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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한 기대 (삶)/책과 삶

존스토트의 그리스도의 십자가(IVP)를 읽고...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09. 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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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십자가

들어가면서....

무엇보다도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관심사는 십자가가 아닐까싶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서나 십자가를 보게 된다. 많은 교회들의 높은 종탑에 그리고 우리가 죽은 후 묻히게 될 때, 우리 가족이나 친구들은 아마도 십자가가 세겨진 비석을 우리 무덤위에 세워 줄 것이다. 심지어는 길거리를 다니는 젊은이들의 목걸이나 귀걸이에도 십자가를 볼 수가 있다. 그만큼 십자가는 기독교인들의 최고의 관심사와 더불어 기독교의 절대적인 기본진리이며 절대가치인 것이다. 우리 뿐아니라 사도바울에게 있어서도 역시 그의 최고의 관심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였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리라” (갈 6:14)

존 스토트의 평생의 최고의 걸작이라고 불리 우는 그리스도 십자가는 왜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절대 가치로 여겨야하며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관심사인 십자가 안에 속죄함의 비밀들을 명쾌하게 제시해준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통해 존 스토트라는 인물을 안 것은 4년전 대학교 입학하고 나서 선배들의 조언으로 시작 되었다. 그 당시 나는 복음에 대해 그리고 구원에 대해 끊임없는 고민과 깊은 회의로 하루하루를 의미 없이 보내고 있을 때였다. 그때에 이 책을 접하게 되었고 이 두꺼운 책의 책장을 모두 넘기고 닫는 그 순간에 1년 동안 깊이 고민하고 번민했던 그 죄와 구원의 문제들이 마침내 사라지고 말할 수 없는 감격과 확신으로 뒤바뀌는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본서의 구성
  자..... 그러면 더 이상 지체 하지 말고, 감격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 책의 첫 장을 넘겨보자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전체 4부(13장)로 되어있다. 개인적인 견해로써 이 책을 보기 쉽게 나눠본다면 1부(1장~3장)는 서론 부분에 해당 하는 부분으로 십자가의 역사적 배경, 십자가가 던져주는 신학적 의미 그리고 십자가로 나아가기 이전에 반드시 다루어야할 죄에 대한 문제가 주요 핵심이다. 2부에서 3부(4장~9장)는 본론 부분으로 십자가의 핵심과 성취가 그 핵심이다. 마지막으로 4부(10장~결론)는 결론 부분으로 십자가 이후에 그리스도인의 삶의 십자가의 영향력이 핵심 메세지이다. 그러면 본격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한다.

본론: 제 1부 십자가를 향하여.....

아까 서론부분에서 필자가 언급했듯이 십자가는 신약의 사도들과 그 당시 기독교인들뿐만 아니라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이며 중심이 된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가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냉혹하게 던지는 의문은 우리로 하여금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과연 실제로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위하여 ‘세상의 헛된 것으로 여기며, 십자가로만’ 자랑하고, 그것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는가? 기독교 신앙이 과연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라는 말로 정확하게 요약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집중하는 것은 무슨 근거에서인가?” 제 1장 십자가의 중심성은 말과 행동으로만 강조되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와 같은 깊은 질문을 던져줌으로서 시작된다.

