기도 하고 얀 반 레이덴(Jan Van Leiden)이다. 그때 메시지와 사도적인 역할을 가지고 검과 무력으로 취했다. (중략) 한 동안 디르크 필립스를 제외하고는 나로 하여금 폭력적인 선동가들에 대항해 그릇된 형제들에게 저항하는데 도움을 줄 교사가 없었다......”

 

이러한 오베 필립스의 생각은 메노 시몬스에게도 찾아볼 수 있다.

 

“나는 뮌스터라이트(Munsterites)나 나와 관련해서 거짓말을 하는 또 다른 선동적인 부류에 의해 부름받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들 스스로 하나님을 두려움가운데 인내하며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에 영향을 받으며, 그들의 이웃에게 사랑으로 구원하며, 십자가를 지며, 의로움을 사랑하며 진리와 약함과 불의함을 미워하는 하찮아(unworthy) 보이는 이 공동체(Obbenite)로 부름 받았다."

 

메노시몬스는 이 한마디의 짧은 고백을 통해서 자신을 오베나이트(Obbenite)라고 하고 있으며, 이 공동체를 통해서 그는 뮌스터에 대한, 그리고 그의 평화주의에 대한 신앙을 확고하게 했을 것이다.

 

이에 관해 에스텝(William R. Estep)은, 메노 시몬스는 형제들의 이러한 요구로 이 일이 이루어진 후, 즉시 무저항적인 성서적 아나뱁티스트(재침례교) 가운데서 활동적인 사역을 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오베 필립스는 메노시몬스가 안수를 받고 여러해후에 아나뱁티스트 운동에 환멸을 느껴 운동을 포기하게 된다. Timothy George는 오베가 계속해서 지도력을 행사했다면, 아마도 화란의 아나뱁티스트들은 메노파(Mennonites)대신에 오베파(Obbenites)라고 불리게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정리하면, 메노 시몬스는 물론 그가 뮌스터 사건과 올드 클로이스터 비극을 통해서 그의 평화주의적이며 무저항적인 신앙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와 함께 뮌스터 사건을 바라보는 오베 필립스를 중심으로 한 평화주의적 아나뱁티스트 형제들과 만남가운데 그의 평화주의 사상을 견고하게 하는 영향을 받았다.

 

 

Ⅲ. 메노 시몬스(Menno Simons)의 평화주의

 

 

1. 메노 시몬스(Menno Simons)의 저서(著書)에서 나타난 평화주의

벤더(Harold S. Bander)의 "A Brief Biography of Menno Simons"을 보면, 벤더는 메노시몬스의 회심이후에 생애를 그의 사역과 지역을 중심으로 1535~1536년: 가톨릭주의의 포기와 회심시기, 1536~1543년: 네덜란드 사역들, 1543~1546년: 독일 북서부 지역의 사역들, 1546~1561년: 홀스테인(Holstein)사역으로 네 부분으로 나누고 있다.

 

위를 바탕으로 필자는 메노시몬스의 사역을 중심으로 전기와 후기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보았다. 회심 이후 초기 생애로서 1535~1543년 동안 그의 조국 이었던 네덜란드에서 사역들, 그리고 후기 생애로서 1543~1561년 동안 독일과 홀스테인 (Holstein)에서 사역으로 나눠 초기와 후기 생애를 중심으로 주요 저서에서 나타난 그의 비폭력, 무저항의 평화주의 관을 살펴보고자 한다.

 

1) 메노 시몬스의 초기 (1535~1543년)저서에서 나타난 평화

 

➀ 역사적 배경 (1535~1543년)

 

회심 이후 초기 생애로서 1535~1543년 동안, 메노시몬스는 그의 조국 이었던 네덜란드에서 7년 동안 사역한다. 그 기간 동안 대부분을 "안식처 없는 인간", “쫓기는 이단자”로 살면서 밤에는 형제, 자매들의 비밀집회에서 설교했다. 이를 벤더(Harold S. Bander)는 "A Brief Biography of Menno Simons" (1956)에서 “이시기에 메노는 기회가 닿는데로 흩어져 있는 형제들에게 설교하며, 세례를 주고, 하나님의 교회를 세웠다.(중략) 메노는 그를 잡으려는 위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열정과 용기가 사그러지지 않고 계속해서 일했다.”고 하였다.

