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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한 기대 (삶)/신뢰의 길

보다(視)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17.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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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視):

그리스도인들에게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주사랑교회 사역하던 시절, 청년사역과 함께 늘푸른대학 사역을 하였다.

늘푸른대학은 65세 이상의 어르신들을 위한 사역으로서 당시 어르신들 40여분을 모시고 사역을 재미있게 하였다.

어르신들도 늘푸른대학의 스탭들과 사역자인 나를 사랑해 주었고 그 분들의 기도와 사랑 속에 사역자로 세워져갔다.

 

어르신들중엔 녹내장으로 인해 시력을 완전일 잃어버린 권사님 한분이 계셨는데,

새벽마다 빠지지 않고 기도하시는 권사님이시고

워낙 호탕해서 밝고 건강하신 권사님이셨다.

자양동에 있는 한 동네에서 팥죽을 끓이며 당신 자녀들 대학보내시고 키워내셨다.

아직도 권사님의 팥죽을 그리워하는 사람들도 많다하니 권사님의 깔끔함과 동시에

솜씨와 능력이 어떠했는지 헤아릴수 있을까 싶다.

 

그러던 그분께서 시력을 잃으셨다.

늘푸른대학의 프로그램으로 정신건강증진센터에서 나와 우울증 척도를 검사하고 자살예방을 위한

프로그램을 실시하였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는데, 그 권사님께서 우울증의 지수가 가장 높게 나온것이다.

상담사들과 늘푸른대학 스탭들이 그 권사님과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나이듦과 동시에 보이지 않은 지금 현실이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신 권사님이시지만

쉽지는 않았나 보다.

 

교역자들의 대다수가 그 결과를 보고 놀랐다.

기도 많이 하시며 평소에 늘 호탕하게 지내셨던 그 권사님이 어떻게 우울증 지수가 높을수 있냐며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럴수 있지.... 믿음은 신앙과 삶의 간격이 점차 좁혀나가는 것 아니겠나...싶었다.

믿음 생활은 신앙과 삶의 간격이 접차 좁혀나가 신앙과 삶이 결국 하나됨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

신앙과 삶의 치열함속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길을 걷는 것이 우리네 삶 아닐까?

그래서 어쩌면 우리네 선지자들, 믿음으로 살았던 많은 신앙의 선배들은 모두

우울증 환자였을지도 모르겠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과 삶의 문제에서 치열하게 분별해나가고 불안을 극복해나가고자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음으로 온몸으로 겪는 두려움들이 날마다 교차했을 것이다.

조국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법과 통치가 승리할것이라고 노래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만홀히 여기고 경시하는

이들을 바라보며 절망하는 삶....이것이 선지자들과 우리 신앙의 선배들의 삶 아니었는가....

 

너무 이야기가 장황해졌다^^

하여간 그 권사님은 그렇게 우울증을 겪으면서 지금까지 생활해 오셨다.

얼마전 권사님이 내게 말을 건내셨다.

"목사님 저 이제 늘푸른대학에 안나오려구요."

"왜요 권사님..."

"이제는 몸도 안좋고 보이지가 않아서 피해만 끼치고......"

"권사님 그런 소리 마세요...권사님 안계시면 저도 힘빠져요..."

"아니에요 이제는 앞이 안보여...."

"권사님, 권사님은 앞이 보이지 않지만......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셨잖아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았고, 구원을 보셨잖아요. 권사님 힘내세요. 그리고 늘푸른대학에 당당하게 오세요"

"아멘....네 목사님...."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본 사람이다.

어떤이는 볼수있는 눈을 가졌지만, 그 눈으로 무엇을 봐야할지 모른다.

주제 사라마구(Jose Saramago)가 쓴 "눈먼자들의 도시(원제:Ensaio Sorbre a lucidez)"라는 소설을 읽고있다.

갑자기 눈이 먼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국가는 이들을  격리시킨다. 

격리된 장소에서 눈먼사람들은 저마다 생계를 위한 싸움을 싸워간다. 비참해지고 더러워진다.

책을 몇번이나 덮었다가 다시 읽었다가를 반복했다.

눈이 먼다는 것만큼 당황스러운 것도 없을 뿐아니라 비참한 삶은 없는 것같다.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스도인이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요한복음 9장은 날때부터 맹인된 자를 고치신 사건이 나온다.

여튼 결론은 이렇다. 예수께서 날때부터 맹인된 이를 고치신다.

온전케된 이사람을 사람들은 바리새인에게로 넘기고 예수께서 어떻게 고치셨는지

예수가 정말 고쳤는지를 묻는다.

그는 이렇게 증언한다.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그 사람이 네게 어떻에 행하였느냐 어떻게 눈을 뜨게 하였느냐?"

그들에게 맹인된 자가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는지가 중요했다.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이가 아니라면 어떻게 맹인을 고칠수 있겠습니까"라는

질문을 바리새인들에게 던진 맹인이었던 이 사람은 쫓겨난다.

쫓겨난 이 사람을 예수께서 찾아오심으로 사건은 결말로 들어간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주여 내가 믿나이다"

"내가 심판하러 이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하려 함이라"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우리도 맹인인가?"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하나님을 보는 눈을 말한다.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기위해 그분을 보기위해 애를 쓴다. 그러나 그것은 막치 삭개오가 나무에 올라가

예수님을 보고자 했던 몸부림 같다.

우리주님은 거기에서 내려오라고 하신다.

지금 읽고 있는 책  크리스토퍼 휴어츠(Christopher. L Heuertz)의 "Simple spirituality"(양혜원역, 눈뜬자들의 영성,IVP)에서 이렇게 말한다.

 

" 예수님을 더 잘보기 위해서 내가 사용한 방법들은 언제나 나를 더 좌절하게 하고 공허하게 만든다.

아마도 나무 위에서는 그리스도가 잘 보였으리라. 하지만 제대로 본것은 아니었다. 나무위에서 보는 예수님을 삭개오가 통제하는 관점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정말로 제대로 보려면 예수님과 마주 보아야한다.

그리스도께 내 취약함을 드러내며 다가갈때 그리스도는 진정 그분의 모습을 보이신다. (56)

최약하다는 것은 상처받을수 있는 상태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내가 오르는 나무들 과 삭개오가 올랐던 나무는 하나님을 보고자하는 진정한 필요와 열망을 드러낸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자신을 구원하려는 또 다른 시도에 불과하다......(57)

나는 예수님을 여러관점에서 보려하지만 오직 내가 그분과 마주볼때에만 변화한다

내가 그리스도를 보기위하여 오르는 것은 그것이 나를 구원해 주시길 바라며 나를 위해 만드는 거짓 십자가다.

예수님은 그런 나에게 내려오라 부르신다.

그분의 십자가에서 나는 나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보는 법을 배운다

그분의 식탁에서 그분은 세상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보는 눈을 열어주신다.(58) "

 

그리스도인이 본다는 것은, 하나님을 보는 것을 말한다.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지금 내 앞에 계신 하나님을 보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세계를 본다.

그리스도인이 보는 것은 깨어진 세상 어그러지고 상처난 세상을 보는 것을 말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주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본다는 것은 세상을 향한 사랑을 보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세상을 향해 손을 뻗어내어 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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