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을 추모하며 - (번역: 이스라엘)
1909년 4월 3일, 대한민국 광주의 의사인 Clement Carrington Owen 목사는 잠시 폐렴을 앓고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집으로부터 남쪽으로 70마일 거리의 전도여행 도중에 병을 얻고서 그는 현지민들에 의해 가마에 실려 삼일 후 집으로 돌아왔다. 그를 위해 모든 애정 어린 손길과 의료기술들이 총동원되었으며,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이 함께 통곡하며 눈물로 그의 목숨을 살려주시길 바랐지만, 하나님께선 그를 데려가시고자 하셨다. 이것은 이 생애에서 결코 이해될 수 없는 신비한 섭리들 중 하나였다. 그를 대체할 사람은 없었다. 홀로 남겨진 아내,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꼭 붙들고 있는 어린 자녀들,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열 세 지역에 흩어져 있던 수백명의 한국인 그리스도인들, 남겨진 소그룹의 동료들, - 모두 하나같이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우러러 보며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울부짖었다. “우리의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Owen 선생은 일찍이 자신의 인생을 결정지었던 그러한 신앙적인 인상들을 받았었다. 1867년 7월 19일 버지니아의 블랙 월넛에서 그리스도인 부모(Robert L. Owen 과 Mary G. Carrington)에게서 태어난 그는 4살에 아버지를 잃었다. 그리고 그는 버지니아 블랙 월넛에 거주하고 계시던 할아버지인 Wm. I. Owen과 함께 살게 되었고, 할아버지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그의 신앙적 교육은 그의 두 명의 할머니들로부터 조심스럽게 주어졌고, 그분들에 대한 기억을 그는 애정을 담아 회상했었다. 그는 버지니아의 Hampden Sidney 대학을 3등의 성적으로 졸업했다. 좋지 못한 건강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버지니아에 있는 대학을 포기했고, 나중에 그는 Hampden Sidney 에 있는 신학과를 선택했으며, 스코틀랜드에서 신학공부를 위해 2년을 보냈다.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그의 신학 학위를 버지니아에 있는 Hampden Sidney의 Union Seminary에서 수여했다.
해외 선교사 업무에 자원봉사를 한 후, 그는 이 일을 위해 자신을 더 적절하게 맞추기 위해 의학과정을 선택하기로 결정하지만; 이 추가적인 준비를 위해 필요한 시간은 넉넉히 주어지지 않았고, 해외 업무의 긴급함, 일꾼들에 대한 즉각적인 필요, 그리고 인생에 대한 불확실성 등에 대한 그의 현실 인식은 매우 날카로웠다. 따라서 그는 대체자를 보내기로 결정했고, A.D. Drew 박사가 선정되어 이 당시에 Owen 목사의 도움을 받았다.
Owen 박사는 버지니아의 대학에서 그의 의학공부를 마치고 해당 학교에서 그의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당시 그는 그의 과정에서 원목으로 섬기고 있었다. 뉴욕에서 대학원 과정을 마친 그는 한국 행 배에 몸을 실었고, 1898년 도착했다. 의료 선교사로 지명되었기에 그는 Eugene Bell 목사와 목포로 파송되었고, 거기에서 사역이 막 시작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거의 4년을 의료봉사에 사역을 하며 번듯한 진료소를 설립했다. 그리고 이 진료소는 아직도 사용되고 있으며, 역에 있는 유일한 의료건물이다.
1900년 12월, 그는 북한에서 장로교 선교의 활동적인 일원인 Georgiana Whiting 박사와 결혼했다. 그녀는 그와 함께 네 명의 자녀를 낳았다: Mary, Ruth, Dorothy 그리고 그의 사후 한 달 뒤에 태어난 갓난아이다.
사업과 건강 상황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가졌던 1년 간의 휴가를 마치고 1903년 10월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그의 생애를 전도사역에 헌신하기로 결심한다. 이 선택은 그가 역에서 유일한 남성이었기에 전도사역에 깊게 관여하게 되었고, 이를 위해 교육과 기질적으로 모두 자격을 갖추게 된 앞선 일년 동안의 그의 업무의 특성에 의해 큰 영향을 받았다.
