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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든지 죽든지 (신학)/교회사

1980년대의 기억들 1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18. 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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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81년 6월 18일에 태어났다. 1981년은 야간통행금지[각주:1]로 인해 일상의 자유를 박탈당했던 시기였다. 어머니는 내 생일만 다가오시면 당시 야간통행금지로 인해서 고생했던 지난날을 회고하시곤 하셨다. 산달이 차서 출산의 시기가 다가왔고 임박하자 새벽 야간통행금지로 인해 당황했던 아버니와 어머니는 마침 지나가던 두부공장차를 타고 경찰들의 호위를 받으며 지금의 서울 적십자병원으로 갔고 그곳이 내가 처음 빛을 본 곳이 되었다. 

야간통행금지는1982년 1월 5일부터 일부 지역을 제외한 전국에서 폐지[각주:2]되었고 1988년엔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전국적으로 폐지되었다. 이미 밝힌대로 당시 야간통행금지는 경범죄 처벌법에 근거한 것이었으나 당시 일상의 자유를 박탈 당했던 시기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 

1980년은 1979년 10월26일 박정희전대통령의 서거로 긴 독재와 유신정권이 막을 내린 시기였으며, 곧바로 12월12일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박희도, 장세동등 신군부에 의해서 쿠데타가 성공하면서 민주주의를 향한 바람마저 잔뜩먹구름이 낀것같은 시기였다.  게다가 전두환은 5월18일 광주에 계엄령을 내려  27일까지 6,000명의 병력을 투입하여 229명의 사망자 실종자와 3천여명의 부상자를 남긴채 무력 진압을 하였다. 이로써 광주의 학살자, 전두환은 1980년 8월 27일 11대 대통령이 되었다.

1980년은 오랜 유신정권의 종결로 인한 희망의 계절임과 동시에 권력가들의 권력쟁탈을 위해 많은 희생자들이 희생을 당해야 했던 울분과 당황스러운 분노의 계절이기도 했다. 두 감정이 교차되어 여기저기서 나라걱정에 혀차는 소리가 들리던 시기였다. 

나는 이런 시기에 태어났다. 야간통행금지의 마지막 시절, 민주화운동의 메케한 최루탄 냄새를 맡으며 자랐으며, 컬러TV가 보금되어 가정마다 TV가 있던 시절이었다. 말하자면 억압의 시대요 불의가 난무하는 시대였지만, 한편 컬러TV가 보급되면서 내재된 곳엔 자유와 문화가 꿈틀되는 시기라고 할수 있겠다. 서현진은 「끝없는 혁명」이라는 책에서 "컬러TV가 선도한 컬러화 선풍은 모든 분야에서 소비패턴의 고급화와 다양화로 이어졌다."[각주:3]고 평가하고있다. 그래서 컬러화 열풍을 몸으로 느끼면서 자란 80년대 생들을 X세대 또는 Y세대 라고 한다. 

중앙일보의 기획취재 기사에서  "X세대는 패션이 튀고, 대중문화에 열광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세대로 규정됐으나 이는 전체의 10% 안팎에 불과한 극소수의 특징을 강조한 측면이 강했다. 지금의 Y세대는 과반수가 컴퓨터를 보유 (53%) 하고 있으며 서구식 사고.생활방식에 거부감이 없고 (54%) , 쇼핑이 즐겁다 (57%) 는 최초의 유일한 세대다." [각주:4] 

다시말하면 X와 Y 세대는 문화에 민감하고 튀는 패션감각을 지니고 있으며 서구생활방식에 거부방식이 없는 세대들이다. 우리세대는 그랬다. 1980년대에 후반 들어서면서 사춘기를 맞이한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브랜드 있는 옷 소위 메이커있는 옷을 입는 것이 부의 상징처럼 여겼다. 비싼 메이커의 옷을 입고 좋은 브랜드의 신발과 가방을 착용하고 다니는 것이 소원이었던 시절이었다. 내면의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보다는 외모와 소유에 대한 관심이 가장 많았던 시기였다. 한국의 경제와 부모들의 가정 경제가 조금씩 안정을 찾기시작하였고, 정치적으로도 국민의 손으로 대통령을 뽑을수 있는 민주화의 바람이 실현되는 시기였다. 게다가 교회마다 부흥회와 교회 성장운동이 시작되면서 또 다른 전환기를 맞이하는 시기가 1980년대 였다. 