 

즉 이 시기에 메노 시몬스는 각종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활발하게 사역하였다. 이 시기에 출간된 책들이 1539년에 250쪽 분량의 『기독교 교리의 기초』“Foundation of Christain Doctrine" 그리고 1541년에 쓰여진 160쪽 분량의 『진정한 기독교 신앙』“The True Christain Faith" 1539년에 출판된 60쪽 분량의 『기독교 세례』“ Christain Baptism"이다. 위에서 벤더에 의해 언급되지 않았지만, 메노 시몬스의 최초의 저서는 1535년에 출판된『얀 반 레이덴의 신성모독』 “Blasphemy of John of Leiden” 이다. 그렇다면, 그의 초기 생애의 저서에서 나타난 평화주의는 어떤 모습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➁ 메노시몬스의 초기 저서에서 나타난 평화

 

그의 초기의 평화주의는 어땠는지 1차 자료를 토대로 특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그의 초기 저작에서 발견되는 평화주의의 배경은 성경중심이었다. 특별히 1535년에 출판된『얀 반 레이덴의 신성모독』 “Blasphemy of John of Leiden”에서 찾아볼수 있다.

 

"말씀은 말하기를 그리스도는 검을 가졌다고 한다. 그러나 어떤 검인가? 그분 스스로가 요한계시록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길 회개하라 내가 속히 올것이며 내입의 검으로 그것들과 대하여 싸우리라 하셨다 만약에 그리스도께서 그의 적들과 그분의 입의 검으로 싸우셨다면, 만약 그가 그의 말씀의 막대기로 땅을 치셨다면, 그의 입술의 숨결로 악한것들을 멸하셨다면...어떻게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적들을 다른 검으로 싸울 수 있을까?"

 

계속해서 메노는,

 

"그리스도는 베드로의 검으로 방어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으로 그들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는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잔을 원하셨다.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그것을 피할 수 있을까?"

"너희 모든 사람들은 검(무력)과 저항의 모든 이상한 교리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라"

 

스테이어(James M. Stayer)의 "Anabaptist And The Sword" 라는 책에서, '메노는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하는 영적인 검에 대해서 다른 아나뱁티스트 리더들보다 더 강조하였다. 얀 반 레이덴을 반대하면서 그는 그리스도인 그의 적들과 싸우실 때 그의 말씀의 검으로 싸우셨으며 그리스도인은 오직 그와 같은 검을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고 하였다.

 

두 번째, 그의 저작에서 발견되는 평화주의는 그리스도인의 삶(제자도)과 관련이 있다.『신생』“The New Birth”,1537 에서 메노 시몬스의 평화주의는 신생, 즉 중생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삶에 관련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 재건된 사람들은....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두드려서 낫을 만드는 평화의 자녀들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검은 성령의 검이다. 그들은 성령을 통해 선한 양심을 휘두른다(wield).”

 

『기독교 교리의 기초』Foundation of Christian Doctrine”, 1539에서도 그의 평화주의를 찾아볼 수 있다. 메노는 초반 부분에 책을 쓰게 된 배경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는데, 당시 세속적이며 폭력적인 열광주의 자들을 향해 진정한 아나뱁티스트의 교리가 무엇인지를 변증하기 위해서 쓰여졌음을 알려주고 있다.

 

“보아라 사탄이 그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변하여 주의 곡식중에 가라지를 심어놓았다. 예를 들어 검(Sword)과 같은 것, 일부다처제(polyga에y), 외면적인(external) 왕국 그리고 왕 그리고 신앙의 실수들로 인해 무죄한 자들이 많은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우리의 신앙과 교리를 출판하도록 강하게 요구되었다.”

