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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을 따라 (교회와 공동체)

코로나19가 한국사회에 준 영향 3, 새로운 일상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20. 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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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코로나19로 인한 새로운 일상

코로나19는 새로운 일상으로 연결시켰다. 인간 역사 이래 새로운 일상은 전쟁과 질병으로 인한 혹독한 시간을 보낸 후에 일어났다. 스페인 독감에 이어 다시 한번 찾아온 팬데믹인 코로나19는 우리의 일상에 많은 변화를 촉발시켰다.
최악의 주가 폭락과 경제난을 야기시켰다. 전문가들은 이 전염병을 막을 백신이 나오기 까지 최소 2년 정도 걸릴것으로 내다보았다. 그때까지 회복의 여부 조차 불투명하고, 일상적인 생활을 중단내지는 거리를 유지해야한다.
인간은 상황에 적응하는 존재다. 장기간 일상의 변화는 살길을 모색하게 만든다. 그것도 안되면 적응한다.

그것이 인간 사회다. 이미 사회적으로 기업은 화상 회의 시스템을 도입하여 재택근무까지 가능하게 되었다. 정치는 민생의 안정을 위한 방법을 강구중이다. 영화산업은 영화관에서 개봉을 넘어 넷플릭스와 같은 스트리밍 서비스로 방향을 지었다. 변화다. 새로운 일상으로의 변화. 한국 정부는 자발적 격리에서 생활 방역으로 옮겨야 한다고 발표하였고, 코로나19 이후 새로운 일상을 받아 들여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새로운 일상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쩔수 없다.
문제는 코로나19가 종식된다 할지라도 더 강력하고 변이된 바이러스가 계속 출연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코로나와 함께 살아가야할 일상에 대비해야한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일상의 시작이다. 

사실 굉장히 낯설기만 하다. 새로움 이라는 단어가 주는 고정된 이미지는 낯섦일 것이다. 낯선이가 다가오면 우리는 움추러 든다. 경계심을 갖추기도 한다. 그러나 때때로 낯섦은 우리에게 모험을 경험하게 하고, 변화와 성숙을 허락한다. 낯섦 그리고 새로움이 우리에게 주는 귀한 경험일것이다. 새로운 일상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까? 어떤 모험을 허락할까? 다시말해서 코로나19와 바이러스의 위험성은 변화된 우리의 삶을 한층 업그레이드 시킬것인가? 우리의 삶의 질이 더 좋아질 것인가? 낯설고 전혀 새로운 일상이 가져다 줄 열매가 궁금하다. 위기와 위험성의 장기화는 어떤 영역에는 커다란 위기를 어떤 영역에는 기회를 가져다 줄 것이다.  

하늘에서 내리는 첫눈과 벚꽃이 어떤 이들에게는 낭만과 인생의 아름다움을 가져다주겠지만, 어떤 이들에겐 마당을 더럽힐 쓰레기로 여기게 될것처럼 말이다. 코로나19와 바이러스의 위협은 어떤 이들에겐 그저 위험 그자체 이겠지만, 어떤떤이들에겐 또다른 기회가 될 것이다. 이미 '뉴 노멀' 이라는 이름으로 변화는 시작되었다.     

 

 

1) 새로운 일상과 개인주의.

개인 위생의 중요성은 더욱 강조된다. 코로나19 시대에 마스크 착용은 의무다. 손소독은 상식이 되었다.
이는 개인의 생존과 더불어 다른이들에 대한 피해를 끼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하다.

얼마전 동네 대형마트에 갔다. 마스크는 기본이고 일회용 위생장갑으로 간단하게 개인위생 무장(武裝)을 하고 온 분들도 보였다. 어떤 어르신은 투명 가림막을 착용하여 어떤 바이러스의 침투도 하지 못하도록 중 무장하였다. 
성급하게 무장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싶지만, 무장이란 말그대로 전쟁시 적으로부터 타격과 손실을 막고자 준비를 하는 것이다. 불쾌하겠지만, 이러한 무장은 다른이들이 잠재적 바이러스 숙주임을 인식하는데서 비롯된다.
이렇게 개인위생은 생존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생존은 그 주체가 내 자신이다.

