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얼마나 절망해야 혁명을 꿈꾸게 되는가. 삼봉 정도전을 주인공으로 장편을 쓸 때 품었던 질문이다. 태어나자마자 혁명을 꿈꾸는 이는 없다.
그 사회의 법과 제도 안에서 교육을 받고 취직을 하며 꿈을 펼치고자 노력한다. 그러다가 난관에 봉착하며 실패하고 좌절한다.
추락을 거듭하며 절망이 바닥을 친 후 도저히 이 사회에서 희망을 찾기는 어렵겠다고 확신하는 순간, 인간은 혁명을 꿈꾸게 된다.
정도전도 홍경래도 전봉준도 지옥 같은 나날을 통과하고 나서 비로소 혁명가가 되었다.
내가 혁명가의 빛나는 이상과 치밀한 논리와 용맹한 자세보다 절망의 두께에 천착하는 이유다.
<중략>
감히 말하자면 지금 우리 사회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회생하기 위해선, 섣불리 답을 내놓기보단 절망의 두께를 재는 것부터 필요하다.
불편하고 부끄럽고 아프더라도, 절망이 켜켜이 쌓인 과정과 그동안 제대로 살피지 못한 이유를 공공의 영역에서 가감 없이 적나라하게 확인해야 한다.
민의를 따른다는 정치가들이 진지하게 가늠할 것이 절망의 두께 외에 무엇이겠는가.
김탁환, "얼마나 절망해야 혁명을 꿈꾸게 되는가 "<한겨레 2024.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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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생을 위해서는 '절망의 두께'를 재는 것 부터 필요하다. 동감한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부흥을 부르짖는다.
복음 전도의 열정을 다시 회복하자고 말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다.
위의 칼럼의 말대로 '절망의 두께'를 재는 것이 필요하다.
예수께서 변화산에서 내려오시자 마자 마주한 귀신들린 아이..... 심한 경련으로 귀신에 사로잡힌 그 아이를 만나신다. 제자들도 못고친 그아이, 절망속에 있는 아이의 아비를 만나신다. 예수께서 그 아비에게 물으신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막 9:21)
왜 예수께서는 그 아이가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는 지 물으신 것일까? 그 아이의 삶속에 형성된 절망의 두께를 재고 계신것아닐까? 그 아비의 마음속에 쌓여진 절망의 두께를 재고 계신것 아닐까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무레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막 9:22)
아이의 아비는 예수앞에서 절망의 두께를 마주 대한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회복을 위해서는 절망의 상태를 적나라 하게 확인하는 작업, 대면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교회의 부흥은 절망의 두께를 재는 것에서 부터 시작된다. 전도가 먼저가 아니다. 절망의 두께를 확인하는 작업이 먼저다.
절망은 곧 하나님을 향한 시선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2024.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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