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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한 기대 (삶)/책과 삶

존스토트의 그리스도의 십자가(IVP)를 읽고 2부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09. 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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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부 십자가의 핵심

제4장 사죄의 문제

이장은 먼저 과연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없는 것인가? 를 묻고 있다 이에 대해 존 스토트는 십자가를 생각하기 이전에 우리의 상태 즉 “죄의 심각성”을 먼저 인식해야할 필요성을 이야기해준다. 그리고 나서 “인간의 도덕적 책임” 그리고 죄에 대한 “인간의 거짓된 죄책과 참된 죄책” 마지막으로 심각한 우리의 죄가 과연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의미인가를 “하나님의 거룩과 진노” 부분에서 깊이 다루어 준다.

죄의 심각성- 물론 그리스도인으로써 십자가를 바라보며 자신의 죄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고민해 보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니 생각해 보지 않았다면 그가 과연 자신이 그리스도인인지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정도로 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는 앞에서 충분히 다루었다. 그러나 굳이 존 스토트가 여기서 죄의 부분을 다룬 것은 우리가 과연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만 의존해야 사죄의 문제가 해결되는가? 에 대한 심각한 문제의식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에 대해 존 스토트는 날카롭게 죄의 심각성에 대해 지적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먼저 죄에 대해 개념을 정의해주고 시작한다. 죄란 무엇인가? 신약성경은 죄를 표시하는데 다섯 개의 헬라어 단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이것을 함께 모아 놓고 생각해 보면 죄의 수동적이거나 능동적인 여러 측면이 나타난다.

가장 자주 쓰이는 단어가 ‘하마르티아’인데 이 말은 죄를 표적에서 빗나간것, 목적지에 이르지 못한 것으로 묘사한다. ‘아디키아’는 ‘불의’ 혹은 ‘부정’이라는 의미이고 ‘포네리아’는 사악하거나 부패한 종류의 악을 가리킨다. 좀 더 능동적인 단어로는 ‘파라바시스’ 이말은 ‘침입’ 혹은 ‘침해’ 즉 일정한 한계를 넘어가는 것을 가르킨다. ‘아노미아’라는 또 하나의 단어는 ‘무법’ 즉 일정한 법을 무시하거나 어기는 것을 가리킨다. 죄를 범한다는 것은 불법을 행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권위와 사랑을 거스르는 것일 뿐만아니라, 우리 자신의 가장 큰 안녕을 거슬려 행하는 것이기도 하다. 죄는 전통적 표준에서 그저 유감스럽게 탈선한 정도가 아니다. 죄의 본질은 바로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으로 하나님께 대한 적극적인 반항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인간의 도덕적 책임- 어떤 사람이 불법 행위를 저질렀을 때 그를 비난하는 것은 공정한 일인가? 우리는 참으로 우리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하는가? 이것에 대해 존 스토트는 참으로 인간의 극한 상황을 잘 표현 했는데, “우리는 온갖 속죄양을 준비하고 있다” 개인의 책임이라는 전통적 개념을 침식하기 위해서 시도하는 인간의 노력들을 이와 같이 표현 한듯 싶다. 이것에 대해 스키너 교수의 책 「자유와 존엄을 넘어서」보다 그 노력들에 대한 포괄적인 시도는 없었을 것이다. 그의 주제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우리가 당면하는 위협적인 문제들’은 ‘인간을 다루는 기술’에 의하여 전부 해결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 행동의 거대한 변화’가 환경에 의하여 확보 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은 바르게 행동하도록 조작될 수 있다 그러면 무엇이 장애물인가? 자율적인 인간의 개념 인간의 가정된 ‘자유’(인간이 자기 행동에 개하여 책임을 진다는 점에서)그리고 가정된 ‘존엄성’(인간에게는 그의 업적에 따른 공로가 주어진다는 점에서)이 바로 장애물이라고 그는 답한다. 하지만 인간의 정신은 그것에 대항한다. 성경은 우리가 물려받은 성질 곧 우리가 ‘아담 안에서’ 가지는 성질의 영향력을 매우 강조한다. 원죄의 교리가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물려받은 본성 자체가 자기중심성으로 인해 오염되고 뒤틀려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악한 생각과 행동이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온다고 가르치셨다(막7:21~23)

