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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든지 죽든지 (신학)/교회사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에 관하여....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13.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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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에 등장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과 심리적 삼위일체.....

 

 

 

Ⅰ. 서론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삼위일체론을 우리에게 가르치면서 많은 유비들이 가능함을 보여주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조된 모든 피조물들에서 존재론적인 삼중구조를 발견하고 그 삼중구조가 어디로부터 오는지를 질문하며 명상과 묵상을 통해서 결국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로 이른다.

그는 어떻게 피조물들속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론적구조를 발견할수 있었을까? 그것은 피조세계에 반영된 하나님의 선하심의 묵상을 통해서 가능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고백록(De Confessione)』에서도 신을 '선을 지은분(the author of goodness)으로 말하며, 창조의 아름다움과 피조물의 아름다움을 묘사하고 있다.

 

"오주님, 정녕 당신께서 그것들을 만드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아름다운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는 선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선하기 때문입니다...."(고백록 11.4.6)

 

피조물이 지닌 아름다움을 통해 그것을 만드신 분이 아름다운 분임을 그는 발견한다. 그는 선을 지니고 있는 피조물들을 통해서 최고선이신 하나님을 증명해내려고 하고 있다. 삼위일체론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대부분 인간의 내면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과 관련되어 설명하는데 예를 들면, 우리의 기억 은 성부와 같고, 정신 속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과 같으며, 우리의 의지와 사랑은 성령의 모양을 뚜렷하게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를 그는 그의 『하나님의 도성 이렇게 밝히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창조주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들이다.… [창조주] 그 자신은 영원하며 진실하며 깊은 사랑은 받는 삼위일체이시며, 세 위격 사이에 혼동이나 분리가 없으시다. 그리고 그가 지으신 만물을 살펴볼 때에, 우리는 우리보다 낮은 것들에서 그의 흔적(vestigia)이라고 할만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혹윽 희미하고 혹은 분명하다. 만일 지극히 존귀하며 지극히 선하신 지혜로우신 분이 그것들을 지으시지 않았다면, 그것들은 존재할 수도 없었을 것이며 어떤 형태를 가질 수도 없을 것이며 자연질서 속의 어떤 위치를 구하거나 유지할 수도 없겠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 자신 안에서는 창조주의 형상(imago)을 보므로, 우리는 복음서에 있는 작은 아들과 같이(눅15:18- 18) 제정신을 차려서일어나 그에게로 돌아가자. 우리는 죄를 짓고 그를 떠났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도성 11.28)

 

이에 필자의 이 글의 의도는 삼위일체론에 등장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유비들 특히 인간성 뜩 인간의 내면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과 관련된 글들을 정리하고 해석을 함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심리적 삼위일체론이 무엇인지를 고찰함에 있다. 그래서 먼저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의 내용을 살펴 볼 것이며, 각 삼위일체를 설명하는데 사용한 일련의 긴 유비들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으며, 그 각각의 내용은 무엇인지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Ⅱ. 본론

 

1.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

 

그는 삼위일체 되신 한분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삼위가 구별되는 동시에 동일 본질을 공유함을 믿었다. 그는 이것을 설명하되 증명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의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존재하고 단순하며 분할 할 수 없고 모든 범주를 초월하신다는 신 관념에 배경을 두고 있다. 즉 그는 삼위일체론을 삼위일체를 증명해 보이려는 목적보다는 기존 삼위일체의 교리적 위치와 그 신앙을 배경으로 썼다.

 

"하나님은 스스로 변함없이 만물을 변하며 스스로 시간적으로 움직임이 없이 시간저긴 것들을 창조하시므로, 하나님의 본질을 생각하며 충분히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영혼이 형언할 수 없는 것을 형언할 수 없는 방법으로 볼수 있으려면 정화될필요가 있다. 우리는 아직 이 능력을 받지 못했으므로, 믿음으로 힘을 얻어 더 접근할 수 있는 길로 인도됨으로써 실제를 파악하는 능력과 기술을 얻으려 한다......"(『삼위일체론』 1.3)

 