제 1장 십자가의 중심성

종교와 이데올로기는 각각 자체의 가시적인 상징을 가지고 있는데, 이 상징은 그 종교나 이데올로기의 역사나 신념의 중요한 특징을 드러내 보여 준다. 기독교도 이런 상징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최초의 상징은 십자가가 아니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가해진 격렬한 비난과 박해 때문에, 그들은 매우 신중해야 했으며 자기들의 종교를 들어 내놓고 자랑하는 일을 피해야 했다. 따라서 이제는 기독교의 보편적 상징이 된 십자가가 처음에는 회피되었는데 이는 그것이 직접 그리스도와 연결되어있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이 일반적인 죄인의 처형과도 관련되어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 로마 문화에서는 십자가가 수치의 표상이었기 때문에 십자가를 기독교 최고의 상징으로 택한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로마인들은 고통스럽고 굴욕적인 십자가형의 죽음을 가장 흉악한 범죄자와 가장 위협적인 역적들에게 구형했다. 역사상 십자가형을 받은 로마시민은 없었다. 키케로는 한 연설에서 십자가형을 ‘가장 혐오스러운 형벌이라고 비난했다. 로마인들이 십자가를 무서운 것으로 간주했다면 그 이유야 다르겠지만 유대인 역시 마찬가지 였다. 유대인들은 ‘나무'와 ‘십자가’를 구분하지 않았으며 또한 나무에 달리는 것과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도 서로 구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 박힌 범죄자들에게는 자동적으로 “나무에 달린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 21:23)이라는 율법의 끔찍한 진술을 적용시켰다. 그들은 하나님의 메시야가 나무에 달려서 하나님의 저주아래서 죽으리라고는 도저히 믿을수 없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왜 끊임없이 십자가를 강조하는 것일까?
왜 그리스도가 저주를 받으며 죽으셔야 했을까? 이것을 다시 질문해 보면 왜 우리는 그 수치스러운 일을 선포해야 하며 부끄러운 것을 자랑으로 여겨야 하는가? 이다.
바울은 과감하게 십자가가 어리석은 것으로 보이기하고, 자신을 신뢰하는 자들에게는 ‘거치는 돌’로 보이기도 하지만, 실상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의 본질 그 자체라고 선언했다. 그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기는 이 사실을 너무나 확신한 나머지 세상적인 지혜를 단념하고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알지 않기로 일부러 작정했다고 말했다.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의 죽음이 없다면 구원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는 이렇게 썼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 하셨으니...(벧전 2:24)”
이것은 이사야53장 예언의 성취이다. 이 문맥에서 베드로는 십자가를 우리의 모범으로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동시에 그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죄를 담당한 자요 대속자로 기록해야했던 사실은 더욱 충격적이다.
 
 십자가야 말로 역사의 열매이며 그것이 시작한 구속의 열쇠이다. 과연 십자가는 우리의 삶의 중심인가. 사도들이 성경속에서 처절하게 고통당하고 순교당하면서 까지 외쳤던 십자가! 그 십자가가 정말 우리 안에 중심이 되어있는가 말이다. 이쯤 되면 이 책을 보는 우리는 다시한번 심오한 질문을 던져야하는 부담감을 갖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분은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가? 이 죽음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제 2장 그리스도는 왜 죽으셨는가?

그분은 왜 죽으셨는가? 이 죽음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저자는 말하기를 많은 사람들은 이 질문에 대해서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못하며, 그 질문에 대답하는데도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예수님은 죽은것이 아니라 죽임당한 것이며 중죄인처럼 공공연하게 처형되었다고 한다. 즉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는 혁명적인 사상가요 설교가로 비춰졌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혁명적인 행동가로 간주하기도 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자신과 아무 관련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정말 예수님은 왜 죽으셨는가? 겉보기에 그분은 범법자로 죽으셨다. 하지만 편협한 마음을 가진자들에 의한 제물로 죽으셨으며 또한 자신의 위대성으로 인한 순교자로서 죽으셨다. 이것이 마음에 깊이 와 닿는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숨죽이며 책장을 넘겨 봐야한다.

존 스토트는 복음서에서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사건과 가장 밀접하다고 생각되는 빌라도 유대총독,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끌도록 선동했던 유대백성과 제사장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로 팔아 넘겼던 배반자 가룟유다......즉 예수님의 죽음의 원인을 가장 밀접하게 제공했다고 생각되는 세 부류의 사람들에 초점을 맞추고 마치 중죄자를 잡아다가 취조하듯 하나하나 데려다가 분석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존 스토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당시 예수님의 십자가사건에 깊이 동조하였던 그들의 죄악된 행위를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까지 연결시키기에 이른다. 과연 우리의 죄악은 어떠한가? 지금의 우리는 과연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관련 없다할 수 있는가?

