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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든지 죽든지 (신학)/교회사

진도 토착인들에 의해 세워진 분토리교회에 관하여.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16. 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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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분토리교회의 설립시기에 관하여.

    
  
분토리교회는 1905년 프레스톤(Preston 변요한), 오웬(한국명: 오기원 또는 오원, Clement C. Owen), 다니엘(Thomas H. Daniel)등의 의사이면서 선교사인이들이 진도로 내려와 유배온 선비들을 만나 전도했으며 그를 중심으로 진도 분토리에 최초로 예배모임을 가졌다고 알려져있다. [각주:1]  분토리교회가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러나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에 보면 선교사들이 아니라 자생적 다시말해서 토착인들에 의해 세워진 공동체였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진도군(珍島郡)분토리(粉土里)에 교회가 성립(成立)하다. () 정경숙 김경원 김경오외 칠인이 도정의 의 전도로 신교하고 동리서재를 차득하야 예배하다가 불과 일년에 신도가 칠십여인에 달하매 삼백여원을 출연(出捐)하야 예배당을 신축(新築)하얏고 후에 정경숙을 장로로 장립하야 당회가 조직되니라[각주:2] 

 

       위의 조선예수교장로회사의 기록에 따르면, 분토리교회는 조선예수교장로회 1905년 총회때에 설립보고가 이루어졌다. 특별히 유심히 살펴볼것은 이 교회의 설립은 정경숙, 김경원, 김경오외 칠인이 도정의 의 전도로 예배하다가 일년에 신도가 70여명에 달해 재정을 모아 예배당을 신축하고 당회가 조직되어 시작되었다. 


2. 분토리교회 개척자들.

진도의 첫 그리스도인이며 분토리교회의 개척자중 '도정의' 라는 인물에 관하여는 알려진바가 없지만, 조선예수교 장로회사기에 보면 두군데에서 이름을 살펴볼수 있다. 하나는 분토리교회 설립에 관하여 기재된 것과 해남군 선두리교회의 설립에 관한 보고(1902년)에서 등장한다.

해남군(海南郡) 선두리교회에도 교회가 성립하다. 선시에 선교사 오기원이 조사 변창연 도정의로 전도하야 신자가 삼백여인에 달하다가 점차 퇴보되고 수년후에 122명에 불과하더니 선교사 변요한 하위렴 맹현리와 조사 이초고 등이 전도함으로 근근유지하니라.[각주:3]

      위에 소개된 해남군의 선두리교회는 1902년에 설립된 교회로 보고되었다. 1900여년에 선교사 오기원이 조사 변창연과 도정의를 전도한것으로 보고하고 있다. 그러므로 도정의는 오기원 선교사에 의해 신자가 되어 진도로 들어와 전도활동을 하였고 그의 전도로 인하여 김경원외 7인이 감화를 받아서 진도의 분토리에 교회가 세워진것으로 미루어 짐작할수 있다.  선교사에 의해서 복음을 들은 한 사람이 진도로 내려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결국 전도된 이들이 재정을 모아 예배당을 신축게 되고 교회가 세워진 것은 교회사의 역사적 가치가 충분하다. 

      특별히 도정의에 의해 전도된 김경원외 7인은 진도로 유배온 선비들의 후예들일 것으로 추정한다.[각주:4] 이들은 복음을 듣고 뜨거운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함께 예배드리면서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였고 이것이 분토리교회의 시작이다. 분토리교회가 선교사들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 라는 것을 정설로 받아들이게 된 이유중에 하나가 바로 프레스톤(변요한) 선교사의 기록 때문이다.   

