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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한 기대 (삶)/신뢰의 길

[서울 주말나들이 추천] 덕수궁을 다녀와서 |덕수궁에서 시청앞 맛집 오향족발집까지 |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23. 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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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마지막 날 덕수궁으로 향했다.

지하철로 이동을 하여 시청에 하차를 한 뒤 설렘을 안고 덕수궁으로 향했다.


오후 2시 마침 수문장 교대식 행사가 있었다.

경쾌한 행렬 악기 소리와 함께 수문장 교대식이 이뤄졌다. 지나가는 행인들 외국인 관광객들도 모여 흥미로운 듯 지켜보았다.

수문장 교대식의 중점은 피아의 식별 그리고 인수인계가 되겠다. 사실 굉장히 무겁고 진지하게 이루어져야 하는 작업이다. 그리고 다음 교대자가 올 때까지 굳건하게 지켜야 한다. 관광 행사가 되어버린 교대식이지만 진지했고 색다른 긴장이 느껴졌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건 덕수궁이 고종 황제가 즉위하고 대한 제국이 선포된 곳이라면 수문장 교대식도 현대식으로 바뀔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굉장히 근대적인 모습의 행사였다. 물론 외국 관광객들에겐 흥미롭게 보일 것 같지만…^^

수문장 교대식 행사를 뒤로하고 덕수궁의 대한문으로 들어갔다.

마침 다둥이 카드를 소지한 우리 가족은 무료로 입장이 가능했다. 들어가서 궁궐 해설사님께 해설을 부탁했다. 덕수궁은 순조가 임진왜란 때 몽진을 떠난 후 궁궐이 불에 타자 월산대군의 후손들이 살던 정릉동 행궁을 임시 거처로 살았고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그곳을 경운궁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금천교 입구에 한 비석이 세워있었다. 그 비석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가 새겨있었다. ‘누구든지 다 말에서 내리라’는 뜻의 하마비(下馬碑)이다.


대한문으로 들어가면 금천교가 나온다. 해설사께서 덧붙이시기를 저 다리가 일종의 경계선과 같단다. 즉 금천교를 넘어오는 모든 이들은 가마에서 내려서 걸어와야 한다. 왜냐하면 다리를 경계로 왕이 사는 곳과 백성들이 사는 곳이 나누어지기 때문이다. 금천교와 같은 다리는 절과 같은 곳에도 있다. 다리를 경계로 부처님이 사는 곳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구분 짓는 것이다. 금천교 입구에 한 비석이 세워있었다. 그 비석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가 새겨있었다. ‘누구든지 다 말에서 내리라’는 뜻의 하마비(下馬碑)이다. 이것은 사실 궁궐밖에 있던 것인데 대한문 안쪽으로 들어와 있었다. 아마 학자 중에 금천교를 건너기 전에 왕이 사는 곳으로 들어왔으니 말에서 내려 걸어라라는 의미를 생각에 그곳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 이가 있었던 것 같다. 이유야 어떻든 그곳에 있는 비석이 초라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사명을 다하는 듯 보였다.

광명문이라는 현판에 새겨진 이름을 보니 밝은 빛이 저곳을 통해 들어온다. 혹은 밝은 빛이 임하길 염원하는 뜻 일 것이다.


이렇게 금천교를 지나 들어오면 이상한 느낌의 문이 보인다.
광명문이다. 광명문이라는 현판에 새겨진 이름을 보니 밝은 빛이 저곳을 통해 들어온다. 혹은 밝은 빛이 임하길 염원하는 뜻 일 것이다. 이상한 느낌의 문이라고 표현한 것은 다름 아니라 그 위치 때문이다.

