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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든지 죽든지 (신학)/교회사

한규무, 국가조찬기도회 무엇을 남겼는가를 읽고서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14.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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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을 위한 정리 개념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일단 전체적인 논문의 개인적인 평가이기 때문에 논문을 쓴 저자의 의도와 다를수 있다. 즉 논문의 필요를 위해 그리고 시각을 넓히기 위한 연습이라고 보면 좋을듯하다.

 

유신시기와 신군부시대 속에 보수와 진보는 각각 다른길을 걷기 시작했다.

진보 개신교회는 민주화 운동과 적극적인 사회참여를 하였고, 보수 개신교회는 정교분리 원칙을 위한 정권유착적 형태의 모습의 양갈래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특별히 보수교회가 가진 몇가지 대 사회적인 입장에서 나타난 몇가지 두드러진 활동이 있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국가조찬기도회가 아닌가 생각된다.

 

본 글은  한규무교수의 글로서 기독교사상 2004년 1월호에 기재된 [특집우리_시대__교회의_정치적_책임은_무엇인가]__'국가조찬기도회_'__무엇을_남겼는가라는 글을 읽고서 정리한 글이다.

 

한규무교수는 일단 독재시절, 하나님의 공의와는 거리가 먼 시절에 기독교계의 지도자들이 국가조찬기도회라는 이름으로 모여 무엇을 설교했는지를 묻고 글을 시작하고 있다.

 

1. 국가조찬기도호의 역사

 

저자는 1905년 을사조약을 앞두고 각교회에서 열렸던 구국기도회가 국가기도회의 최초의 형태가 아닌가 한다. 그러나 통치자를 위한 기도회는 만수성절 기념식인 고종의 생일에 고종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1896년부터 몇년동안 열린 기도회가 있었다.

아마 이 만수성절 기념식때 했던 고종을 위한 기도회가 국정책임자를 칭송하고 축복하는 기도회의 모태가 되었다고 할수 있다.(27)

 

그리고 일제치하에서 기독교인들이 국가를 위한 기도회를 가질수 없게 되자. 전혀 다른 성격의 일제의 승전을 위한 무운장구기도회가 1937-39년 사이에 8,953회나 열렸다고 한다. 이를 부끄럽지만 지울수 없는 한국교회의 모습이라고 평가한다.(27)

 

국가조찬기도회의 시작은 대통령조찬기도회였다. 이 기도회는 1966년에 열렸으나 정작 박정희 대통령은 참석하지 않았다.

따라서 공식적인 대통령 조찬기도회는 1968년 부터라고 할수있다. 1976년 8회부터 국가조찬기도회로 명칭을 바꾸어 계속 이어져왔다. 설교는 주로 '보수적' 교단의 지도자들이 맡았다.(28)

 

2003년에는 35회때 3,000명으로 늘어났다. 저자는 이러한 집회를 '메머드 이벤트'라고 할만 한 수준이다 라고 평가하고 있다.(29)

 

2. 쓴소리는 없고, 단소리만 있었던 국가 조찬기도회

 

초기 국가조찬기도회를 이끈 이는 대학생선교회 CCC의 김준곤목사였다. 그는 "박대통령이 이룩하려는 나라가 속히 임하길 빈다"(1회), "우리나라의 군사혁명이 성공한 이유는 하나님이 혁명을 성공시키신 것이다.(2회), "10월 유신은 실로 세계 정신사적 새물결을 만들고 신명이 28장에 약속된 성서적 축복을 받은 것이다."(제6회)라 설교하며 박정희의 5.16쿠데타와 10월 유신을 하나님의 복으로 미화했다. 

저자는 당시의 설교들을 열거하며 쓴소리 보단 단소리를 했다며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오히려 국가조찬기도회에 참석했던 대표들이 대통령으로부터 쓴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3. 국회 조찬기도회의 활동.

 

대통령국가조찬기도회 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국회조찬기도회라는 것도있다. 1965년 김준곤 목사와 여야 의원 20여명이 기도회를 가진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국회의 복음화와 입법 과정에 기독교 정신을 불어넣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고 지금까지도 월례기도회를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저자는 이글을 통해 그리스도인 정치가들에게 기도회의 취지는 좋으나 정의의 편에 서지 못하고, 쓴소리보다는 단소리가 많았던 보수적 개신교 지도자들을 향해 아쉬움을 전해주고 있다.

또한 이들의 대부분 교회가 정치에 참여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친정부적이며 정권 유착적인 성향을 지녀 정부에 대한 어떤 비판도 하면 안된다고 했던 

보수적 개신교 지도자들의 모습을 전해주고 있다.

 

 

정리하며,

 본 논문은 국가조찬기도회의 역사적 서술과 동시에, 당시 설교자들의 설교들을 나열해 줌으로써 국가조찬기도회가 어떤 식으로 어떤 성격으로 어떤 흐름을 가지고 여기까지 왔는지를 알려주고 있는데 그 의의가 있는 듯하다.

당시 개신교지도자들이 정권을 향해 쓴소리는 없고 단소리만 있었던 현상에 대해 아쉬워하며, 과오들을 반성해야한다고 외치고 있다.

 

개인적으로 ,

 

1. 보수적인 개신교지도자들의 국가조찬기도회가 있다면, 진보적인 개신교 지도자들에겐 목요기도회같은 것이 있다고 하겠다.

목요기도회는 1974718일 서울 종로5가 한국기독교회관 2층 회의실에서 시작했다.

당시 민청학련 사건 및 긴급조치 위반 구속자 등 진보그룹의 학생및 인사들이 감옥에 갇혀 실형의 위기에 처해있을때

가족들을 중심으로 기독교교회협의회의 인사들과 함께 석방운동과 기도회를 갖기 시작했다.  

그 기도회의 내용을 알수 있을까? 보수적 개신교 지도자들의 국가조찬기도회와 비교가 가능할까?

 

2. 왜 보수적개신교 지도자들은 국가조찬기도회를 시작하게 되었을까?

동력은 무엇이었으며, 이러한 기도회에 어떤 신학적 배경을 근거로 삼을수 있을까?

 

3.  국가조찬기도회는 당시 보수적인 개신교 지도자들의 정부를 향한 성향이 어떠했는지를 알아보는 가장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정교분리를 주장하면서도, 친정부적인 모습을 보이는 보수적 개신교 지도자들은

여전히 지금도 현정부에 굉장히 유착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보수적 개신교지도자들의 소위 나라사랑법은 올바른 것이었을까? 예언자적 사명을 잃어버린 시대를 향해 아쉬움을 가진 오늘 과연 교회는 얼마나 이러한 역사적 과오를 반성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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