"그러므로 우리는 주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그들이 요구하는 그일을 설명하도록 전력을 다하겠다. 즉 삼위일체는 유일 진정한 한분, 한분 하나님이시며, 성부 성자와 성령은 동일한 본질(Substantia 또는 Essentia)이시라고 말하며 믿으며 깨닫는 것이 바르다는 것을 설명하겠다....최고선이 있다는 것과 완전히 정화된 마음이라야 최고선을 알수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되리라고 기대한다. "(『삼위일체론』 1. 4)

 

그는 삼위일체에 관한 어려운 문제들을 풀어나감에 있어서 어떻게 세분이 한 하나님이시며 불가분적으로 역사하는 분들이 어떻게 일은 각각 따로 하시는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즉 성경안에 나타난 난제들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고 차근차근 그것을 해설해 나가는 형식으로 풀이해나가고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성부가 하나님이시며 성자가 하나님이시며 성령이 하나님이시라고 들으며, 이 삼위일체는 세신이 아니라 한신이라고 들을때에 이 믿음에 대해서 어려움을 느낀다. 특히 하나님이 역사 하실때에는 모든 일에서 삼위일체가 불가분적으로 역사하신다고 하는데, 성자의 음성이 아닌 성부의 음성이 말씀했다고 하며, 성자만이 육신으로 탄생하여 고난을 받으며 부활 승천하셨다고 하며, 성령만이 비둘기 모양으로 임하셨다고 하니 이일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느냐고 묻는다"(『삼위일체론』 1.8 )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안에서 신앙을 정의하는데에 곧 그것을 밝히고 있는 성경구절들, 그리고 특히 그것과 모순되어 보이는 구절들을 검증하는데 관심을 갖는다. 그는 성자의 하나님되심에 대해서 논증해 나가고 있는데 그는 성자는 성부와 동일 본질이시며 참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성부 뿐 아니라 삼위일체 모두가 불사(不死)하시며 만물이 성부 뿐아니라 성자에게도 오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동등하시며 참 하나님이심을 설명하고 있다. 요한복음을 통해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오셨으며 성자 예수그리스도 없이 만물이 지은바 되지 않았음을 논증하고 요한1서를 통해서 예수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며 영생이심을 밝히고 있다.(요일 5:20)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오직 그에게만 죽지아니함이 있다"는 말을 성부에 대해서만 쓴것이 아니라 유일한 한분 하나님 즉 삼위일체 신에 대해서 썼다는 논리적 결론이 생긴다. 자체가 영생인 것은 결코 변함이 없다. 따라서 성자는 영생이므로,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다"고 하는 말씀은 성부와 함께 성자도 의미한 것이다. 우리도 그의 영생에 참가하는자가 되어 우리자신의 제한된 범위 내에서 영생하게 되었다." (『삼위일체론』 1. 10 )

 

또한 그는 성령에 관하여 성령도 하나님 자신이시며 피조물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우리는 피조물이 아닌 조물주를 섬긴다는 롬 1:25의 구절을 인용하여 사도바울이 빌 3:3을 통해 하나님만 섬긴다는 표현이 하나님의 성령을 섬긴다는 표현으로 될 수 있음을 통해 섬김을 받으실 성령은 하나님이심을 논증해 가고 있다.

 

"그리스도의 지체인 그들이 성령의 전이라면(고전6:15) 성령은 피조물이 아니다 우리의 몸을 성전으로 바쳐야 하는 그 성령에게 우리가 드리는 섬김은 하나님께 드리는 섬김, 즉 헬라어로 라트레이아(latreia)라고 하는 것이라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는 끝으로 "그런즉 너희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한다(고전6:20)"(『삼위일체론』 1. 13 )

 

아우구스티누스는 지금 삼위일체의 위격들의 상호동등성을 세우려고 한다. 아들의 파송은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영원한 관계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존재가 인간의 눈에 보이도록 한다는 것이라고 말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들의 낳음(Begetting)이 복종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장한다. 아들은 '영원한 빛의 광채', 전능자로부터의 유출(manatio)이며, 따라서 스스로가 전능하다. 마찬가지로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온 성령은 그들과 똑같은 본질적인 본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근원에서 나오므로 더 크지 않으며, 그것은 희미한 빛이 아니라 광채이므로 더 작지 않으며, 따라서 동등하다."(『삼위일체론』 4. 27 )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이 보내신다. 말씀을 낳으신 분이 보내신다. 그리고 나신 분이 파견되신다. 각 개인이 지혜를 깨닫고 알때에 그 깨닫고 아는 범위 내에서 지혜가 각 개인에게 파견되신다.....그러나 낳으신 분과 나신분이 하나이신 것 같이, 파견하신 분과 파견되신 분이 하나이시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요 10:30) (『삼위일체론』 4. 28 )