 

메노 시몬스의 『기독교 교리의 토대』는 검의 도가 아니라 십자가의 도를 따른 아나뱁티스트의 신앙 변증서라고 할수 있다.

 

“우리의 무기는 성과 마을을 파괴시키고 담과 문을 무너뜨리고 인간의 피를 하수처럼 흐르게 하는 무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단의 왕국을 파멸시키고 인간의 영혼안에 있는 사악한 영을 진압하는 무기다. 우리는 이외에 다른 무기가 없음을 안다. (중략) 그리스도가 우리의 요새이고 인내가 우리의 무기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검이다. 우리의 승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확실하고 진실된 믿음이다. 창과 검은 인간의 피와 돼지의 피를 똑같이 여기는 사람들에게 속한것이다.

 

즉 메노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요새는 그리스도이며, 인내는 무기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검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실제적인 중생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어때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메노 시몬스의 평화주의는 그리스도인의 제자도 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나라와 그리스도의 교회안에서 성령의 날선검,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다른 검을 가르치지도 인정하지도 않는다. 이검은 어떤 검보다도 더 날카로은 것으로서 주님의 입에서 나온다. (중략)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 검의 문제에 대하여 죄를 짓지 않도록 주의 해야한다. 우리는 살인자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믿는다.”

 

정리하면, 메노 시몬스의 초기 저작에서 나타나는 평화주의는 검과 무기의 사용에 대한 경고가 중심을 이룬다. 그에게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해야할 검은 오직 말씀의 검이다. 이것은 그의 평화주의 개념속에 뮌스터 사건의 충격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 그는 초기 저작 많은 부분에서 뮌스터 사건과 그 폭력적인 지도자들을 향한 강한 비판과 동시에 그들이 사용한 검과 무기에 관하여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이것이 초기 저작에 등장하는 메노의 평화주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메노에게 그리스도인의 평화적인 삶에 있어서 믿는 것보다는 따른다는 것이 더 중요했다. 메노시몬스에게 그리고 아나뱁티스트들에게 중생은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삶을 의미한다. 그 복종은 예수께서 사셨던 데로 사는 삶을 말하는 것이며, 그것은 검으로가 아니라 말씀과 인내 그리고 진실된 믿음으로 사는 삶임을 말해주고 있다.

 

2) 메노시몬스의 후기 (1543~1562년) 저서에서 나타난 평화

 

➀ 역사적 배경 (1543~1562년)

 

이시기에 그의 조국인 네덜란드를 떠나 메노 시몬스는 독일의 북서부 지역과 홀스타인(Holstein)지역에서 사역을 하게 된다. 이 지역의 통치자였던 신성로마제국의 찰스 5세(Charles Ⅴ)는 비록 철저한 가톨릭 신자였지만, 이 지역의 제후들은 네덜란드에 비해서는 비교적 관용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심각한 박해 없이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1544년 1월 28일~31일에 엠덴에서 존 아 라스코(John a' Lasco)와의 토론이 유명하다. 그리고 1546~1562년 홀스타인 지역으로 가서 사역하게 된다. 그는 1561년 1월 31일 65세 일기로 숨을 거둔다. 사람들은 시신을 그의 집으로 옮겨가 그의 정원에 매장하였다.

 

그의 후기저서들은 1544년 아 라스코의 토론회 이후 그의 입장을 분명하게 하기 위한 『간략하고 분명한 신앙고백과 성경의 교훈』“Brief and Clear Confession and Scriptual Instruction,” 1550년에 쓰여진 『삼위일체 하난님에 대한 신앙고백』“Confession of the Triune God,” 1552년에 아나뱁티스트의 변증서이며, 오해들에 대한 대답 방식으로 출판된『 거짓 비난에 답함』“Reply to False Accusations이 있으며, 1554년에 쓰여진 『성도의 십자가』“The Cross of The Saint ,” 등이 있다.