참된 죄책과 거짓된 죄책- 만약 인간들이 죄를 범해 오고 있다면, 또한 만약 그들의 죄에 대한 책임이 그들에게 있다면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죄책이 있다는 것이다. 죄책이란 죄와 책임이라는 전제로부터 논리적으로 추론된 결과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실책으로 인하여 죄를 범했으며 따라서 우리의 악행에 해당하는 형벌을 받아야 한다. 인간의 책임을 완전히 인정하고 그리하여 인가의 죄책을 완전히 시인하는 것은 인간 존재의 존엄성을 감소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동물과 달리 도덕적인 책임을 지는 존재로서,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고 자기가 무엇이 될 수 있었으며 어떻게 되어야 했음을 알고 또한 그 기준에 형편없이 못 미치는 실상에 대하여 변명을 하지 않는 존재라는 사실이 전제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에 대하여 “그의 행동에 대하여 책임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그의 품위를 실추 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존재라는 사실은 우리의 인간됨의 영광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와 잘못을 시인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그분의 구원의 즐거움에 들어가며 그리하여 더욱 완전히 인간적이며 건강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고백과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이끌지도 않고 그리하여 사죄로 인도하지도 않으면서 죄에 빠져드는 온갖 탐닉이야 말로 불건전하다. 이러한 이유로 그 형벌을 받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으로 취급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과 진노-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반항으로서 죄의 심각성을 생각했으며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인간의 계속적인 책임을 살펴보았다. 또한 그들이 결국은 하나님 보시기에 죄를 범하는 것이며 따라서 형벌을 받아야 할 위치에 있음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악에 대해 ‘형벌’하시거나 ‘심판’하시는 분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 그렇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고 또한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 실로 십자가의 본질적인 배경은 인가의 죄 책임 죄책 뿐 만아니라 이런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반응 곧 그분의 거룩과 진노도 포함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사실은 성경적 종교의 기초이다.
 따라서 죄가 하나님의 거룩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결론이다. 그분의 눈은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보지 못하신다” 하나님의 거룩에 밀접하게 연결된 것이 그분의 진노인데 사실이것은 악에 대한 그분의 거룩한 대응이다. 거룩에 대한 성경의 개념과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성경의 개념에 공통적인 것은 이 둘이 죄와 병존할수 없다는 진리다. 하나님의 거룩은 죄를 폭로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는 죄를 대적한다.
 따라서 죄는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으며 하나님은 죄를 용납하실 수 없다. 우리는 이런 죄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과 진노를 이해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과 그 은혜를 이해할 수가 없을것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에 대해서는 낯설게 느껴진다. 단지 그분은 부드럽고 친절하신 분이시며 친절하고 융통성 있는 존재뿐이다. 우리는 눈을 멀게하는 하나님의 거룩의 영광을 우리가 일별하였을 때, 또한 성령에 의하여 우리의 죄를 깊이 느낀 나머지 하나님 앞에서 떨며 우리가 지옥에 떨어져 마땅한 죄인들임을 인정할 때 그때에만 오직 그때에만 우리는 십자가의 필요를 깊이 깨닫고 이전에 우리가 십자가의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에 대하여 경악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본질적인 배경은 죄의 심각성과 하나님의 엄위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다. 만약 우리가 둘 중 하나라도 축소시킨다면 우리는 그로 말미암아 십자가를 축소시킨 것이다. 만약 우리가 죄를 반항이 아니라 실수로 해석하고 하나님을 분노하시는 분이 아니라 관대하신 분으로 해석한다면 자연히 십자가는 불필요한 것으로 나타난다.