 

즉 삼위일체의 위격들 사이의 관계는 정도나 순서의 관계가 아니라 인과성의 관계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는 일단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님 되심에 관하여 논증한 이후에 삼위일체는 '관계개념'을 철저히 고수한다. 이 관계개념을 통해서 삼위의 통일성을 주장할 수 있었고. 그는 성령과의 관계에서 성부와 성자는 연합된다고 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령이라는 이름이 성부와 성자에게 다 관련되어 어떤 부가형언의 교통 즉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를 이어주는 통로 때문에 붙여졌을 것이라고 보고 성령을 선물이라고 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본질이 동일하시므로 창조주하나님 곧 저능하신 삼위일체 신으로서 분리할수 없이 일체로서 역사하신다. 이것은 내가 절대로 확신하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점을 본질이 다른 피조물로 특히 물질적인 피조물로 분리할 수 없이 나타낼 수 없다.........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그 존재의 본질에서 세분이 같은 하나이시다. 거기에는 시간적 운동이나 시간, 공간의 간격없이 모든 피조물 위에 있다. 세분은 함께 영원으로영원까지 같은 하나이시며 이를 테면 영원 자체이시며 그 영원에는 진리와 사랑이 없지 않다...."(『삼위일체론』 4. 30 )

 

"동일한 삼위일체 안에서 각각의 위격들에 적당한 술부들은 그들의 상호 관계들 혹은 피조된 존재들에 대한 그들의 관계들을 언급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기 때문에 성령은 삼위일체 전체에 관하여 서술될 수 있다. 아버지와 아들은 둘다 '성령'이고 둘다 '거룩'하다... 그러나 삼위일체에서 고유한 이름으로서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성령이므로 아들과 아버지와 상대적이다.... 성령은 말하자면 아버지와 아들의 표현할 수 없는 교통이다.....그들 둘에게 적합한 이름은 그들이 서로 교제하는 것을 나타내며 이리하여 성령은 둘의 선물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이 삼위일체는 오직 선하고 위대하며 영원하고 전능한 즉 자기 자신의 단일성, 신성, 위대성, 선 영원성 전능성을 지닌 한분 하나님이시다." (『삼위일체론』 5. 12 )

 

아우구스티누스가 삼위일체의 관계의 개념을 고수하였다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적 개념을 통해서 아버지로부터 아들이 아들로부터 아버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이어주는 선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성령의 이중 발출설을 전했는데, 성령의 이중발출설이란,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온다고 하는 주장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가르침이 성경에 기초한 것으로 이해했다. 성령은 아버지의 영 인 동시에 아들의 영이시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요 15:26),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요 14:26)이라고 말씀하시며 성령이 아버지로부터 나온다고 가르쳤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다음 "성령을 받으라"(요 20:22)고 말씀하시며 성령이 아들로부터 나오신다고 알려주셨다. (삼위일체론 15.26.45)

 