존 스토트는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이기”(히6:6)을 보이며 우리가 그리스도로부터 등을 돌릴 때마다 바로 우리가 십자가사건의 주동자임을 날카롭게 지적해 준다. 우리 역시 유다처럼 우리의 탐욕을 인하여, 제사장들처럼 우리의 시기를 인하여, 빌라도처럼 우리의 야망을 위하여 예수님을 희생시키는 것이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힐 때”라고 오래된 흑인영가는 묻고 있다. 우리는 “그렇다 우리는 거기에 있었다”고 대답해야 한다. 단순히 구경꾼으로 거기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음모를 품고, 계획을 세우고, 배반하고 흥정하고, 넘겨주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그 모든 일에 참여한 유죄의 가담자로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비록 예수님이 인간의 죄악에 의하여 죽음을 당하시긴 했지만, 그분이 순교자로 죽으신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도리어 그분은 자발적으로 심지어 의도적으로 십자가를 향해 나아 가셨다. 예수님의 공적인 사역의 시초부터 이 목표를 위하여 자신을 바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옥타비우스 윈슬로우는 매끈한 진술로 이것을 잘 요약했다. “누가 예수님을 죽음에 넘겨주었는가? 돈을 위하여 유다가 넘겨 준 것이 아니다. 두려움 때문에 빌라도가 넘겨 준 것도 아니다. 시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넘겨 준 것도 아니다. 바로 사랑을 인하여 성부께서 넘겨주신 것이다”

이 장의 마지막에서 이제 이장의 처음 부분에서 제시한 그 질문으로 돌아온다 예수 그리스도는 왜 죽으셨는가? 나의 첫 번째 대답은 그분은 죽으신 것이 아니라 죽음을 당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것과 정반대인 또 하나의 답을 제공해서 해답에 균형을 맞춰야겠다. 예수님은 죽음을 당하시지 않았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자신을 내주심으로써 죽으신 것이다.

제 3장 심층적 진리

우리는 이미 앞서서 십자가의 중요성과 그분의 지신 십자가의 고의성 이 두가지 사실에 대해 확정한바 있다. 그렇다면 이 심층적인 진리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또 다시 질문해 보지 않으면 안 되는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과연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어떤 중요성이 있기에, 그 끔찍함과 수치와 고통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러한 일을 미리 계획하시고 예수님은 그것은 당하기 위해 오셨는가 말이다.
이 질문에 대해 존 스토트는 네 단계로 제시해 준다.
 
첫째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둘째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고자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셋째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 넷째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죽음을 대신’ 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그분이 죽음으로써 획득하신 그 ‘유익’이 바로 우리의 구원이었다. 그것을 조달하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처리 하셔야 했다. 그리고 죄를 위하여 죽으신 그분의 죽음은 우리가 감당해야 할 죽음이다. 과연 이 사실로 하여금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확신하는가? 존 스토트는 예수님이 지상에서 지낸 마지막 스물네 시간 중에서 중요한 세 장면- 다락방, 겟세마네 동산 그리고 골고다라고 불리는 곳-을 살펴볼 필요성을 제시 한다. 특히 그는 우리에게 주의 만찬의 제정에 관하여,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고뇌’에 관하여, 그리고 십자가위에서의 ‘유기의 외침’에 관하여 묻고 싶은 충동을 느끼도록 유도 한다.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 떡과 포도주로 행하신 일과 그 행위에 대해 하신 말씀으로써 예수님은 자기의 죽음이 임하기 전에 미리 그 죽음을 가시적으로 극화시키셨으며 또한 그 죽음의 의미와 목적에 관하여 그 권위 있는 설명을 해주셨던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세 가지 교훈을 가르치셨다.

첫 번째 교훈은 예수님의 죽음의 중심성에 관한 것이다.- 그분의 죽음은 두 가지 요소로 그들에게 설명 되었다. 그 떡은 그들과 함께 식탁에 기대어 있는 그분의 살아있는 몸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포도주 역시 그분이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동안 그분의 정맥을 흐르고 있던 그 피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후에 죽음으로써 그들을 위하여 흘려질 그분의 피를 대표하는 것이었다. 그 증거는 반박의 여지가 없을 만큼 명백하다. 예수님이 자기의 죽음에 부여하신 중심적 중요성을 이것보다 더 명료하게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예수님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분의 죽음에 의하여 기억되기를 원하셨다. 그러므로 십자가 없는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안전한 일이다. 만약 십자가가 우리 종요의 중심이 아니라면 우리의 종교는 예수님의 종교가 아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그분의 죽음의 목적에 관하여 가르치셨다.- 바울과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 잔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은 그분의 ‘피’뿐만 아니라, 그분의 피와 연관된 ‘새언약’을 가리켰으며. 또한 마태는 한걸음 더 나가서 그분의 피는 ‘죄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흘려진 것이라고 첨가하셨다. 그분의 죽음 은 하나님이 지정하신 것이며, 그 죽음에 의하여 새언약은 사죄의 약속과 함께 확증 될 것이다 예수님은 그분의 백성을 하나님과의 새 언약의 관계로 이끌기 위하여 죽으려 하시는 것이다.