제 5장 죄에 대해서 만족시키심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죄인을 용서하실 수 있기 전에 먼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다섯가지로 표형 했다. 어떤 사람은 마귀의 요구를 ‘만족시킴’으로 마귀를 전복시킨다고 말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 명예 혹은 공의를 ‘만족시키는 것’을 말하였고 마지막으로는 ‘세상의 도덕 질서’를 만족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만족되어야 할 존재는 하나님자신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모든 생각과 요구가 완전하시기 때문에 자제력이나 겸손의 결핍같은 것이 없다. 그분이 ‘그분 자신을 만족 시키셔야 한다’는 말의 의미는 그분은 그분 자신이셔야 하며, 또한 그분의 속성 혹은 이름의 완전성에 따라서 행동 하셔야 한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서 만족의 필요성은 그분 외부의 어떤것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 자신 속에서 그분의 불가면적인 성격 속에서 발견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속죄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죄인을 용서하시고 그들을 자신과 화목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택하시는 방법이 무엇보다도 먼저 그자신의 성품과 완전히 일치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만족 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철저히 우리 인간들의 상황에 깊이 질문해 보기를 원한다. 하나님은 어떻게 그분의 거룩한 사랑을 만족 시키시는가 말이다. 어떻게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면서 동시에 자신을 만족시키실 수 있는가? 바로 이것이 이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바로 희생-정말 대신하여-하셨다는 것이다.

제 6장 하나님의 자기희생

이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정확하게 누가 우리의 대속자였는가?
이 질문에 대해 저자는 구약의 제사와 유월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역할(심판자로서, 구원자로서, 언약의 하나님으로서)과 신약(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그리스도)에서 무죄한 자가 ‘우리를 위하여 죄로 여김’을 당했는데 이는 분명히 그분이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죄의 형벌을 담당하셨음을 의미한다고 밝히며 우리의 불순종 때문에 우리 위에 놓여 있던 저주가 그분께로 옮겨 감으로써 그분이 우리 대신 그 저주를 담당하셨다는 의미임이 분명하다고 말해주고 있다. 그러면 계속해서 정말 그분이 우리의 형벌을 지고서 우리의 죽음을 죽은 것인가 라는 것이다. 분명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롬5:8).이것이 간단한 표면적인 대답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리스도는 누구였는가? 우리는 그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즉 이 질문을 쉽게 생각해 보면 그분이 과연 우리의 죄를 담당할 조건이 되는가? 라는 질문이라고 보면 된다. 이에 대해 존 스토트는 세가지 대속자로서 신분을 조사해준다.
첫 번째 제안은 그 대속자가
인간 그리스도 예수라는 것이다.
두 번째 제안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죽으셨다. 그러나 이것에 대해 존 스토트는 십자가위에서 우리를 대신하고 우리의 욱음을 죽으신 우리의 대속자는 단지 그리스도도 아니고 (만약 그리스도인만이라고 한다면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제삼자가 될 것이므로) 또한 단지 하나님도 아니다 (만약 하나님만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역사적인 성육신을 훼손시킬 것이므로)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 곧 참되고 완전한 의미에서 동시에 신이시면서 인간이신 분 또한 그 이유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을 모두 대표하면서 또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중보하는 독특한 자격을 가지신 그분인 것이다.
 성경의 속죄의 복음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대신 희생시킴으로써 자신을 만족 시키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므로 대속의 개념은 죄와 구원의 핵심을 차지한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되의 본질은 자기 자신으로 하나님을 대신한 인간에게 있으며 구원의 본질은 인간을 위해 인간을 대신하신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항하여 자기를 주장하면서 오직 하나님께만 해당되는 해당하게 되는 자리에 자기를 올려놓는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시키시고 오직 인간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자신을 두신다. 인간은 오직하나님께만 속한 특권을 주장하고, 하나님은 오직 인간에게만 속한 형벌을 받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대속자는 오직 인간이 되신 그리스도안의 하나님만이 인간이 되신 성부하나님의 독생자이신 그분만이 우리를 대신 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이 우리의 대속자가 되신 이상 우리는 우리의 발가벗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우리를 대신해서 그 더러운 누더기를 입으신 것을 보고 그분이 그분의 의의 옷으로 우리에게 입혀 주시도록 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존 스토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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