덩그러니 궁 중앙에 있고 주변에 담장이 없이 문만 있었다. 사실 덕수궁도 창경원과 마찬가지로 일제가 1930년 박물관처럼 운영하였다. 처음에는 이 광명문을 다른 곳에 두어 자격루 등을 두어 전시실처럼 운영했다. 일제는 조선의 역사를 말살하고 조선왕조 400년의 역사를 지우기 위한 시도를 했던 것 같다. 이후 학자들은 2018년 이곳으로 다시 옮겨놨다고 한다. 즉 80년 만에 제자리로 온 셈이다. 1904년 화재 때 많은 건물들이 불에 소실된 터라 이곳에 굳건하게 남은 광명문이 대견하면서도 가슴 아픈 역사이기에 우리에게 무엇인가 말을 건네는 듯 보인다. 때로는 남아있다는 말의 무게를 느낄 때가 있다.

남아 있는 것은 역사적 사명을 부여받기 때문이다. 고통의 시간들을 버티고 남아있는 것이든, 영광스럽고 찬란했던 소위 전성기의 시간을 보내고 남아있는 것이든 남아있는 모든 것들은 새로운 세대에 그 자릴 지켜야 할 그리고 전수해야 할 무거운 사명을 가지게 된다. 여기 덕수궁을 보기 위에 찾아온 모든 이들은 사실상 남아있는 자들이다.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도…

광명문을 넘어 들어가면 고종의 침소였으며 승하한 장소인 함년전이 나온다.


광명문을 넘어 들어가면 고종의 침소였으며 승하한 장소인 함년전이 나온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은 갑작스럽게 승하하신다. 이후 1919년 2.8 독립선언서를 기틀로 삼아 3.1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함녕전은 왕의 평안함과 백성들의 평안함을 기원하는 곳인데 1094년 대화재로 소실되어 다시 짓고 1938년 일제에 의해 관광지로 변한다.

함녕전 옆에는 외국 사신들을 접대할 목적 그리고 황제를 알현하는 곳으로 세워진 덕홍전이 있다. 덕홍전 내부에는 접견실답게 샹들리에가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대한 제국의 황실을 상징하는 오얏꽃 문장이 있다. 덕홍전을 보면서 이 시대를 그대로 반영했다고 느껴졌다. 외관은 전통식으로 내관은 서양식으로 꾸며놓았던 것이다. 대한 제국은 겉으로 보기엔 전통이 그대로 유지되어 있는 듯 보이나 그 내부는 서양과 제국의 방식을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어쩌면 건축이라는 것은 그시대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건축의 방식과 모습을 보면서 시대를 읽을 수 있다. 교회 건축도 마찬가지다. 시대를 반영한 건축은 분명 중요하다.덕홍전의 모습은 당시 시대를 그대로 엿볼 수 있다.  

덕홍전에서 좀 더 위쪽으로 올라가면 외교와 사신들을 접대했던 정관헌이 보인다. 이곳에서 고종황제가 즐겨 마셨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커피 문화가 있었을 것이다. 해설사에 따르면 커피를 일컫는 가베는 사실 일본식 이름이고 원래 불리던 이름이 있었다. 서양인들이 마시는 탕 이라고 해서 양탕국이라고 했단다. 찾아보니 카페를 양탕국 이라고 지은 곳이 많다.

이곳은 선조가 임진왜란이 끝나고 궁궐이 불에 타 임시로 거처했던 곳이다. 추정하기로는 1608년 선조가 이곳에서 승하하셨다고 한다.


그곳을 지나  문을 통과하여 지나가면 석어당이 나온다. 석어당은 궁궐의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다. 이곳은 선조가 임진왜란이 끝나고 궁궐이 불에 타 임시로 거처했던 곳이다. 추정하기로는 1608년 선조가 이곳에서 승하하셨다고 한다. 석어당은 중층으로 된 목조 건물이다. 선조는 월산대군의 후손들이 살던 곳을 임시 거처로 거주하여 정릉동 행궁으로 삼았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따뜻한 온돌시스템 및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이 순환하도록 설계되었다.

그 뒤쪽으로 놓여있는 건물은 즉조당과 준명당이다.