세 번째 교훈은 그분의 죽음을 각자가 개인적으로 전유해야할 필요에 관한 것이다.- 떡을 떼고 포도주를 따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들이 그것을 먹고 마셔야 했듯이, 그리스도께서 죽으시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그들 각자가 그분의 죽음의 유익을 자기의 것으로 전유해야 했다. 그것을 먹고 마시는 것은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여전히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우리의 구주로 받아들이며 또한 우리의 마음속에서 신앙에 의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아간다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비유행위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 들여야 한다. 주의 만찬은 하나님의 선물과 인간의 수락에 관한 영구적이고 가시적인 상징으로 남아 있다.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예하는 것으로 의도된 것이다.

이제 저자는 우리를 성만찬의 장소에서 겟세마네의 주님의 기도의 장소로 인도한다. 저자는 겟세마네의 깊은 고뇌에 찬주님의 기도에 집중한다. 왜 하나님이신 그분은 다른 순교자들의 당당한 죽음보다 왜 더 처절하게 슬퍼하며 고통스러워 하셨을까? 내 개인적인 견해에는 이렇다. 겟세마네의 동산에서의 고뇌하시는 주님을 보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죄를 미워하셨는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것인지 단편적으로 나에게 보여 주기에 충분했다. 저자 역시 나의 이런 견해에 깊이 동조하는 듯했다. 예수께서 고통스럽게 여기셨던 그 잔은 매질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에 대한 고통이나 멸시를 받아야하는 정신적 고통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였다. 도리어 그것은 온 세상의 죄를 짊어진다는 영적인 고뇌, 달리 말하자면 그 죄 위에 떨어지는 하나님의 심판을 견뎌야 한다는 영적인 고통인 것이다. 그러므로 죄에 대한 심판이 가져다 줄, 아버지로부터 소외되는 경험에 대하여 그분은 두려움을 느끼고 뒤로 물러나셨던 것이다.

이제 저자는 이야기 마지막부분으로 우리를 이끌어준다. 바로 잠잠한 양같이 끌려가신 골고다 곧 십자가의 위에서의 사건이다. 십자가는 세가지 진리- 우리 자신에 관한 진리, 하나님에 관한 진리,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를 강하게 보여준다,

첫째 우리의 죄는 지극히 무서운 것임에 분명하다. 십자가만큼 우리의 죄의 심각성을 잘 드러내 주는 것은 없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유다의 탐욕이나 제사장들의 시기 혹은 빌라도의 우유부단한 비겁함 때문이 아니었다 도리어 우리자신의 탐욕 시기 비겁함 그리고 다른 죄악들이며, 이것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사랑과 자비로 그 심판을 담당하고 그것을 없이 하기로 작정하신 결단이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할 때, 자신이 완전무결하다고 여겨 우리자신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둘째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할 만큼 놀라운 것임이 분명하다. 하나님은 우리를 우리의 운명속에 그대로 내버려 두실수도 있었다 만약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정당한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악행의 열매를 거두며 그리하여 죄악 속에서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실수도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되어 마땅하다. 골고다... 그곳에서 그분은 우리의 죄, 죄책, 심판 그리고 죽음을 담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행동은 사랑이상의 그 무엇이다. 그것을 표시하는 바른 명칭은 은혜인데 이것은 받을 자격이 없는 대상에게 베푸는 사랑이다.

셋째로, 그리스도의 구원은 값없이 주시는 선물임이 분명하다. 그분은 자기 자신이 생명의 피라는 높은 값을 치르고 우리를 위하여 구원을 사셨다. 값없이 주시는 구원의 근거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동시에 거룩한 삶을 살게 하는 가장 강력한 자극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존 스토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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