생존은 다른이들이 나를 위해 살아주는 것 아니다. 철저히 개인중심이다. 이것이 심화되거나 전쟁으로 연결이 될 경우 자신의 생존을 위해 궁리를 해야함과 동시에 다른이들은 철저히 적이 된다. 외부의 세계를 위험천만한 세상이 된다. 
어느시대나 생존에 대한 위협은 개인의 발견으로 이어졌다.  코로나19가 우리에게 가져다준 것도 마찬가지다. 
살기위해서는 개인방역과 동시에 다른이들에게 피해를 끼치거나 영향을 받으면 안된다. 
 
코로나19는 개인방역과 위생이 중요한 이슈로 인식되었고 이는 개인의 재발견으로 이어졌다. 
철학에서 개인의 발견은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 일반적으로 근대철학의 시작을 르네 데카르트라고 본다.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개인의 발견은 사유에서 시작한다. 데카르트는 이를 '의심' 이라고 말한다.  의심은 곧 존재에 대한 사유이다. 이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라는 유명한 명제의 시작이기도 하다. 아래는 그의 책 방법서설의 중요한 부분이다.

 '나는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전적으로 거짓된 것으로 간주하여 던져 버리고, 이렇게 한 후에도 전혀 의심할 수 없는 것이 내 신념 속에 남아 있는지를 살펴보아야한다고 생각했다 (중략) 그러나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나는 반드시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이 진리는 아주 확고하고 확실한 것이고, 이것을 내가 찾고 있던 철학의 제일원리로 거리낌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Rene Descartes, "DISCOURSE ON THE METHOD," 이현복역,「방법서설- 정신지도를 위한 규칙들」 (문예출판사,1997)p185.


의심 곧 사유는 생각하는 주체가 인간이며 내 자신임을 확신하는 길이다. 이후로 본격적으로 근대주의가 시작한다. 근대주의는 생각하는 주체의 발견이며 생각하는 존재로서 개인의 발견이라고 할수 있다.
근대주의 이후에 사유의 주체가 된 인간은 인본주의 문화를 세웠다. 인간은 종교와 철학 그리고 예술분야에서 탁월한 존재가 되었다.  

신학분야에서 개인의 발견은 복음의 재발견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하나님의 의를 복음과 연결시켰다. 이를' 복음의 재발견'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의는 곧 죄인에게는 진노 그자체이다. 그런데 로마서 1:16~17을 통해 하나님의 의는 인간 존재를 살리는 의요. 구원을 주시는 의로 연결된다. 곧 복음 그자체이다. 복음은 율법적인간의 해방을 의미한다. 죄에 눌린이들의 자유를 의미한다. 복음은 인간에게 자유와 해방을 준다.  루터의 복음의 재발견은 독일 관념론과 근대주의의 단초라고 할수 있다. 


경건주의와 청교도의 시기에는 회심을 중요게 인식했다. 회심은 곧 존재의 발견과 연결된다. 하나님앞에서 인간은 죄인이다. 그러므로 회개는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로 돌아가는 길이요. 인간 본질 그 자체로 돌아가는 회복의 시간이다. 부흥주의는 존재의 발견이다. 교회사적으로 부흥주의의 존재의 발견은 언약신학으로 발전이 되는데, 시민사회가 건설되고 민주주의의 확립으로 이어지고 수많은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생존에 대한 진지한 인식이 복음의 재발견과 구원받은 존재로서 근대적 인간으로 점철 된다.     