2. 인간 안에 있는 삼위일체의 흔적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을 닮는다. 하지만 그것들은 참된 모양 즉 모양 자체가 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성부의 완전한 형상이며 완전한 모양이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 자체인 로고스에 참여하는 모든 피조물 안에 하나님에 대한 모방이 있음을 발견한다. 그리고 피조물 중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내 아버지와 내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함께 하리라 고 하신다(요14:23). 우리가 와서 와 우리가 거처를 함께 하리라 고 복수가 된 것은 앞에 아버지와 내 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관계적인 말로는 아들과 아버지이다. 어떤 때에는 창세기에서와 같이 이점을 아주 숨겨서 말한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고 하신다(창1:26). 우리가 와 우리의 는 복수로 되어 있으며, 관계적인 말로만 해석해야 한다. 신들이 신들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이 성부 성자 성령의 형상에 따라 만들자는 것이었다. 사람이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삼위일체론 7.6.12)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의해서 삼위일체의 형상으로서 창조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창조는 삼위일체의 공동사역으로 볼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서와 교회의 전통을 따라서 창세기의 형상 본문에 나타난 '우리'라는 복수형이 세 위격들의 관계를 암시하고 있다고 설명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형상본문을 관계적인 표현으로 이해했다. 창세기를 통하여 우리는 위격들의 협의에 의해서 인간이 창조되었고 삼위일체의 형상으로 형성되었음을 믿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는 인간의 내면과 영혼의 구조에 대한 탐구를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며 삼위일체의 흔적을 찾고 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고 하신 (창1:26) 형상에 대해서, 우리는 전력을 다해서 연구한 결과로, 그것은 삼위일체의 형상을 의미한다고 믿는다. 나의 형상을 따라 라고도 하지 않고, 너의 형상을 따라 라고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삼위일체론 14.19.25)

 

그렇다면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인간이 삼위일체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창세기의 말씀을 사도바울의 엡 4:23~24과 골 3:9~10을 해석을 통하여 자신을 창조하신이의 형상을 따라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알게 되는 사람이 새 사람이라면, 사람이 창조주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며 그것은 신체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거할 수 있는 이성적 마음에 따라 창조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삼위일체론 12.12)

 

"우리는 사람의 영혼안에서 즉 이성적 또는 지성적 영혼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해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영혼의 불멸성에 영원하도록 박혀있기 때문이다. 영혼의 불멸성을 말하는 데 조건이 있다. 영혼의 진정한 생명은 복된 생명이라고 할것인데, 영혼에 복된 생명이 없으면 영혼도 그 독특한 죽음을 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혼은 가장 불행할때에도 여전히 일종의 생명을 끊임없이 유지 하므로 영원불멸한다고 한다.(『삼위일체론』14.6)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성적 영혼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은 영혼의 불멸성에 박혀 있다고 하며 영혼의 불멸성을 말하고 있다.

그의 인간 영혼의 구조에 관한 탐구는 존재론적 방법에서 점점 더 인간 내면의 현상과 특성에로의 심리학적인 관점에로 넘어가게 되는데, 이러한 ‘내면화 과정’은 아우구스티누스로 하여금 모든 만물이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흔적을 반영하는 것이고 특별히 모든 피조물중 인간은 ‘하나님의 모습을 따라’ 유사하게 창조되었음을 깨닫도록 도와주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논의 가운데서 우리가 인간의 정신 안에서 하나님을 알거나 알 수 있게 해주는 최고의 요소를 고찰하기로 착수하였던 한 지점에 도착하였다. 그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길 기대한다. 비록 인간의 정신이 하나님의 본성과 동일하진 않더라도 다른 모든 것을 탁월하게 초월하는 그 본성의 형상은 우리 자신의 본성 안에서 가장 탁월한 요소 안에서 추구되고 발견되어야 한다. 우리는 먼저 정신이 하나님 안에 참여하기기 전에 정신 그 자체를 고찰하고 거기서 그의 형상을 발견하여야 한다." (삼위일체론 14.8.11)

 

3. 인간의 정신(mens)과 삼위일체

 

아우구스티누스는 일단 정신(mens)이 하나님 안에 참여하기 전에 그 자체를 고찰하고 그의 형상을 발견해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정신(mens)을 알고 그 지식에 기초하여 사랑할 수 있다. 그 정신을 성찰함으로써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할 수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해 놓은 인간 안에서 삼위일체성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정신(mens)속에서 그 삼위일체성을 발견하고 숙고함으로써 위엄 가운데 현존하시는 삼위일체에 대하여 명상할 수 있다. 그 형상이 비록 불충분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점은 지식이 사랑에 선행한다는 것이다. 정신이 자신을 아는 것 없이 자신을 사랑할 수 없다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세 가지 즉 '정신자체(mens), 정신의 지식(notitia), 그리고 정신의 사랑(amor)'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그리고 이 셋은 관계적으로 존재하며 이 셋은 분리할 수 없다고 말한다. (삼위일체론 9.4.4)