 

➁ 메노 시몬스의 후기 저서에서 나타난 평화

 

메노시몬스의 후기저서에서 나타나는 평화주의의 특징은 좀더 분명하고 실제적인 느낌이다. 『 거짓 비난에 답함』“Reply to False Accusations”(1552)에서 보면,

 

“성령은 우리들에게 대립하는 두 왕과 두 왕국이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한 왕은 평와의 왕이고 다른 왕은 다툼의 왕이다. 이들은 각각 자신들의 독특한 왕국을 통치하고 있다. 평화의 왕은 예수그리스도이고 그의 왕국은 평화의 왕국 곧 그의 교회이다. 그의 사자는 평화의 사자이고 그의 말씀은 평화의 말씀이다. 그의 몸은 평화의 몸이고 그의 씨는 평화의 씨이다 그곳에 평화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보고 듣고 행하는 모든 것이 평화이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평화의 왕국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세상적인 다툼과 전쟁 그리고 모든 폭력의 사용을 완전히 거절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왕국은 세상의 왕국과 구별된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의 무기는 검과 창이 아니라 인내, 침묵, 희망,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을 가지고 우리는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한다.

바울은 '우리의 전쟁 무기는 육신적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권세이다.' 라고 말했다. 우리는 이것을 가지고 사단의 왕국을 공격해야 한다... 참된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어떤 학대를 받더라도 복수하지 않는다. 그들은 인내로서 자신들의 영혼을 얻는다. 그들은 비록 그들이 속박, 고난, 가난, 검과 불에 의하여 유혹을 받을지라도 평화를 깨트리지 않는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처럼 "복수","복수"라고 외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그리스도처럼 "아버지 그들을 용서하옵소서.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라고 간절히 기도한다."

 

메노나이트 신학자인 요더(John Howard Yoder)는 제자가 된다는 것은 십자가를 그 절정으로 하는 그런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메노 시몬스 역시 제자는 그리스도처럼 십자가위의 그리스도의 기도처럼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평화를 지키는 삶이다.

 

1554년에 쓰여진 『성도의 십자가』“The Cross of The Saint ,”에서 메노 시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의 구원의 날이 가까웠으니 그날은 너를 괴롭혔던 자들에 대항하여 영원히 서게 될 날, 너의 땀과 너의 수고를 벗을 날이다. 그때 우리를 쫓던 모든 사람들이 너의 발바닥 앞에 재가 될것이고, 그들은 그때서야 이세상의 왕, 왕좌, 권력, 힘 등이 먼지, 바람, 연기에 불과함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이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 애쓰고 있는 괴롬당하고 고난당한 모든 크리스챤들은 장차올 새 생명의 굳건한 소망안에서 위로 받을 것이다." 613

 

그의 “The Cross of The Saint ,” 는 종말론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언급하고 있는데, 메노 시몬스의 글에는 그리스도인의 종말과 고난을 연결시키고 있다. 그래서 박해가 오고 괴롬당하고 고난이 찾아와도 굳건한 소망안에서 위로받게 될것임을 격려하고 있다. 계속해서 그는 같은 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대 하나님의 백성들이여, 허리띠를 동이고 전쟁을 예비하라. 피에 굶주린 미친 세상처럼 외적인 무기와 갑옷으로 싸우는 전쟁이 아니라, 굳은 확신과, 조용한 인내, 열렬한 기도로 싸우는 싸움이라. 가시 돋힌 왕관이 그대의 머리를 꿰뚫어야 할것이며, 못이 그대의 손발을 관통하리라. 그대의 육신을 채찍맞을 것이요, 그대의 얼굴은 침뱉음을 당하리라. 골고다에서 그대는 멈춰 그대 몸을 희생제물로 드리게 되리라. 그러나 실망하지 말지니, 하나님이 그대의 대장이시라"

"그러므로 우리는 가능한 낮이나 밤이나, 집에서나 들에서나, 숲에서나 황무지나, 어느곳에서든지 국내나 외국, 감옥이나 토굴, 물이든 불이든, 교수대이든 고문대이든, 군주나 왕들앞에서 언변과 펜을 통해 소유와 피와 함께 삶과 죽음으로 복음을 전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스나이더(Arnold C. Snyder)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늘나라의 전초기지를 이 땅 위에 세우도록 부름받았다. 그들은 이러한 공동체에서 예수의 제자로 예수의 길을 따르는 자들로 살아가기를 희망하지만, 영원을 위해서라면 이 땅에서 고통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메노 시몬스와 그를 따르는 메노나이트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비폭력과 평화주의로서 고난의 길을 기꺼이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그들의 종말론적 제자도의 성격 때문이었다.