한국에서는 평양 영적대각성운동시기에 회개운동이 일어났다. 회개운동은 개인의 발견으로 이어졌다. 
각지로 퍼져나간 전도운동, 부흥사경회는 회개운동과 연결되었고 조선인으로서 정체성,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회복이 일어났다. 여성운동으로 이어졌다. 결국 교회와 성도들을 중심으로 일제에 항거하는 3.1운동 그리고 여러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유신독재시대에 재야의 신학자들로 구성된 민중신학 역시 근대적인간의 발견이 큰 역할을 했다. 계몽된 인간, 진정한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로 회복이다. 함석헌 선생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모토로 근대적 인간론을 설파했다. 이들에게 구원은 억압받는 민중의 해방이다. 이 해방은 무엇일까? 생각하는 존재 즉 근대적 인간으로 회복을 말한다. 말그대로 계몽 즉 깨어나는 것이다.  
개인의 발견은 한 개인이 주체성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사고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사고의 주체 인식의 주체가 된 인간은 곧 문화와 예술의 발달로 나아갔다. 인간 이성의 수혜와 혜택은 과학과 기술의 발전분야 이다. 그러니 점점 근대주의는 인간 이성의 찬란함을 높이고 찬양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인간이성이 완전하게 꺾이는 사건이 바로 자연의 대재앙, 이해할수 없는 고난 그리고 전쟁이었다. 이것들은 근대성과 생존이 접목되면서 극심한 개인주의화를 낳게 되었다. 곧 생존과 연결되어 극심한 개인주의화 되었다.
코로나19가 우리네 일상에 가져다준 가장큰 도전은 극심한 개인주의이다. 어쩌면 생존과 연결된 개인주의가 우리가 살아가야할 새로운 일상이라면, 이것을 어떻게 극복하고 발전시켜야 할지가 주요 과제가 된다.

 

 

 

2) 개인주의와 공동체.

코로나19 시대에 개인 방역, 개인위생은 개인의 발견의 중요한 시작이다. 왜냐하면 개인위생은 곧 생존과 연결 짓기 때문이다. 마스크 착용과 손소독, 타인과 일정거리 유지는 그 주체가 내 자신이다. 우리는 지난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탈 근대주의의 시대를 살아왔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성의 해체다. 개인을 넘어 공동체로 주체의 전환이다. 근대가 개인의 발견이었다면 탈근대주의는 공동체의 발견이라고 볼수있다.  
개인의 재발견은 곧 공동체로 연결이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곧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회적 활동은 곧 문화를 낳았다. 그리고 문화는 공동체 아래에서 향유된다. 문화가 빛을 발하는 것은 그 공동체가 가진 가치 때문이다. 공동체는 무엇일까? 무엇인가를 향한 공동 관심사로 모인 집단이다. 그것이 강하게 밀집되고 언어로 문화로 틀이 고착되면 민족이된다. 그리고 종교 집단이 된다. 코로나19가 준 가장큰 영향은 종교집단일 것이다. 


코로나19는 탈근대주의의 주체였던 공동체가 다시 개인으로 돌아가는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의 위생은 철저히 개인의 선택이기도 하지만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책임과 결단은 자기의 세계가 확립된 존재가 하는 행위다. 그러나 지나치게 생존과 연결된 개인주의는 근대주의의 변형을 낳게 된다. 
특별히 서구는 이러한 근대주의의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이것은 그들의 자부심이었다. 그러나 생존과 연결된 그들의 근대주의는 변형을 낳았다. 소위 생존앞에서 민낯이 드러났다.  생각하는 주체요 계몽된 인간이 아니라 생존하는 주체요 살기위한 인간으로 바뀌었다. 노인들과 질병에 걸린이들을 잉여인간 내지는 불필요한 존재로 전락하여 버리고 도망갔다. 더욱이 황태자도 길거리의 노숙인도 모두 코로나19의 감염의 대상이라는 것은 모든 인간들은 바이러스 앞에서 평등한 존재라는 것도 인식했다. 정부와 국가의 중요한 정책은 보건과 복지가 되었다. 이전에는 안보와 경제가 주요 핵심 정책이었다면 개인을 안전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국가 공동체의 중요한 존재의 이유가 된것이다. 
코로나19가 펜데믹으로 인식되면서 사회적이면서 물리적 거리두기 운동을 하였다. 사실 한 존재를 만나고 받아들이는 일련의 과정은 가까이있을때 가능하다. 가까이에서 자세히 보아야 예쁜줄 아는 법이다. 사회적이면서 물리적 거리두기는 그것을 어렵게 하였다. 마스크로 소통하기는 여간 쉽지않았다. 이미 앞서 밝혔지만 공동체가 개인의 안위와 경제를 책임져주지 않으면서 각자 살기위한 방식을 모색해야하는 공동체가 되면 그 공동체를 각자도생의 공동체라고 부른다. 

