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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한 기대 (삶)/신뢰의 길

순교(殉敎)와 하나님의 영광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18.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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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글로버(Robert Glover 1555년에 화형당한 영국 개신교 순교자)가 천국의 기쁨에 휩싸여 "그분께서 오셨다. 그분께서 오셨다." 하고 소리치던 때는 언제였습니까?

순교자 열전 Book of Martyrs 에 그에 관한 기록이 나오는데 그는 무려 다섯해 동안이나 두려움과 고통속에서 지쳐갔다고 합니다. 그는 먹을수도 잘수도 없었고 자칫 신앙을 버리고 배교 할까 두려워 극심한 영혼의 고통을 격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죽으면 반드시 지옥에 떨어지리라 생각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지옥도 자신의 형편만큼 절망스럽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국 이 기나긴 시련의 시간이 지나자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그를 위로하며 맞아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오신 때가 언제였습니까? 화형장의 말둑이 눈앞에 보이던 바로 그대 손뼉을 치며 외쳤습니다. "그분께서 오셨다. 그분께서 오셨다." 이와 같이 자비의 보고 이신 하나님께서는 가장 깊은 위로를 남겨두셨다가 성도들이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베풀어 주셨습니다. 가장 깊은 위로로 가장 극심한 고통을 최적의 비율로 완화해 주셨습니다.  

- William Bridge, A Ltting up for the Downcast,김동완역, 회복,(서울:복있는 사람),97-8.에서 성도는 절대로 절망하지 않는다는 부분에서 존 폭스의 글을 인용함. 


맞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뵈옵는 것은 신앙을 지키려는 몸부림 그 몸부림 속에서 이다.
그 고통의 깊이가 깊을수록 하나님의 위로는 깊고도 크다.
최악의 고통으로 들어가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보이심으로 우리에게 그 고통을 이길 만한 또는 그 고통을 최적의 비율로 완화해주실만한 위로를 우리에게 베풀어주신다. 

그런의미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삶은 곧 순교의 삶일지도 모른다.
스데반이 하나님의 영광을 본 순간은 다름아니라 돌이 날라드는 순간이었다. 

나는 날마다 그의 영광을 구한다. 그러나 좀처럼 순교적 삶을 살고 있지 못한다.

오늘날 순교는 무엇일까?   

순교(殉敎) : 모든
 압박과 박해를 물리치고 자기가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넓은 뜻으로는주의나 사상을 위하여 죽는 경우에도 쓴다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데 있어서 압박과 박해가 없다면,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는 삶이 없다면 우리에겐 순교란 없는 것이다.  
우리네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좀처럼 체험하기 쉽지 않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의 영광의 순교의 삶과 깊은 연관이 있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 같다. 순교의 삶을 살지 않으니 그 영광도 누리지 못하는 것 말이다. 복음을 위해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복음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삶을 정말 산다고 할수 있을까? 


순교라는 주제보다는 내안에 가장 현실감있게 찔리는 것이 바로 몸부림이다. 

신앙을 위한 몸부림, 말씀 대로 살기 위한 치열함, 그 고통의 깊이가 길수록 하나님의 위로는 깊고도 크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순교자들이 그 몸부림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듯이 말이다. 

나는 그 몸부림이 있는가? 그 치열함이 있는가? 

내가 세운 원칙이라는 것들도 때때로 관계속에서 고난속에서 적절히 타협된다. 복음도 신앙도 때때로 타협거리가 된다. 그러니 하나님의 위로는 내게 없다. 몸부림이 없으니 내 삶의 방식을 내가 적절히 완화하니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통 완화제가 따로 필요없다. 이러한 내 삶속엔 엔학고레의 하나님, 브엘라헤로이의 하나님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원칙, 믿음과 신앙을 위한 삶의 기준들. 복음과 그 나라를 위한 열심들 몸부림..... 이런 것들이 내 삶에 있는가? 그것을 진지하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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