 

정리하면, 그의 후기 저서들은 대부분 그의 토론과 여러 신학적 토대를 세우는 작업들이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평화의 왕국과 세상의 왕국의 구별에 대한 언급이 등장하며, 평화의 삶은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그길을 따라 사는 제자도의 삶이다. 마지막으로 제자도와 종말론을 연결시켜 평화의 삶을 사는데 있어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처럼 고난당함은 필수적이며 그러므로 희망가운데 굳건하게 지킬 것을 권면하고 있다.

 

2. 메노 시몬스(Menno Simons)의 평화주의와 그 영향

 

1) 1632년 네덜란드 도르레흐트(Dorderecht) 메노나이트 고백문서와 무저항

메노 시몬스의 평화주의는 오늘날 메노나이트의 신앙고백에 큰 영향을 미쳤다.

1632년 네덜란드 도르레흐트(Dorderecht) 메노나이트 고백문서와 무저항에 대한 제 14조항 무력에 의한 방어를 보면,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의 적에게 검으로 대항하는 복수와 대항을 금하셨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말고', '검을 집에 꽂으며' 선지자들께서 오래전에 예언하신대로 '그것들을 쳐서 보습(ploughshares)'을 만들어야 한다."

 

2) 1963년 메노나이트 신앙고백에 등장하는 평화주의

 

1963년에 메노나이트 신앙고백 편찬위원회에서 만든 "Confession of Faith in Mennonite Perspective"에서 메노 시몬스의 평화주의의 정신들을 찾아 볼수 있다.

 

제 2조 예수그리스도 조항에서, "예수의 설교와 가르침, 병고침 사역속에서..... 죄사함의 용서와 평화를 선포하셨다. 그를 따르는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믿음의 새로운 공동체를 시작하셨다. 고난 속에서도 원수를 향해 무력으로 저항하지 않고 사랑하시어 우리에게 자신을 따르는 모범을 보여주셨다."

 

제 17조 제자도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믿음이란, 폭력이나 군사적 수단을 사용하기 보다는 평화와 정의를 위해 행동함을 의미한다."

 

제 22조 평화, 정의, 무저항에서 "우리는 폭력이나 전쟁이 우리의 상황을 변화시킨다고 해도 성령의 인도함으로 평화, 정의, 무저항을 실천하신 그리스도의 길을 따른다.(중략)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로서 예수의 평화와 정의의 사역에 참여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 전쟁을 준비하지 않으며 전쟁행위와 군복무에 가담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제 23조 정부와 사회에 대한 교회의 관계에서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모든 나라(모든 개인과 기관의 사람)들이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하고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처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증거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내신 이 땅의 평화를 추구한다."

 

 

Ⅲ. 결론

 

이상으로 메노 시몬스의 평화주의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첫째, 그의 평화주의는 여러 가지 역사적 배경을 통해 일어나게 되었다. 1534년에 일어난 뮌스터(Munster)사건과 Old Cloister의 폭동사건을 통하여 폭력적이며 열광적인 아나뱁티스트들을 향하여 그리고 자신의 형제의 죽음과 300명이나 되는 그리스도인들의 죽음을 보며 '검(劍)의 철학의 주창자들'의 비 그리스도교적인 성격을 비판하고, 무저항의 삶을 살 것을 요구했다.

 

둘째, 그에게 있어서 평화주의적인 삶은 1536년 오베 필립스(Obbe Philips)로부터 재안수를 받고 그와 함께 뮌스터 사건을 반대하며 평화를 주장하는, 오베 필립스를 중심으로 한 아나뱁티스트 형제들과 만남가운데 그의 평화주의 사상을 견고하게 하는 영향을 받았다.