    1905년 5월15일 진도를 방문한 프레스톤(Preston 변요한) 목사의 여행 편지와 Korea Mission Field의 기록에 의하면 외국인을 보고 신속히 도망간 토착민들을 보면서 자신들이 첫 외국 선교사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번 여행은 더욱 기이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섬에 발을 내딛은 첫 선교사들이었기 때문이다.  마을사람들이 우리가 접근하자마자 신속히 도망들 갔기 때문이다. 분토와 그 근처마을을 방문한 후 우리는 상부, 치안판사(事,Magistracy)에게 간청하여(pressed on) 편지에 의해 이미 전해 진 젊은 유배자 찾았다. 이 젊은 사람은 귀종가문으로 6년동안 토쿄(ToKio)대학에서 학생으로 있었다

우리는 그들이  지적인 신앙인이라는 것을 발견하였고, 서울에서 처음으로 복음을 들었고 그전에  그의 중국어 성경책 학생이었다. 그는 주목할만한 복음의 영적의미를 명석한 두뇌를 가졌고 비록 초신로서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분토와 어느지역에서든 좋은 사역을 해낼수 있을 것이다.[각주:5] 

       

 

     프레스톤과 선교사 일행들은 진도에서 고학력 자들로 구성된 유배자들을 만난다.  그의 일기를 통해서 자신이 진도의 첫 방문자일것이라고 여겼다. 또한 프레스톤과 전도 여행팀이 만난 이들은 이미 복음을 들은 그리스도인들이었으며, 지성인들 이었고, 심지어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고 기록하고 있다.[각주:6]  이 기록을 통해서 알다시피, 프레스톤 선교사 팀이 방문한 1905년 이전부터 진도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함께 모여 성경공부도 하고 예배도 드리고 있었다. 진도로 유배온 선비들에 의해 모인 자생적공동체였다. 그런데 프레스톤은 자신들이 진도에 첫 발을 내딛은 외국인일 것이라고 여겼고, 이런 자료를 근거로 이지역 선교가 1905년 쯤 되었을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   

 

      

    이미 레이놀즈(W.D Reynolds)선교사가 10년전 1894년 4월 23일 우수영 수사로부터 진도까지 여행허가를 받고서 진도를 방문한 기록이 있다. 프레스톤 선교사는 주민들의 반응만으로 자신들이 첫 방문한 선교사인 것으로 여겨 오늘날까지 이르렀으나, 이미 1894년 레이놀즈와 그의 전도팀들이 진도에 처음으로 방문한 것이다. 

 

(레이놀즈의 자필 일기, 당시 전라도 지역 선교후 일기자료 / 사진 출처:https://blog.naver.com/swlee8585/220951846960 )

 

       레이놀즈선교사가 진도에서 어떤 사역을 했는지는 좀더 기록을 찾아봐야 겠지만, 분명한 것은 진도의 기독교역사의 시작을 프레스톤선교사가 방문한 시점인 1905년으로 이해하면 안된다. 적어도 프레스톤 선교사 방문 그 이전에 그리스도인된 진도의 유배자(선비들)들로 자생적 공동체가 형성된 그 시점(1894년 혹은 그 이전)으로 봐야 할것이다.
이것이 진도 기독교의 초기 역사이다. 


3. 진도의 선교역사의 중심인 분토리교회 

분토리교회는 진도에 최초로 세워진 초대교회이다. 위의 근거들을 통해 분토리 교회가 진도에 최초로 세워진 초대교회가 맞다면, 분토리교회는 지금까지 알고 있는 대로 1905년 설립이 아니라 그 이전에 세워졌을 가능성이 짙으며, 해외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되었다기 보다는 이미 신앙을 가지고 있던 진도의 유배자들, 즉 이미 복음을 듣고 회심을 경험한 무리들에 의해서 세워진 자생적 공동체라는 것을 알수 있다.  

 

      현재 분토리교회는 진도초대교회로 교회명을 바꾸었다.  '오명환목사'가 담임목사로 시무하고 있다. 오 목사에 따르면, 현재 진도초대교회의 주보에는 1902년 7월 13일에 개척된 것으로 기록이 되어있다. 즉 교회의 당회원들은 1902년이 교회의 설립년도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에 등장한 자료에는 분토리교회가 1905년에 교회 설립에 관련한 보고를 한다.
그렇다면 1905년이 교회의 설립년도라고 볼수있을까?  아니다. 1905년에 노회에 보고된 분토리교회의 설립 보고는 개척년도라기 보다는 교회가 설립되어 어느정도 조직을 갖추었음을 알리는 보고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즉 분토리교회는 1905년에 노회에 보고 될 수준의 조직교회가 되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확인할수 있는 것은, 분토리교회의 설립년도는 1905년 이전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분토리교회가  '자발적' 혹은 '자생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모임을 갖기 시작한 것은, 적어도 1905년 이전일 것이다.
레이놀즈가 처음 진도에 발을 내딛은 1894년부터 프레스톤이 진도에 발을 내딛은 1905년 사이에 이미 진도의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신앙 공동체를 이루었고 진도의 최초의 교회인 분토리교회까지 설립하였던 것이다.
그 후 분토리교회는 1917년에 초기 개척멤버였던 정경숙을 장로로 장립하여 당회가 운영된다.   