그 뒤쪽으로 놓여있는 건물은 즉조당과 준명당이다. 즉조당은 조선 왕가에서 굉장히 중요한 건물이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후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실권을 잡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문은 끝이 난다. 중국도 역시 명나라가 청나라에 의해 멸망당한다. 그러나 조선은 왕가의 전통을 이어간다. 즉조당은 그런 의미에서 조선의 왕가 전통이 이어지는 곳이라 여겨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광해군 및 인조도 이곳에서 즉위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따로 이곳만 계단을 세 곳으로 그리고 건물의 높이를 약간 높였다.

그 옆으로 쭈욱 이어지는 건물은 즉명당이다

즉명당은 고종이 60이 넘어 얻은 덕혜옹주를 위한 유치원 공간이다. 딸이 놀다가 다치지 않도록 난간을 만든 흔적이 있다.  덕혜옹주의 일생은 이미 책으로 그리고 영화로 다루어졌다. 일본으로 강제 유학행에 올라 일본인과 결혼하여 정신병으로 입원하는 등 한나라의 왕실 그리고 비극 이야기는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즉명당은 고종이 60이 넘어 얻은 덕혜옹주를 위한 유치원 공간이다. 딸이 놀다가 다치지 않도록 난간을 만든 흔적이 있다.


무겁지만 조금 더 걸어가 본다. 이제 덕수궁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중화전이다. 궁궐은 왕 과 왕비가 사는 곳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곳에서 정치가 이루어진다. 외교가 이루어진다. 그러니 이곳은 그 자체로 신성한 곳이다. 그런데 이때 지도자가 좌우에 치우친다든지, 한쪽으로 편중되면 안 된다. 중용이 중요하다. 조선은 유교와 성리학으로 기틀을 잡고 세운 나라다. 왕의 중앙집권을 경계하기 위해서 대소 관료와 신하들을 세웠고 나라의 일들을 의논하고 협치를 이루었다. 그러나 대체로 세도정치라든지 외세나 친인척에 의해서 나라는 많이 힘들었다. 그것을 염두에 두어 나랏일을 할 때는 좌우에 편중됨 없이 오롯이 균형을 이룬다는 의미로 중화문이 굳건하게 서있다. 그리고 이곳은 드나드는 임금뿐 아니라 문부 백관 조정의 신료들은 편중됨 없이 나라를 바로 세워가기를 다짐했을 것이다.  

지금의 중화문은 그 모습이 애처롭다. 중화문 주변으로 행각과 전각은 사라져 대문만 존재한다. 일제는 이곳의 위엄과 상징성을 사라지게 할 목적으로 주변을 정원으로 꾸며놓았다.  

중화문을 지나면 중화전이 나온다. 여기에서 ‘전’ 이란 높은 분이 거하는 곳이다.


중화문을 지나면 중화전이 나온다. 여기에서 ‘전’ 이란 높은 분이 거하는 곳이다.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은 성전이라고 하듯, 불교의 부처가 거하는 곳을 대웅전이라고 한다. 이곳 덕수궁에서 정사를 논하는 왕이 거하는 곳 이곳을 중화전 이라고 한다. 중화전은 사실 1902년 지었을 때 중층이었다. 1904년 대화재를 겪고 1905년 다시 지으면서 단층으로 축소되었다. 문무백관들이 줄을 지어 서있던 품계 석을 지나면 정화전의 외부와 내부를 좀 더 가깝게 볼 수 있다.

중화전의 지붕은 고풍스러움을 나타내는 팔자형으로 되어있고 화마를 물리친다는 의미에서 삼장법사와 그의 제자들을 지붕 위에 올려두었다.

중화전의 모습은 경북궁의 근정전 및 다른 궁궐과는 다르다. 황금색으로 문을 칠했다. 이곳은 황제가 거하는 곳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실내에는 어좌와 더불어 일월오봉도 가 있고 단청은 빛을 발했지만 천정 한가운데 두 마리의 황금색 용을 볼 수 있었다.

