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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든지 죽든지 (신학)/교회사

김주환목사 자료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16. 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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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환 목사에 관한 자료들을 모아 정리를 하였다. 
사실 김주환 목사는 아내의 증조부가 되신다. 필자가 처갓집 할머님 장례를 치루고 우연히 방문한 교회가 진도초대교회였다. 그곳에서 당시 담임목사로부터 김주환 목사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초기 진도교회사 연구를 위해 반드시 알아야할 인물임과 동시에 맹현리 선교사의 조사로서
남도지역 개척사역을 도왔다. 그러므로 오늘날 김주환 목사에 관해 알릴필요와 그분의 자료들을 정리 해야할 필요를 강하게 느꼈다. 일종의 후손으로서 부담감 이었다.
정리된 자료들은 조선예수교 장로회 사기에 기록된 교회 개척 자료들을 토대로 정리한 것이며, 초기 중기 말기 로 시대를 구분하여 정리하였다.  

김주환목사
(1894~1966)에 관한 정리

"조선예수교 장로회사기"에 의하면 진도 분토리교회는 김경원댁에서 1902712일에 성경공부 모임으로 시작하였다가 후에 1905년 정경숙 김경원 김경오 외 칠인이 동리서재를 차득하여 예배를 드렸다. 이것이 진도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 이야기이다.  

진도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보고는 프레스톤(John F. Preston 변요한) 선교사가 Korea Mission Field 1905년 8월에 쓴 "Poonto"를 통해 자신들이 진도에 발을 내딛은 첫 선교사일것이라고 추정했다. 게다가 흥미롭게도 그곳에 이미 젊은 유배자들을 중심으로한 모임이 있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프레스톤 선교사는 본인들이 진도의 첫 선교사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미 1894년 4월 23일 레이놀즈 선교사가 전도팀들과 함께 진도를 방문한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하여간 진도에는 이미 1905년 이전에 유배온 젊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모임이 시작되었고 1905년에 이르러 예배당에 시작되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불과 일년에 신도가 칠십여인에 달하매 삼백여원을 출연하여 분토리 예배당을 신축하였고 1911년 교회가 성장함에 인근부락에 별도의 교회를 세우려고 시작하여 진도읍 교회를 개척 지원하였고 1919년에 정경숙을 장립하여 당회가 시작되었다. 1922년 장로가 휴직됨으로 당회가 폐지되었다가 1925년 맹현리 선교사가 조사 최병호와 함께 노회로부터 당회권을 받아 장로 2(김경오 김주환)를 세워 당회가 재 시작되었다

1925227일 진도군 최초로 주,야 학당을 설립하여 문맹퇴치를 통한 민중계몽과 국권회복을 이루려는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1937년에 건축 이전하였고 1987년에 현 장소로 새롭게 건축 이전하였다

교회를 섬긴 선교사는 맹현리(1911~1926) 류서백(1927~1930.4) 남대리(1930.5~1931.2) 김아열(1931.3~1936.3) 류서백(1933) 조하파(1934) 이다. 분토리교회의 명칭은 군내중앙교회로 그리고 현재는 진도초대교회로 명칭이 바뀌었다. 김주환 목사는 1939년 분토리교회에 목사로 청빙을 받아 시무하게 된다. 

필자는 김주환 목사의 일생을 중심으로 글을 전개해나가고자 한다. 

 

1. 초기 사역 (1907~1924년): 맹현리선교사와 조사로 남도지역 개척 사역

 

김주환목사는 미국 남장로교회에서 파송한 맹현리선교사(McCallie, Henry Douglas (1877-1945))와 그와 함께한 조사들과 함께 서 남해를 중심으로 한 교회개척으로  20대를 보냈다.[각주:1]  김주환 목사에 대한 조선예수교 장로회 사기 에 기록된 기록들은 이렇다. 

1907 무안군대척리교회가 성립하였고 맹현리 선교사를 도와 조사로 시무하게된다.  

"선시에 선교사 맹현리 가 이장호를 파송하야 전도한 결과 신자 초진하야 예배당을 신건하고 조사 마서규 김봉천 김주환 등이 시무하니라."