(사진은 교회 상량(上樑) 할때 대들보에 쓰인 것이다. 장로 정경숙, 김맹환. /사진출처: 진도초대교회 오명환목사.)

       분토리교회의 초기 당회록은 1925년 9월11일부터 시작된다. 당회록의 시작은  맹현리(MaCallie) 목사가 노회에 당회원을 받아 조사 최병호와 전도방에 모여 장로 2인을 장립하기로 결의한 내용으로 시작하고 있다.

당회록시작

주후1925년 9월 11일 하오 4시에 맹현리목사가 로회에 당회원을 밧아조사 최병호시와 젼남진도군 군내면 분토리 교회 젼도방에 모여 맹목사기도후.........투표 션뎡하니 득표수 3분지 2이샹으로 김경오 김주환 양시가 시편되다.[각주:8]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하)에 보면 "1922년 진도군 분토리교회는 장로가 휴직됨을 인하여 당회가 폐지되었으며 그 후에는 선교사 맹현리와 조사 최병호가 시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각주:9] 진도초대교회 담임목사인 오 목사에 의하면 1922년에 정경숙장로가 갑자기 휴직하게 되었고, 당회가 성립되지 않아 2년여 당회가 없는 상태로 맹현리선교사에 의해 교회가 운영되었다고 전해주고 있다. 그후 1925년에 비로소 맹현리선교사와 조사 최병호에 의해 당회가 열리게 되어 김경오, 김주환(1894년 4월 11일 생) 두명의 장로가 피택이 된다.

(사진은 분토리교회 1925년 부터 시작된 당회록이다. 자료출처: 진도초대교회 오명환목사)

(사진은 진도초대교회(분토리교회)의 교회 주보이며 상단 좌측에 설립일이 1902년 7월 13일이다.

사진제공: 진도초대교회 오명환목사)

 

 

 

 

 

 

 

 

 

 

 

 

 

 

  1. 리폼드뉴스,2016.07.09 검색 "진도최초의교회 분토리교회 세워지다." http://www.reformednews.co.kr/sub_read.html?uid=5627 [본문으로]
  2.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조선장로교사기(상),(서울: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2000),145. [본문으로]
  3. 위의책, 100. [본문으로]
  4. 진도에 들어온 파는 김충유(金冲裕)를 기일세(起一世)로 하는 두계공파(杜溪公派)와 김선(金善)을 파조로 하는 백천파(白川派)의 두 집안이 있다. 두계공파 5세 김익문(金益文)이 장흥 장동면에서 1583년(선조 16) 임회면 상만리에 들어오고 같은 집안 6세 김소(金昭)의 생년이 1516년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면 상만리 입촌과 거의 같은 시기로 보인다. 체신부장관을 역임한 김병삼(金炳三)[1922~1988]은 김익문의 12세 손이다. 백천파는 군내면 분토리로 들어온 김상혁(金常赫)[김알지 50세손]으로, 그 선조들은 해남 문내면에 살았다. 화가 김옥진(金玉振)과 문학평론가 김현(金鉉)이 입도조의 11세손들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경주김씨 [慶州金氏]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16.07.09 검색)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629665&cid=51952&categoryId=55350 [본문으로]
  5. ‘Poonto,” The Korea Mission field, August, 1905, pp.104. [본문으로]
  6. "Annual Reports of presbytrian church U.S In Korea Missionary," 1905.May,15. [본문으로]
  7. 위의책,177. [본문으로]
  8. 전남진도군군내면분토리교회 당회록,2. [본문으로]
  9.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조선예수교장로회사지(하)(서울: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2002)p,31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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