 

"정신(마음)이 그 자체를 알지 못한다면 자체를 사랑할 수 없다. 모르는 것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는가?… 정신(마음)이 그 자체를 알지 못한다면 무엇을 근거로 다른 정신을 아는가? 정신은 정신을 통해서 그 자체를 안다. 그 자체가 비물질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정신(마음)은 자체를 모르면 자체를 사랑할 수 없다." (삼위일체론 9.3.3)

"진리자체가 위대성인 곳에서는 더 참인 것이 아니면 더 위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정한 본질적 존재라는 관점에서는, 더 참인 것이 아니면 더 위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정한 본질적 존재라는 관점에서는, 참인것과 존재하는 것이 똑같으며 존재하는 것과 위대한 것이 똑같으며, 따라서 위대한 것과 참인 것은 똑같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기서는 동등하게 참 인 것은 반드시 또한 동등하게 위대하다."(『삼위일체론』8.2)

 

"정신(또는 마음mens)이 그 자체를 알며(notitia) 사랑(amor)할 때에 그 정신과 사랑과 지식의 경우에 아무리 셋을 혼합해도 그 삼위일체성이 없어지지 않는다. 이것들은 각각 그 자체로서 존재하며, 서로 모든 것 안에 있다. 둘씩 보아도 각각 그 둘 안에 있으며, 그들은 나머지 하나 안에도 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모든 것 안에 있다.… 그래서 이 셋[= 정신, 자기지식, 자기사랑]은 각각 그 자체로서 존재한다. 그리고 각각은 또한 서로의 안에 있다. 사랑하는 정신은 사랑 안에 있으며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지식 안에 있으며 사랑은 사랑을 아는 사람의 정신 안에 있기 때문이다. 같은 식으로 각각 다른 둘 안에 있다. 자체를 알며 사랑하는 정신은 자체의 사랑과 지식 안에 있으며, 자체를 사랑하는 아는 정신의 사랑은 그 정신과 지식 안에 있으며, 자체를 알며 사랑하는 정신의 지식은 그 정신과 사랑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신이 그 아는 자체를 사랑하며 그 사랑하는 자체를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둘이 다른 하나 안에 있다. 자체를 알며 사랑하는 정신은 그 자체의 지식과 함께 그 사랑 안에 있으며 자체의 사랑과 함께 그 지식 안에 있으며, 사랑과지식도 함께 그 자체를 사랑하며 아는 정신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 셋이 그 자체로서 완전할 때에는 정신은 자체를 전체적으로 사랑하며 자체를 전체적으로 알며, 자체의 사랑을 전적으로 알며, 자체의 지식을 전적으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셋은 놀라울 만큼 서로 분리할 수 없으며, 그러면서도 각각 단독으로 실재이며, 모두 합해서 한 실재 또는 본질적 존재이며 하지만 서로의 관계를 말할 수 있다."(삼위일체론 9.5.8)

 

즉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를 보일만한 것이 인간안에 존재한다고 믿었다. 인간 정신의 세 요소(mesn- notitia- amor)는 나뉠 수 없으며, 하나의 실체를 이룬다.고 믿었다. 바로 이러한 유사함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 영혼의 심리학적 현실, 곧 삼위일체 신비의 모습으로서의 삼중구조는 삼위일체의 신비에 도달하도록 해주는 지름길로 생각했다.

 