1915년에는 무안군 장고리교회가 설립되었다. 

"먼저 선교사 맹현리가 조사 김경운, 마서규 등을 파송하여 전도하므로 신자가 생겨나 박태필 방에서 예배하였고, 조사 최병호, 정관진, 김주환, 박도삼 등과 선교사 민도마가 교회를 인도하니라."

1919년 장흥군 영천교회가 설립된다. 

"선시에 선교사 맹현리와 조사 김주환과 전도인 김성빈등의 전도로......"

1920년 무안군자라교회가 설립되었다. 

"선시에 선교사 맹현리가 조사 마서규를 파송하여 전도하므로 교회가 설립되고 그후에 선교사 민도마가 조사 김주환을 파송하여 교회를 인도하였다."

1922년에 영천군 안천교회가 설립되었다. 

"선시에 선교사 안의와(James Edwards Adams)가 파송한 이상기의 전도로 본리에 신자가 증거하여 초가삼간의 예배당을 신건하니 설립자는 선교사 위철치((Rev. George H. Winn 魏喆治)요 영수에 김주환과 집사에 박산광이었다."

(참고: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조선장로교사기,서울: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2000.)

 

2. 중기 사역(1925~1934) : 분토리교회 장로및 평양 장로교신학교 재학 및 졸업.

 

그 후 그의 기록은 1925년 광주노회 신학생 추천명단에서 발견할수 있다.

 

 * 1925년 광주노회 신학생추천 명단.

(1925년 7월 14일자 <동아일보> "예수교 노회")


*1925-26년 평양의 장로회
신학교 재학생명단

 

(1925~26 평양 장로회신학교 재학생명단 출처: 옥성득교수의 한국기독교의 역사:  https://1000oaks.blog.me/221287338811) 

위 자료에 의하면 김주환목사는 장로회신학교 재학 당시 장로의 직분으로서 2학년으로서 33세 였다. 

김주환 목사는 1925년 9월 11일 분토리교회 당회장 맹현리 목사에 의해 김경오 김주환 두명을 장로 피택하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 1926년 1월 25일 맹현리 목사의 주례로 김경오 김주환 의 장로 장립식을 거행하게 된다. 

순서는 당회록에 보면, 1. 찬송 3장 2. 기도 맹현리 목사 3. 성경랑독 행 17:3 김주환 조사 4. 독창(민도마 목사) 5. 장로 맹세 조병션 장로  6. 교회맹세 김윤학 장로 7. 안수기도 정관진 장로 8.악수례 9. 병창 본교회 찬양대 10. 장로권면 민도마 목사 11. 교회 권면 리은영 조사 12. 기도 허경언 집사 13. 찬송 6장 14. 광고 김경오 장로 15. 축복 민도마 목사 로 진행되었다.

1925년 장로로 피택받은 김주환 목사는 당시 조사로 활동하고 있었으며 그 해 광주노회에서 신학추천서를 받고 장로회신학교로 입학하였다. 1926년 장로로 장립을 받았다. 

분토리교회 장로 장립 기사 <기독신보> 1926년 2월17일

1928년 김주환 장로 가족은 순창읍교회로 이명하고, 조사로 활동하게 된다.

"순창읍 교회의 출발은 이사라와 이사라의 아들 박삼수가 광주 기독 병원에서 개신교를 접하고 순창에 내려와서 초대 신자로 활동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사라의 남편 박성희는 독립운동을 위해 함경북도 산수갑산에 머물다가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연해주로 떠나고, 이사라와 박삼수가 타마자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순창 읍내에 초가 한 칸을 마련하고 예배를 보기 시작하였다. 그 후 고려위(高麗偉)·이영희·김세열·이병열·기주환(수정: 김주환)·박문익·최영주·유기섭·한종구 조사들이 차례로 시무를 보았으며, 유기섭 목사는 1930년 평양 신학교를 졸업하고 이 교회의 초대 목사가 되었다."[각주:2]

 그는 1931년 제26회로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1931년 3월 제26회 졸업생 사진 출처: 장로회 신학대학교 편집위원회 편,"장로회신학대학교 역사화보집 제 1권 1901~45년.)