 

셋째, 그의 저술 작업등을 통해서 그의 평화주의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었는데, 메노 시몬스의 초기 저작에서 나타나는 평화주의는 검(Sward)과 무기(Weapon)의 사용에 대한 경고가 중심을 이룬다. 또한 메노에게 그리스도인의 평화적인 삶에 있어서 믿는 것보다는 따른다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 복종은 예수께서 사셨던 데로 사는 제자도를 말하는 것이며, 그것은 검으로가 아니라 말씀과 인내 그리고 진실된 믿음으로 사는 삶임을 말해주고 있다.

 

넷째, 그의 후기 저서들은 대부분 그의 토론과 여러 신학적 토대를 세우는 작업들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평화의 삶은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그길을 따라 사는 제자도의 삶이며 이런 평화의 삶을 사는데 있어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처럼 고난당함은 필수적이다. 희망가운데 고난을 감수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메노 시몬스의 평화주의는 오늘날 메노나이트 교회의 평화정신에 깊은 영향을 주었고 그 정신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들의 교리는 성경을 따라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양심의 자유, 정교분리, 무저항, 비폭력등이 중심이 되었다.

 

 

Ⅳ. 참고문헌

 

1. 1차 자료

 

John C. Wenger, The Complete Writings of Menno Simons. Scottdale,Pannsylvania:Mennonite Publishing House,1956.

Harold S. Bander. A Brief Biography of Menno Simons, in John C. Wenger. The Complete Writings of Menno Simons. Scottdale,Pannsylvania:Mennonite Publishing House,1956.

기독교 고전총서 20 , 남병두 홍지훈 옮김,『성령주의와 아나뱁티스트 종교개혁자들』. 서울: 두란노아카데미,2011.

메노나이트편찬위원회. Confession of Faith in Mennonite Perspective. 김경중역.『메노나이트 신앙고백』.강원: KAP,2007.

 

2. 국내서적

 

김승진.『근원적 종교개혁: 16세기 성서적 아나뱁티스트들의 역사와 신앙과 삶』.대전: 침례신학대학교출판부,2011,

박경수.『교회사 클래스』.서울: 대한기독교서회,2010,

신원하.『전쟁과 정치』.서울: 대한기독교서회,2003.

 

3. 외국서적

 

Franklin H. Littell. The Anabaptist View of the Church: A study in the Origins of Sectarian Protestantism. Boston, Starr King Press, Beacon Hill 1958.

Guy F. Hershberger. War, Peace & Nonresistance. Scottdale, Pensylvania: Herlod Press,2009.

James M. Stayer. Anabaptist And The Sword..Lawrence, Kansas, 1973.

 

4. 번역서적

 

Arnold Snyder. From Anabaptist Seed. 김복기역,『재세례신앙의 씨앗으로부터』.강원: KAP,2007.

Cornelius J. Dyck. An Introduction To Mennonite History. 김복기역.『아나뱁티스트의 역사』.대전:대장간,2013.

George, Timothy. Theology of the reformers. 이은선, 피영민 역. 『개혁자들의 신학:주요 종교개혁자 4인의 삶과 사상 루터.츠빙글리.칼빈.메노시몬스』,서울: 요단 ,2000.

John H. Yoder. The Original Revolution. 김기현, 전남식역.『근원적혁명: 기독교 평화주의에 대한 에세이』.대전:대장간,2011.

John H. Yoder, "The Politics of Jesus", 신원하 권연경역,『예수정치학』.서울: IVP, 2007.

Rudy Baergen. The Mennonite Story. 김복기 역.『메노나이트 이야기』. 강원도: 한국 아나뱁티트스 출판사 KAP.2005.

Stuart Murray. The naked Anabaptist - The Bare Essentials of a Radical Faith. 강현아역.『이것이 아나뱁티스트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말하다』.대전:대장간,2011.

William R. Estep. The Anabaptist Story. 정수영역.『재침례교도의 역사』. 대전:요단,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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