10권에서는 이러한 인간 정신의 세구조를 마음의 본성에 대해서 다루는데 이때에는 기억과 이해력과 의지의 세구조를 통해서 삼위일체를 접근하고 있다. 기억과 이해력과 의지의 세구조는 동시에 한 생명, 한 마음에 있는 본질적인 구조를 지닌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이며 단수로 부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억(memoria)과 이해력(intellegentia)과 의지(voluntas)라는 이 셋은 세 생명이 아니라 한 생명이며 세 마음이 아니라 한 마음이다. 따라서 이것들은 세 실체가 아니라 한 실체이다. 생명과 마음(mens)과 실체라고 부르는 기억(memoria)은 그 자체에 관해서 그렇게 부르며 기억이라는 이름은 어떤 것과의 관계로 부르는 것이다. 이해력과 의지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해야 한다. 어떤 것과의 관계로 이해력(intellegentia)이라고 하며 의지(voluntas)라고 하지만, 그 자체에 관해서는 둘이 다 생명이며, 마음이며, 본질적 존재이다. 따라서 이 셋은 한 생명과 한 마음과 한 본질적 존재인 점에서 하나이며, 그 자체들에 관해서 각각 무엇이라고 부르든 간에 복수로 부르지 않고 함께 단수로 부른다." (삼위일체론 10.11.18)

 

이렇게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마음안에 있는 마음 자체인 정신과 지식과 의지로서 사랑이 한 생명과 한 마음안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구분되면서도 분리되지 않은 셋의 관계로 인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을 담고 있다고 설명한다.

 

"마음(mens)이 자체를 사랑할 때는 마음과 그 자체에 대한 사랑이라는 둘이 있다. 그와 같이 마음이 자체를 알 때에는 마음과 그 자체에 대한 지식(notitia)이라는 둘이 있다. 그러므로 마음 자체와 그것에 대한 사랑(amor)과 그것에 대한 지식은 세 무엇이며 이 셋은 하나이며 이것들이 완전할 때에는 서로 동등하다." (삼위일체론 9.4.4)

 

4. 사랑(amor)과 삼위일체

 

그는 계속해서 삼위일체를 알기위한 열쇠는 무엇보다 사랑안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삼위일체 내에서의 사랑의 교제는 성육신에서 계시되었다. 그 성육신은 신이 사람이 되신 사건으로서 인간의 영혼으로 하여금 신을 사랑할 뿐 아니라 동료인간을 사랑하도록 이끈다. 그렇다면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사랑이란 무엇인가?

 

"삼위일체에 관한, 또 하나님을 아는 문제에 관한 이연구에서 우리는 무엇이 참 사랑이냐, 아니 무엇이 사랑이냐 하는 것을 주로 고찰해야한다. 참된 사랑이라야 사랑이라고 부를 것이며, 그렇지 않은 것은 욕망이다.......그러나 우리가 의롭게 살기위해서 또 다른 사람들도 의롭게 살기위해서, 그들을 사랑하며 그 사랑 때문에 모든 무상한 것을 멸시하며 진리에 밀착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삼위일체론 8.7.10)

 

그리고 그는 사랑을 사랑하는 자는 확실히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영적인 사랑으로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는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논증하고 있다.

 

"우리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형제를 사랑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또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는 그 사랑을 무엇보다 더 사랑하지 않을수 없다. 따라서 이 두 계명은 서로 교환할 수 있다고 생각할수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사랑을 사랑하는 사람은 확실히 하나님을 사랑한다. 그러나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사랑을 사랑할것이다." (『삼위일체론』8.8.12)

 

그는 어떻게 사랑을 통해서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알수 있을까? 사랑의 세가지 면을 통해서 삼위일체를 알 수 있다고 하고 있는데, 사랑의 세가지 면을 일종의 삼위일체로 유비하고 있는데, 즉 사랑하는 자, 사랑 받는것, 그리고 사랑' 그 자체이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이 품은 것이며, 사랑을 받는 것이 받는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을 받는 다는 것과 사랑, 이 셋이 있다." (『삼위일체론』8.10.14 )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정신 안에서 마음과 사랑은 분리할수 없다고 한다. 마음과 사랑은 깊이 결속되어 있고, 마음과 사랑이 하나라면 사랑하는 것과 사랑자체 역시 하나가 된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과 사랑은 구분은 할수 있지만 분리할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 사랑 받는것, 그리고 사랑' 그 자체는 하나이며 이 역시 삼위일체를 보여주는 귀한 유비이다. 이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내 자신과 내가 사랑하는 것과 사랑자체이다..... 사랑이 사랑하는 사람과 동등하게 된다. 그리고 사랑이 한 실체라면, 그것은 물론 물체가 아니라 정신이다. 또 마음도 물체가 아니라 정신이다. 그러나 사랑과 마음은 두 정신이 아니라 한 정신이다. 두 본질적 존재도 아니요. 한 존재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 이 둘은 하나이다. 달리 말하고자 한다면, 사랑을 받는 사람과 사랑이다. 물론 이 둘에 대한 말은 서로 상대적. 관계적인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과 관련되며,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과 관련된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을 품고 사랑하며,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이 품은 사랑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없엔다면, 거기에는 사랑이 없게 된다 그리고 사랑을 없엔다면 사랑하는 사람이 없게된다. 그러므로 서로 관계적으로 말하는 한에서는 그것들은 둘이지만 그 자체들을 보면 둘이 다 정신이며, 둘을 합해도 한정신이다. 둘이 다 마음이며 둘을 합해도 한마음이다. 그러면 삼위일체는 어디 있는가? 우리는 정성을 다하며 영원하신 빛에 호소하여 우리의 암흑을 비춰주는 허락되는 범위 안에서 우린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있도록 기도하자." (삼위일체론 9.2.2)