최근에 근대문명의 빛나는 업적을 이루었던 서구와 강대국들은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사회안에 민낯을 드러냈다. 사회적으로 불필요하다고 여기는 존재들을 과감하게 내팽개쳤다. 비인간화 즉 무가치한 인간존재들을 사물로 인식하는 데서 생긴 모습이다. 대형마트마다 사재기가 성횡하였다. 사회적 물리적 거리두기 운동 마스크소통은 인간성을 물론이고 사회성마저 흔들렸다. 금번 일로 인해 한국사회의 도덕성은 빛을 발했다. 서구문명은 동양문명의 진보를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선교의 시대도 이미 제3세계와 동양의 선교는 세계의 선교를 앞질렀다. 
이번 계기가 동양의 가치를 알리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유교적 질서의 문화, 개인보다 공동체 중심 문화가 빛을 발했다. 자가격리등의 자발적 조치에 잘 응하였고, 개인 방역에 협조를 잘했다. 음과 양의 조화, 선과 악의 공존 등 조화, 공존, 더불어 함께 라는 중요한 동양적 가치가 선한 성과를 낸것이다. 

새로운 일상은 다름아니라 개인과 공동체의 조화이다.  우리는 너무 개인 없이 살았다. 최근의 N번방 사건이라든지, 90년대생들 중심으로 꼰대문화, 갑질문화 라든지, 조직문화 탈피를 위한 시도들은 개인의 발견으로 이어졌다.  개인은 공동체라는 거대조직속에 감추어졌다. 최근에 개인의 가치발견은 사회내 약자나 여성, 소외계층들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타인을 배려하는 성숙한 시민문화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코로나19가 그것을 보여준 셈이다. 
하지만 우리는 공동체라는 가치를 등한시 여겨서는 안된다. 공동체안에서 개인, 개인이라는 공간안에서 공동체를 생각해야한다. 개인의 가치와 공동체의 가치를 더불어 함께 생각해야한다.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3) 새로운 일상과 종교(기독교)

더나아가 종교부분에서도 예상된다. 코로나19가 가져다준 새로운 일상중에 종교를 빠뜨릴수 없다. 우리가 생존에 대한 고민이 지속되는 한 그리고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한 종교는 사라지지 않는다. 코로나19가 우리의 일상을 바꾸었다면 당연히 종교의 모습도 변화될 것이다.

새로운 일상이 종교에 주는 영향과 변화는 무엇을까? 종교의 영역에서는 한 가지 근본적인 질문으로 시작하려 한다.
왜 우리에게 코로나와 같은 질병과 전염병을 주셨는가? 이다. 구약에서 전염병은 기근과 가뭄과 더불어 하나님의 진노의 상징이었다. 그러므로 전염병이 돌면 선지자들은 어김없이 하나님앞에서 돌아오고 회개를 선포하였다. 역시 한국교회의 강단에서도 코로나19로 인해 하나님앞에서의 회개를 부르짖었다. 코로나19와 회개는 어떤 연결점이 있을까? 


이는 1755년에 일어난 리스본의 대지진 사건과 연결시켜볼수 있다.  당시 지진으로 인해 많은 사상자가 생겼다. 건물을 초토화 되었다. 리스본은 정통적인 기독교 도시였다. 게다가 큰 지진은 만성절 미사를 준비하는 아침에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당시 사제들은 의문을 품지않을수 없었다.
괴테와 같은 이들은 자비로운 신에 대한 회의에 빠지기도 했고 영국의 복음주의자인 웨슬리는 이를 하나님의 진노라고 생각하였다. 리스본의 말라그리다 와 같은 유명한 사제들 역시 지진을 신의 분노와 연결지었다.
하지만 당대 철학자들은 재난과 관련하여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이때 두각을 나타냈던 이들이 볼테르와 루소였다.
이들은 리스본지진을 통해 아주 날카로운 지적 대결로 토론과 논쟁을 하였다.
역사는 리스본 대지진은 근대주의 형성에 기초하였다고 평가한다. 그만큼 중요한 사건이었다.