이곳 덕수궁에 왕이 머물기 시작한 것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잠시 머물렀다가 경복궁과 창경궁보다는 아무래도 공사관이 주변에 있는 이곳이 안전하다고 느껴서였다. 1897년 고종은 조선을 대한 제국으로 명하고 자신은 황제로 즉위하게 된다. 이 중요한 의식은 덕수궁 맞은편 조선호텔 주차장 가는 길에 위치한 환구단에서 일어나며 대한 제국은 외세에 의존하지 않은 강한 나라가 되길 바랐다.

환구단은 그런 염원이 담긴 상징과 같은 곳이다. 황제는 이곳에서 날마다 제사를 지낸다. 그러나 1911년 일제는 이곳을 조선총독부로 이관하고, 환구단을 철거하고 철도호텔을 건설한다. 대한 제국의 상징을 없앨 정치적 선택이었다. 제사를 위해 황제가 머물렀던 어재실은 아리랑하우스로 개명되어 연회 장소로 활용되었다. 1967년 철도호텔 자리에 웨스틴 조선호텔이 착공되면서 환구단의 모습은 축조되거나 방치되었다. 환구단의 정문도 2009년 42년이 되어서야 덕수궁 맞은편인 이곳에 다시 위치하게 되었다.

환구단에서 대한 제국을 선포한 이후 중화전은 황제가 거주하는 곳이 된다. 그러니 문은 황금색으로 천정은 황제를 상징하는 용으로 바꾼다,  



1904년 대화재가 큰 두려움이 되어서 일까 드르 라는 생소한 도구도 보인다. 방화 및 화재에 대비하여 물을 놓는 큰 통이지만 사실 화마가 물속에 비췬 자기의 무서운 얼굴을 보고 도망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놓은 것이다. 목조건물이라 불에 취약하다. 서양의 신전들은 수천 년이 지나도 여전히 남아있다 하지만 동양의 건물들은 대부분이 목조 건물이라 전쟁이라도 나거나 민중 봉기라도 일어나면 불로 인해 소실된다. 대부분의 우리 눈에 보이는 역사적인 건축들은 다시 지은 것들이다. 우리나라의 역사적인 목조 건물들을 보면 선조들의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고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다. 고풍스럽다. 그리고 당시 유교와 성리학의 기반으로 그 정신이 그대로 녹아있다. 실제로 궁궐의 모든 이름은 성리학적인 개념을 그대로 사용했다고 하니 말이다.

하지만 화재에 취약하니 우리가 문화재를 잘 돌보기 위해서는 각별히 조심해야겠다.

전쟁은 인간의 이기심으로 일어난다. 인간의 이기심은 문화가 말살되고 역사를 왜곡시킨다. 심지어 우리는 현대를 전쟁하듯이 살아간다. 그러다 보니 우리의 문화는 점차 우리의 역사는 점차 사라지고 없다. 박물관과 궁궐은 한적할수록 좋고 어두울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네 삶을 돌아보게 하기 때문이다. 역사를 의식하고 문화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덕수궁은 한적하거나 어둡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덕수궁의 아픔을 느끼게 하는 것 같다.


덕수궁을 나와 돌담길을 걸었다
쭈욱 걸어가다보면
정동제일교회와 배제학당을 만난다. 정동제일교회와 배제학당은 우리나라의 근현대사 그자체이다. 특별히 최초의 선교사인 아펜젤러를 만날수 있다. 그의 근대식 교육의 시작은 공부하러온 높은 신분의 자제들이 종을 데리고 다니지 않는 것 이었다고 한다. 신분을 초월하고 경계를 허문 그리스도의 정신이 그대로 녹아있다.

시간이 되고 체력이 되면 쭈욱 둘러보면 좋겠지만
오후 4시가 되니 슬슬 지치기 시작했고 박물관 문도 닫기 직전이었다. 다음에 천천히 둘러보기로 하고 밖을 나왔다. 마침 저녁식사때가 되어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미슐랭 맛집으로 알려진 만족오향족발집으로 향했다. 만족오향족발집 소문대로 맛있었다. 쫀득하면서도 부드러웠다.


만족오향족발 시청점
서울 중구 서소문로 134-7
https://naver.me/xWNiFNN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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