 

결국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영혼안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 안에는 일종의 삼위일체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즉 마음(mens)과 마음 이 자체를 아는 지식(notitia)과 마음 그 자체와 자체에 대한 지식을 사랑하는 사랑(amor) 이 셋이다. 그리고 이셋은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동등하며, 그 본질(essence)이 하나라는 사실을 풀어내고 있다.

 

Ⅲ. 결론

 

지금까지의 정리를 통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떤 연구를 통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해하였는지 살펴보았다. 삼위일체론에서 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는 일단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님 되심에 관하여 논증한 이후에 삼위일체는 '관계개념'을 철저히 고수한다. 이 관계개념을 통해서 삼위의 통일성을 주장할 수 있었고. 그는 성령과의 관계에서 성부와 성자는 연합된다고 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령이라는 이름이 성부와 성자에게 다 관련되어 어떤 부가형언의 교통 즉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를 이어주는 통로 때문에 붙여졌을 것이라고 보고 성령을 선물이라고 한다.

 

이러한 관계적 개념의 삼위일체론은 인간 영혼안에 있는 삼중구조적 관계개념으로 발전되어진다. 일단 그는 하나님의 형상 자체인 로고스에 참여하는 모든 피조물 안에 하나님에 대한 모방이 있음을 발견한다. 그리고 피조물 중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보았으며, 인간의 마음안에는 마음 그 자체(mens), 마음을 이해하는 지식(notitia), 그리고 마음 그자체를 사랑하는 사랑(amor)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이 세가지 삼중구조는 한 생명, 한 마음안에 있다고 가르치는데, 이는 마음과 사랑은 한 생명, 한마음에서 나오고 한 사람안에 한 생명과 한 마음이 있으므로 마음과 사랑은 구분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이것을 심리적 삼위일체론이라고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의 흔적으로 이것은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일단 이글을 마친 필자에게 있어서 궁금한 것과 연구 과제는 이러한 심리적 삼위일체론이 발전되어 지금 우리에게 전수된 신학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러한 심리적 삼위일체론의 신학적 오류는 무엇인가하는 것이다. 특별히 교회 공동체와 관련된 삼위일체론들이 오늘날 현장에서 나오고 있는데, 인간영혼의 개인을 연구하여 얻어진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과 오늘날 현대 신학자들의 삼위일체론은 무엇이 다른지도 궁금하였다.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성에 대한 질문도 생겼다. 하나님께서 인간안에 내재하심이 가능한지. 아우구스티누스는 일단 인간안에 하나님의 형상의 흔적이 있다고 보고 있다. 인간의 의지와 지성 뿐아니라 영혼 전체가 타락했다고 보는 입장을 통해서 하나님과 사람의 영혼은 어떻게 상호 관계를 갖는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두서없는 글, 비전문가이며 라틴어가 아닌 한국어로 번역된 삼위일체론을 여러번 읽으면서 답답하고 마음이 어렵기도 했지만,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심리적 삼위일체에 대해서 완벽하게 독파하지는 못했지만, 정리하면서 생겨난 신학적 질문들과 궁금증은 앞으로의 방향에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어졌으면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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