일단 당시 풍미하던 신학과 철학의 중요한 사조는 인간 문명의 낙관주의였다. 라이프니츠는 '신정론'을 통해 선이든 악이든 모든 것은 최선의 조화와 행복으로 구성된 세계를 위한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므로 라이프니츠에게 재앙은 선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반면에 알렉산더 포프와 같은 문학가들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옳다고 여겼다. 그들은 재앙과 악은 보편적인 선이라는 것을 노래하였다. 이러한 낙관주의적 철학과 문학사조는 볼테르와 루소 같은 이들에게 불편함을 안겨주었다. 

최근 볼테르의 「깡디드」 라는 책을 보았다.  깡디드는 리스본 대지진 사건 이후 쓰여진 소설이다. 이 소설은 말그대로 꽁트다. 찬란한 인간 문화가 자연의 대 재앙앞에서 아무것도 아님을 철저하게 깨닫게 한다. 동시에 대 재앙은 하나님의 진노라고 보았던 종교적 인식을 아주 객관적이고 냉철한 입장에서 다루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인 깡디드는 철학 선생인 팡글로스라는 인물을 최고의 학자로 여긴다. 소설속 팡글로스는 낙관주의자들을 대변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그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선하다고 여긴다. 말하자면 만사형통을 표방한다.  
볼테르는 팡글로스를 통해 마치 당시 철학사조를 비꼬는 듯하다. 철학자 팡글로스는 말그대로 라이프니츠와 같은 낙관주의자들이다. 이성을 찬양하고 모든 존재하는 것 심지어 악이나 재앙까지도 하나님의 섭리의 한부분이라고 강조하는 이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조소한다.
깡디드를 통해 알게 되는 볼테르는 신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인간세계의 신의 개입은 거부하는 듯하다. 일종의 18세기 초에 영국에 등장하는 이신론(理神論, deism)과 일맥상통한다. 더나가아 계몽주의를 낳는다. 
반면에 루소는 인간의 타락과 악을 하나님과 관련짓는 것을 거절한다. 인간들의 타락과 죄로 인해 생긴 것이기에 재앙과 악의 결과는 인간들의 책임이다 라고 보는 것이다. 그는 철저히 재앙의 이유를 하나님과 분리시켰다.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에 기초한다. 날렵하게 분석하여 면도칼처럼 잘라버린다.   

근번 코로나19 사태를 통해서 한국교회의 강단은 세 분류로 나뉘었다.
먼저 코로나19를 전적으로 하나님의 진노와 연결시켜 회개만이 살길이라고 외친 부류이다. 보수적인 신학의 입장을 지닌 이들이라고 볼수있다. 둘째로 코로나19를 하나님의 진노와 연결시킨 이들에게 반론을 제기함으로서 이시대는 오히려 진노와 회개가 아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야 함을 역설하는 부류이다. 대체로 온건한 입장을 지닌 이들이다. 
마지막으로는 전염병과 재앙은 하나님과 관련이 없는 것이라고 분류하는 이들이다.  다시말해서 인간의 욕심과 타락에 의한 것이니 인간들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인본주의적이며 계몽주의적 입장이라고 볼수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보수적인 입장에서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분명 성경에서 기근과 전염병 등은 하나님의 진노의 상징이었다. 하나님의 백성은 회개하고 돌이켜야 했다. 하지만 과학과 합리성에 기초한 결론은 재앙과 전염병은 하나님의 섭리나 진노가 아니라 생활 습관과 인간의 탐욕으로 생겨난 것이다. 중국 우한시에서 발생한 코로나 바이러스는 그자체로 인간의 탐욕과 식습관의 잘못으로 생겨난 것이다. 게다가 신천지라고 하는 잘못된 이단 종파가 숙주가 되어 퍼트린 말하자면 인간들의 잘못된 행동으로 생겨난 재앙이다. 그러니 오늘날 세대는 코로나와 하나님의 존재와 아무관련이 없는 것으로 매듭을 지어버리게 되었다. 하지만 꼭 그렇게 봐야할까... 
이 재앙이 하나님의 진노나 뜻과는 관련이 없는 것이라고 단정할수 있을까? 적어도 그리스도인은 인간의 탐욕과 잘못된 습관으로 생겨난 하나님의 진노를 묵상할 필요는 있다. 깊이 있는 회개와 되돌아봄이 있어야 한다. 