목포에서의 또 다른 일 년의 사역 후, 그는 1904년 가을에 Bell과 함께 광주에 새로운 역을 개설하라는 지시와 함께 내륙으로 파송되었다. 이 곳에서 그는 그가 죽기까지 전도사역, 말씀선포, 교육, 심방, 때로는 의료분야에서 도움의 손길을 제공하며 성공적인 사역에 헌신했다. 그가 죽음을 맞이할 무렵, 그는 그가 5월 한 달 동안 완성시킨 모든 한국의 주일학교를 위한 준비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의 사역의 이 기간 동안, 현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그는 남쪽으로 대단한 사역의 확장을 이뤘고, 이곳에서 그는 수백명의 지지자들을 가진 삼십 여개의 그리스도인 그룹을 만들었다. 그는 그 지방에서 가장 큰 선교영역에서 헌신하였으며, 이것은 지난 이년 동안 다른 어떤 지역보다 빠르게 열려진 것이었다. “왜 아빠는 우리 집에 머무르지 않아요?”, 라는 그가 죽기 몇 주 전 그의 작은 딸이 던진 슬픈 질문은 생명의 떡을 바라볼 수 있도록 도울 사람이 그 밖에 없었던 수천명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그의 신실한 노력에 대한 명확한 증거다.
Owen 박사를 완벽하게 묘사한 문구가 있다: “그는 그리스도인 신사였다.” 고귀한 가문의 후손으로 그는 설명할 수 없는 매력과 귀족의 특징을 나타내는 예의바른 특징을 갖고 있었다. 그는 다정다감한 남편이자 아버지였으며, 충직한 친구이자 공감할 줄 아는 리더였다. 그의 어린 시절부터 그의 신앙적 경향과 취향은 뛰어났다. 세 가지의 특성이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그는 뛰어난 기도와 믿음의 사람이었으며, 그는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높였다. 그가 어떤 의구심이 들 때에도, 그는 그것을 절대로 표출하지 않았다. 그와 순회여행을 다니는 것은 특권이자 영감이었다. 사람들은 항상 그의 뛰어난 영성과 하나님께 의존하는 모습에 영감을 받고, 감명을 받았다. 이러한 것들은 그에 관해 지극히 일부에 불과하며,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실제적인 세부사항들은 대부분 맡겨주었다. 그렇지만 그는 결코 그에게 주어진 책임을 피하지는 않았으며, 그는 그가 싸워야 할 무기의 효용성을 무수히 증명해왔다. 그는 한국인들을 사랑했으며 그들과 함께 있기를 좋아했다. 자신의 “사랑채” 또는 객실에서 성경공부나 찬송을 위해 그들과 만나는 것만큼 그를 기쁘게 하는 것은 없었으며, 그는 밤마다 계속 하곤 했다. 육체적으로 강한 사람은 아니었으나, 선교에 있어서 더 신실하고 열정적인 순회전도자는 없었기에, 그는 원거리 사역지는 한 달에 한 번 꼴로 종종 자리를 비웠다.
사람의 눈으로 그의 죽음을 바라볼 때, 이것은 곧 이어진 우리의 또 다른 베테랑 Mr. Junkin의 죽음과 함께 하기에 선교에 있어서 회생 불가능한 타격으로 보인다. 후자의 경우와 같이, 그는 아직 젊은 때에 생을 마쳤으며, 무수히 많은 약속은 있으나 시작은 하지 못한 일들만 남겼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선 실수가 없으신 분이라는 것을 안다. Owen 박사는 그의 길을 마쳤다 - 어떤 사람도 자신의 일을 마칠 수는 없다 - 그는 “선한 싸움을 다 싸웠고, 믿음을 지켰으며, 그는 선한 고백을 증언하였으며, 그는 면류관을 받았다.” 남겨진 우리에게, 더 무거운 짐이 지워진 우리에게 너무나도 필요한 사람을 집으로 부르시는 우리 하늘 아버지의 신비로운 역사는 이해가 불가능하다. 시간이 어쩌면 그분의 뜻을 약간은 드러내 줄지 모른다. 현재에 있어서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아직 낮이라 불리울 때, 곧 일할 수 없는 밤이 속히 오리니” 신실함과 활동에 있어서 더욱 열심을 내어야 할 소명이며, 집에 거주하는 남녀 모두에게 일어나 자신을 드려 이 신실한 하나님의 일꾼(그는 그 자신을 아끼지 않고 그의 주인을 사랑했으며, 그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생명도 아끼지 않았으며, 그가 사랑하시는 일을 위해 오히려 이것을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 이 시작한 일을 감당하라는 나팔소리다.
“영혼을 구하는 자는 현명하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추신 : 위의글은 호남지역의 주요 지역에서 교회들을 개척한 의사이기도 했던 오웬(한국명: 오원/ 오기원)선교사를 추모하는 글이다. 아래는 그 추모글이다. (번역 : 이스라엘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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