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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한 기대 (삶)/신뢰의 길

10월 3일 단상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16.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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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교회의 목사님께서 성도들을 위한 강의 중

"누군가 자신에게 상처를 주면 혹은 상처를 받으면 
상처 받지 않기로 결정하면 된다." 라고 강의를 하셨단다.

그 아야기를 멀찍이 들으며 웃음이 났다.
상처받지 않기로 결단하는것 그게 성경적이면서 옳은 대답인가...

 

성경은 늘 약자 편이다.

 그렇다고 주님은 한번도 상처가 오면 안받으면 된다는 식으로 대답하지 않으셨다.

상처주지 말라 하셨다. 
근심주지 말라하셨다.

형제를 실족하게 하지말라 하셨다

그러면 연자맺돌을 목에 감고 던지우는게 낫다고 까지 하셨다. 
약자의 편이시면서 철저히 가해자들에게 설교 하셨다.

예수님은 그렇다 쳐도.

성경의 인물들 중 세례료한의 설교만 봐도 누가복음 3장을 봐도 
상처입은자들이 그 설교의 주인공이 아니라 
가해자들이 될수 있는 이들 즉 
옷 두벌있는 이들(11절) 
세금걷는 이들(13절) 
군인들(14절) 이 설교의 대상이었다. 
가진자들 , 빼앗는자들 , 불법을 자행하는 자들이 설교의 초점이었다.

그 밖에 선지자들의 설교도 마찬가지였다.

 

어느덧 우리는 가해자들에게 강의하며 설교하는 것보다 피해자들에게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데, 
피해자들이여 그저 그들을 용서하고 상처받지 말라는 식이다.
기독교는 그런 종교아니다. 물론 용서 필요하다. 
분명 필요하다 내적치유 필요하다. 
주님도 용서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상처받지 말라는 말은 신앙을 소극적으로 만들며
온갖 피해의식 가득한 기독교로 만들수 있다.

 

그러나 예언자적 선포가 설교의 중요한 부분이라면,
방향은 분명 달라져야 한다. 
가해자들이 될수있는 이들에게 초점 맞추어야 한다.

다시말해서 상처가 오면 상처받지말라가 아니라.

누구에게도 상처주지 말라고 말이다. 
압제와 폭력을 금하라고 말이다. 
정한 임금을 지불해주고 정직하게 살라고 말이다. 
때리거나 욕하지 말라고 말이다. 
차별하거나 통제하지말라고 말이다.

이것이 성경적인 가르침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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