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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든지 죽든지 (신학)/교회사

초기 한국기독교의 정교분리 문제 (1901년 정교분리선언)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14.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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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민주화 운동시기에 나타난 개신교의 모습을 다루기 위해서는

초기의 한국 개신교의 정교 분리 문제를 정리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연히 한국 기독교 역사연구소 소식 79호에 실린 김권정교수(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겸임 교수)의 글을 읽어보았다.

 

그는 초기 한국기독교의 '정교분리'문제와 사회참여 -한국기독교의 사회참여 방식을 중심으로....라는 글을 통해

당시 한국교회의 정교분리의 배경이라 여기는 1901년 장로교 공의회의 '정교 분리 선언'을 역사적 콘텍스트를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의 사회참여 방식은 어땠는지를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1901년 장로교 공의회 '정교분리선언' 1901년 4월28일 북장로회 외국 선교위원회 총무인 브라운 총무가 다녀간 그해 9월에 장로교공의회가 열렸는데, "교회와 정부사이에 교제할 몇조건이라는 5개 조항의 '정교분리'를 주요 골자로 하는 선언을 채택- 그리스도신문 1901년 10월 1일자)

 

특별히 이 논문에서 얻을수 있는 정보는

 

  첫째 참고 서적에 관한 것인데, 이만열은 기독교인의 민족의식 형성 이라는 책에서 정교분리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이것이 정교분리 문제를 가장 먼저 다룬 것이라고 한것이다. 민경배도 "한국기독교회사"라는 책에서 장로교공의회에서 결의한 장로교 공의회의 문제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50) 

 

  둘째 1901년 장로교 공의회의 정교분리 선언은 '안전장치'의 역할을 하였다는 것인데, 당시 외국인 선교사들은 정교분리를 통해 당시 일제통치시기에 정치세력과 종교세력간의 충돌을 막는 안전장치와 같은 것이었다는 것이다 (57)

 

  셋째 정교분리선언은 당시 일제시기 교회안에서 애국적 정신을 가지고 활동하는 사람들에게 교회가 더이상 대사회를 향해 분리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떠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이제 사회참여적 운동은 교회로 부터 기독교 기관인 YMCA와 상동 청년회 그리고 신민회등등이 대표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 한국교회의 정교분리 문제와 한국 보수적 개신교의 역사를 살펴보려면 반드시 1901년의 장로교 공의회를 집고 갈필요가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정교분리의 원칙이 한국교회의 보수성과 어떻게 어울러져서 어떤 발전을 거쳐 어떤 형태로 진행되어 왔는지에 대한 꼼꼼한 고찰이라고 생각된다.

 

실제로 이승만 정권과 유신시기와 신군부시기에 보수적 개신교의 모습은 대 사회와 정치에 대한 입장은 정교분리의 입장이었는가? 오히려 정교유착적인 모습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는 정치적 입장을 정교분리를 중심으로만 살펴볼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청산되지 않은 친일문제와 서북지역의 지주들, 미국 유학파들을 중심으로 월남하였던 반공주의자들로 인한 반공과 친미적 성향도 꼼꼼히 살펴볼수 있어야 할것이다.

 

어찌되었든, 정교분리적 원칙이 한국교회 보수적 개신교와 어떤 긴밀한 상호작용이 있었는지?

정교유착적 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고민해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된다.

 

 


한국 기독교 수용사 연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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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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