 

(김주환 목사 , 전신 졸업사진)

 

3. 말기 사역(1935~1966) : 지교회 목회자로서 시무 & 군내 면장으로 직임.

그 이후로 1931년부터 33년 까지 광주 백양교회에서 시무하게 된다. 1931년 김주환 목사가 시무할 때 3년간 금주.금연을 강조하였고 교회 교인들을 중심으로 신사참배및 절제운동을 통해 일제에 항거 하였다.[각주:3]

1939년~50년 분토리교회에서 당회장으로 시무하게 된다[각주:4] 

그 후 1942년부터 46년까지 장흥중앙교회에서 시무 1947년~48년까지 진도중앙교회에서 시무하게 된다. 김주환 목사가 진도 중앙교회에 시무할시 진도면 성내리 43번지에 목재 건물로 교회당 건립하였다.[각주:5] 진도중앙교회는 진도 3.1운동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다.[각주:6]  

일제가 요주의 인물로 점찍은 이들이 출석하고 사역한 교회인 만큼 진도중앙교회가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1937년에는 일제의 강력한 방해로 사실상 폐교회 상태에 몰리기도 했고, 1938년에는 화재로 예배당이 소실되는 사고까지 당했다.
하지만 홍승애 서성일 신복균 김판심 전도사 등이 헌신적으로 교회를 이끌면서, 성도들은 예배의 맥을 이어갔고 끝내 교회를 지켜냈다. 그리고 분토교회 장로 출신 김주환 목사가 부임하면서 교회당이 신축되고, 진도중앙교회는 150여 명의 성도들이 모이는 큰 공동체로 성장했다. (기독신문(http://www.kidok.com) 2019.03.19 검색.)

(진도중앙교회 역대 담임목사 사진. 5대 김주환목사. http://www.jindojch.org/ )

 

벽파교회는 1945년 11월 목포중앙교회에서 열린 심령대부흥회에 참석한 정애심이 벽파로 돌아와 자신의 집에 기도처를 두게 되면서 시작됐다. 진도중앙교회 김주환 목사와 채길용 전도사가 순회예배를 드리곤 했다. 이곳에 미국 남장로회 목포선교부가 1949년 11월 오교남을 파송했다. 1950년 3월 오교남 정애심 등에 의해 헌당 된 예배당이 지금도 남아 있다. 비록 가정집으로 쓰이나 50년대 섬 지역 교회건축물을 연구할 수 있는 귀한 성전이 아닐 수 없다.
[출처] - 국민일보 "한국기독교 역사 여행: 하늘가는 밝은 길이 내앞에 있으니... 울돌목 바다 순교지 되다. 2019.05.17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078228&code=23111654&cp=nv

 

이후 김주환 목사는 1949년~1952년까지 제 11대 진도 군내 면장을 역임(歷任)한다.  

 

 박찬승 교수가 쓴 "마을로 간 한국 전쟁"이라는 책에서 김주환 목사에 관해 찾아볼수 있었는데, 1946년 진도에는 미군정시기에 좌우 진영간에 찬탁과 반탁에 대한 갈등이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조선공산당 전남노당은 주로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청년들로 이루어져있었고, 또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진도군지부 등의 우익 단체가 형성된다. 당시 대한 독립촉성 국민회의 간부진에 위원 명단에 김주환 목사가 있다. (진도 군지 편찬위원회, 진도군지 503쪽.) 

 

(김주환목사 비석 "공 양조(字 京元)장남 기독교 信奉(신봉) 평양신학교 졸업 목사 30년간 視務(시무) 군내면장 5년간 歷任(역임) 被招(피소) 享年(향년) 72才 以來)

 

4. 평가.

 

 

  1. http://www.churchr.or.kr/news/articleView.html?idxno=3551 [본문으로]
  2. http://sunchang.grandculture.net/Contents?local=sunchang&dataType=01&contents_id=GC05901322 [본문으로]
  3. http://www.gjon.com/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5870 [본문으로]
  4. 당회록 1939.5.10. [본문으로]
  5. http://www.jindojch.org/main/sub.html?pageCode=2 [본문으로]
  6. 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20033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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