어쨰든 이에 맞추어 교회는 더이상 대재앙 앞에서 하나님의 진노나 회개보다는 사랑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사랑이 모든 것을 이기기 때문이다. 필자는 코로나19가 종교 특히 기독교에게 특별한 메세지를 주고 있고 변곡점을 가져다 주었다고 생각한다. 대 재앙 앞에서 이제는 하나님의 섭리와 진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말해야하는 시점에 다달았다고 말이다. 사회적책임을 실천하는 것도 사랑의 표현이며, 교회가 지역사회와 이웃을 위해 과감하게 나눔을 실천하는 것도 사랑의 표현이다. 코로나19 앞에서 기독교는 하나님의 진노가 아닌 사랑을 회개의 선포가 아닌 섬김을 실현할 과제를 가졌다. 염려가 되는 것은 사랑이라는 과제가 결국 윤리적 종교를 도덕적 종교를 낳게 될것이다. 
윤리적이며 도덕적 종교의 마침은 율법을 낳는다. 윤리적이며 도덕적 종교에는 반드시 올바른 종말론이 함께 가야하고 복음이 함께 가야한다. 날마다 교회는 이 세상을 어떻게 볼것인가?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것이다. 

어째든 코로나19가 인간의 낙관론과 신앙생활에 치명타를 입힌것은 사실이다. 하나님의 신비와 우리의 일상의 신적 개입은 무가치한 것이 되어버릴수 있다. 말그대로 '새로운 이신론'이 등장할수도 있다.
과학과 합리의 시대가 청년들의 교회 떠남 현상으로 이어지게 될것이다. 교회는 반지성주의의 현장이 될수도 있다. 
과학과 합리가 주도하는 세상에 교회는 신 존재에 대한 철저한 변증을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앞으로 교회됨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해야한다. 신천지와 한국교회는 무엇이 다른가? 사이버 공간과 인터넷 예배안에서 교회란 무엇인가? 대답해야할 것이다. 말하자면 새로운 교회론이 대두될 것이다. 교회는 신앙생활을 영위하도록 돕는 곳이며 하나님나라의 모델이다. 더욱이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일상이다. 새로운 교회론의 대두는 우리를 새로운 일상으로 초대할 것이다. 앞으로 해야할 것이 많다.  
 
5) 새로운 일상과 우리의 과제

이제 포스트모더니즘이 건축과 예술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처럼, 코로나19의 개인의 발견은 건축과 예술 분야에 영향을 줄것으로 기대된다.  건축분야는 이미 개인의 방역과 위생을 중점으로 실내가 디자인될 것이다. 실용과 가치를 바탕으로 건축된 건물들은 이제 위생과 방역을 고민하게 될것이다. 중세 교회의 건축물은 천장을 높였다. 그리고 돔을 얹었다. 그곳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상징과 같은 장소가 되었다. 적어도 한국의 건축물들은 최근 미세먼지의 공격에 대응하여 공기청정기술들을 도입하여 실내의 공기들을 정화 하였다. 외부의 바이러스와 물질로부터 보호하는 건축술은 기본이라 할지라도 실내로 들어가기를 주저하는 이들로 하여금 안정감을 주도록 하는 것들이 필요할 것이다.   

종교분야는 개인주의화를 어떻게 공동체와 연결시킬수 있을지, 죽음앞에서 인간이 억눌린이들을 어떻게 자유하게할수 있을지, 그리고 생존과 연결된 변형된 개인주의를 어떻게 참된 인간화로 나아갈수 있을지 고민이 되어야 할것이다. 예배 장소와 관련된 부분을 고심해야 할것이다. 이전처럼 집회와 같이 한 공간에 빽빽하게 앉은 모습을 탈피해야한다. 한정된 공간안에 개인의 위생과 방역을 고려한 공간 배치를 해야할 것이다. 