인간 개인의 외모와 소유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던 시기 그리고 나라와 경제는 번영이라는 이름아래 자본주의의 경제체제가 확립되는 시기 부흥과 성장이라는 이름 하에 교회의 건물들이 이곳저곳에서 세워지던 시기가 내가 자랐던 시대의 분위기였다. 이렇게 컬러TV의 보급은 여러부분에서 우리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민주화로 인해 민중운동이라든지 민중신학은 사실상 종결된 시기였으나, 인간사회가 번영과 성공 그리고 부흥의 시기를 거치면서 진정한 인간됨에 대한 목마름의 갈증은 증대되었다. 1980년대 후반에 당시 방영된 만화를 봐도 알수있다. ' 아기공룡 둘리'라든지 '달려라 하니' 는 둘다 엄마를 잃은 어린 존재들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어쩌면 둘리와 하니가 당시 인기를 모은것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너무 잘 보여주는 것 때문이 아닐까? 엄마를 잃은 삶, 사회는 점점 발전하고 삶의 질은 높아졌지만 여전히 인생역경을 극복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사회 구석구석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되찾아야할 진정한 인간성, 상실된 인간됨의 본질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중운동과 민중신학이 제도와 외면적 운동에서 내면운동으로 바뀌는 시점도 이때가 아닌가 싶다. 내가 살던 1980년대는 그랬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하월곡동은 월곡(月谷)이라는 이름에 맡게 '달의 계곡' 즉 달아래에 있는 '달동네'로 불리워지던 곳이었다.  친구들에 의해서는 달동네보다는 '산동네' 라는 이름으로 더 불리워지기도 했으며 내가 뛰어놀던 뒷산은 장위동 쪽에 돌산인 '빡빡산'이 었다. 이곳에서 친구들과 저녁늦게까지 딱지치기며 팽이치기, 술래잡기, 오징어, 다방구 등등 다양한 놀이들이 계절에 맞게 선택하여 놀기도했다. 동네 작은 구멍가게에서 했던 50원짜리 오락기계도 생각난다. 

하월곡 달동네는 한 가구에 3가정이 살았다. 우리집은 집주인의 집의 옆에 부엌이 딸린 작은 방 한칸으로 된 월세를 살았고 화장실은 3가구가 함께 쓰는 '제래식 화장실'이었다. 재래식 화장실에서 심심치 않게 아기가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가 들리기도했다. 우리집의 부엌은 연탄을 떼는 부엌이었다. 부엌에서 연탄을 통해 달랑 한 칸인 방은 따뜻해 졌다. 그러나 워낙 우풍이 센 곳이라.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새벽에 추워서 일어나 보면 어항 물이 얼어있고 아래에 금붕어 헤엄을 치고 있었다는 웃지못할 말씀도 해주셨다. 가만히 누워있으면 천장은 쥐가 무리를 지어 다녀 요란한 소리가 나기도했고 '찍찍' 소리가 나기도 했다. 

  

 

  1. 통행금지제도는 한국전쟁 이후 전국으로 확대되어 계속되다가, 1954년 4월 1일 「경범죄처벌법」에 “전시·천재지변 기타 사회에 위험이 발생할 우려가 있는 때 내무부장관이 정하는 야간통행 제한에 위반한 자”라고 규정되어 야간통행금지 위반자가 구류 또는 과료에 처하게 되면서부터 법령에 의해 제도화되었다. <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 [본문으로]
  2. [책갈피 속의 오늘]1981년 국회 ‘야간통금 해제’ 건의, 《동아일보》, 2008.11.19. [본문으로]
  3. 서현진, 끝없는 혁명,295-6. [본문으로]
  4. [출처: 중앙일보1998.11.12, 'Y세대' 떠오른다] [기획취재]'Y세대' 떠오른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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