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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한 기대 (삶)/신뢰의 길

희망에 관하여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17.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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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란,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느니라. 

위의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으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안에 감추어졌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너희도 그와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골3:1~4) 


삶의 곤고함은 사람들의 시선을 좁아지게 만듭니다. 자기 욕망 주의를 맴도는 동안 점점 작은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중략)

시간속에서 영원을 보고 영원속에서 시간을 볼수있다면, 분초 단위로 우리를 몰아내는 시간의 폭력에 맞설수 있을 것입니다.

-김기석, "세상에 희망이 있느냐고 묻는 이들에게."18-9. -


희망을 말하려면, 삶의 곤고함으로부터 벗어나는 시도를 해야할까.....

삶의 곤고함을 벗어나 우리의 시각을 확대하는 일을 어떻게 할수 있을까? 

우리는 언제 삶의 곤고함을 느끼게 될까? 언제 우리는 희망을 품게 되는 것일까?


사도바울은 위의 것을 찾으라 권면한다. 

위의 것을 찾는 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를 빌립보서에서도 찾을수 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 지라....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은 하나님나라를 바라보는 것인가?....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지만 하늘을 품고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희망일까? 


희망고문이라는 말이 있다. 

희망도 고문이 될수 있다. 희망을 이상과 현실사이에서 막연한 기대라고 여기면 그것은 분명 고문이 될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사회주의 생동하는 유토피아』에서 유토피아를 인간의 실천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며

인간 존재 양식의 근간을 이룬다고 믿는다. 

가령 유토피아는 창의력과 독창성을 그 특징으로 하기 때문에 탈보수적이며 진보적이라고 할수있다. 

기존의 패턴에 순응하지 않고 저항하는 성향으로 인해 어떤 지배에서 슷로를 해방시키는 능력있다는 의미이며 

결국 발명의 범주에 속한다고 여긴다.  


"사회주의 유토피아는 지배적인 자유주의-부르주아 유토피아와 관계에서 그러한 조건들을 완벽하게 퉁족시킨다사회주의 유토피아는 정치적 평등을 시행함으로써 보호될것으로 기대되는 법과 정의에 의한 통치라는 부르주아의 이상을 전적으로 받아들인다그러나 개인을 고독속에 던져놓고 그렇게 버려진 개인의 근심 걱정에는 무관심한 자유시장 경제와 그러한 이상이 동일시될 가능성은 단호하게 거부한다." 


인간됨을 위한 해방의 몸부림, 저항, 진보, 평등 등 인간 존재 양식의 근간을 이루는 데 필요한 모든 실천적 의식을 함양하는 시도가

유토피아로 나아가는 것이며, 이러한 요소들이 사회주의를 이룬다고 믿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사회주의의 요소는 유토피아사회 건설이 목표이며, 정의로운 사회, 공평한 사회를 이루는 것들이라고 할수있다. 

결국 유토피아는 희망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 이 희망앞에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저항하며,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모여든 것이다. 

정의로운 사회 구현을 위해서 생명을 버리기 까지 하는 것이다. 


정의가 곧 희망이면 결국 유토피아 세계는 정의로운 세상이다. 


강남순교수의 『정의를 위하여』 에서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 필요한 것은 자기 비판적 사유 혹은 비판적 성찰이며, 

이러한 비판적 사유와 성찰을 통해 저항으로 이루어지고 이것이 바로 인간의 자유와 해방의 확장을 위하여 나아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비판적 사유는 비판적 저항으로 이어진다. 비판적 저항을 통해서 ‘보편적’ 인간의 범주로부터 배제되었던 ‘개별인’들로서의 다양한 인간들의 권리.평등.정의가 확장된다. 이러한 권리.평등.정의가 확장되어야 비로소 인간의 자유 역시 확대된다. (중략) 현대의 다양한 인문학적 담론들은, 비판적 사유와 저항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인간의 자유와 해방의 확장을 위하여 약자들과의 연대 및 사회적 책임의 의미를 인식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비판적 저항으로서의 인문학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가장 좋은 인문학적 언어로 되어있다. 

인간의 존재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보여주고 있으며, 인간됨의 존재 양식이 어떤지를 보여주고있다.

더 나아가 이땅에 구현될 유토피아적 삶에 대해서 분명하게 전해주고 있다.

비판적 성찰을 통해서 우리의 희망은 곧 정의로운 세상이며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서 저항하며 인문학적 고민을 시작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대로 사는 삶이야 말로 진정 인문학이다. 

희망은 거기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이 있는 접근 말이다. 

비판적 성찰 과 저항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이 변화될 것을 꿈꾸며 즐거워 하는데서

시작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한 곳이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그 현실을 바라보며 아파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유토피아는 그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명성교회 세습문제로 인해 시끄럽다. 이땅에 희망이 있는가? 한국교회 희망이 있는가? 묻고 절망된다. 

하나님나라는 희망이다. 과거 메시야를 대망하는 시기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이 하나님나라라고 선포한 시점으로 부터

그리고 성령이 오셔서 우리가 하나님나라를 살고 있다고 역사하실때부터 하나님나라를 희망이었다. 

이미 작은 고민들로부터 우리가 내린 결론은 

우리의 희망은 곧 비판적 성찰이요 저항이며 그것으로부터 얻어낸 정의로운 세상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공평하고 정의로운 세상이야 말로 

유토피아다. 하나님나라다. 

이 땅에서 우리가 희망 곧 하나님나라를 말하려면 무엇을 해야할까?

비판하고 저항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고민하고 질문을 던져야 한다.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 비판해야한다. 저항해야한다. 

그리스도인은 프로테스탄트이다. 저항하는 자들이다. 

개신교는 저항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나라를 이뤄내고자 했다. 

로마의 거대 제국의 정신, 성경에 위배되는 물질주의, 우상숭배, 교권주의를 저항했다. 

우리 역시 물질이 우리의 모든 것이다 라고 믿는 물질주의를 우상숭배 행위를 그리고 교권주의를 저항해야한다. 

희망을 말하려면 그렇게 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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