특별히 필자는 셀교회(Cell Church)가 다시 대두되어 질 것으로 보인다. 바른 셀교회는 코로나19사태로부터 타격을 덜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셀교회는 작은 소그룹이 교회의 역할을 한다. 체계적인 리더교육을 이수한 평신도 셀리더들은 셀원들을 가족으로 여기며 목숨을 걸고 목양을 한다. 단단하게 결속된 소그룹의 리더는 자발적으로 화상 셀모임이라든지 여러가지 모임 방안들을 고민한다. 평신도들이 셀리더로 목양하는 셀교회, 내부에 나타난 신학적 문제같은 것들은 보완되어야 할것이다. 점차 교역자들의 영량을 높여야하며 목회는 보다 전문적 위치에 이를 것이라 여겨진다. 전에 필자의 교회 담임목사의 설교처럼 설교 경쟁의 시대가 올것이다. 목회의 전문성은 목양과 설교일것이기 때문이다. 작지만 결속력있는 예배 공동체가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될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인터넷 예배라든지 흩어지는 예배에 있어서 셀 교회가 큰 장점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온라인 예배의 중요성을 알고 이미 준비한 교회는 큰 장점이 되었을 것이다. 신학적으로는 성찬식 문제라든지,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의 존재에 대한 진지한 재고찰이 있어야 할 것이다.  

예술분야는 인간성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이어질것이다. 보이지 않은 바이러스가 인간사회와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사유하게 될것이다. 이미 영화나 문학부분에서는 질병과 바이러스 그리고 좀비물들이 등장하고 있다. 문학에서는 사회적 거리유지와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들을 풀어놓은 책들이 등장하였다. 또한 코로나19 확진자들중에 사망한 이들의 경우 제대로 된 장례를 치루지 못하고 화장() 하였다. 장례는 인간됨의 본질이자 이생에서의 마지막이다. 유가족들에겐 극심한 슬픔과 허무함이 찾아오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장례의 시간을 잘 보내야 한다. 코로나19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영향은 인간됨이란 무엇인가이다. 장례의 슬픔조차 느끼지 못하도록 떠나보내고 정리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정치분야에서는 지난 1945년 해방이래 좌우간의 이념 대립이 극심했다. 1950년 한국전쟁은 좌우간의 갈라진 이념 전쟁이 증폭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7~80년동안 한국의 정치도는 좌우간의 대립, 지역간의 분열로 뚜렸했다. 이번 4.15 총선은 조금달랐다. 물론 좌우간의 이념 대립의 현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젊은 세대들은 이념간의 대립의 문제보다는 정의의 문제, 복지의 문제가 선거의 주요 판도를 갈랐다. 코로나19로 인해 정치는 점차 좌우의 이념간의 대립 또는 반공주의와 같은 문제에서 정의의 문제, 복지와 인권의 문제로 변화될 것이다.

"봄비 내린 일요일(19일) 저녁 총선에서 참패한 미래통합당의 30대 정치인 4명을 만났다. 이들은 “흑백논리로 세상을 보는 것은 극좌·극우 모두 똑같다”며 “‘대깨문’처럼 통합당도 아스팔트 보수와 유튜버에게 휘둘려 대중적 공감능력을 잃어버렸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이념과잉과 진영논리에 빠진 문박근혜 시대를 넘어 실용으로 가야 한다”며 “세상의 변화를 못 읽고 인물·철학을 바꾸지 않으면 조만간 폐기될 것”이라고 했다." (https://news.joins.com/article/23758874 중앙일보, 2020.04.21 검색 “캐머런 39세 보수당 대표, 우린 젊은 보수 기회 안줘”) 

이제 막 정치에 입문한 청년 정치가들은 이념과 진영논리보다는 실용을 추구하며 정의의 문제나 복지의 문제가 주요 정치의 현안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이 코로나19가 가져다 준 새로운 일상이며 과제들 이다. 물론 이미 우리안에 인식되어 온것들이다. 하지만 코로나19와 함께 살아가야할 현실속에서 이 과제들은 좀더 깊은 고민을 던져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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