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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성지순례 기행

[튀르키예 여행/ 성지순례 여행] 서머나, 죽도록 충성하라.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19.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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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함께 걸었네 - YES24

흥미로운 여행기를 토대로 성경의 배경과 교회사를 이해하고 인문 고전의 깊은 상상력까지 풍부하게 더할 수 있는 책이 나왔다. 역사신학을 전공한 함신주 목사가 코로나19로 세계 여행의 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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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계2:9)

성 폴리캅 기념교회 모습.

버스를 타고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도시를 바라보며 한참 말씀을 묵상하는데, 도착한 곳이 바로 폴리캅(폴리카르푸스) 순교 기념교회였다. 버스에서 내려 한참을 걸었다. 수많은 고층빌딩들 속에 성 폴리캅 순교기념교회가 있다.
현재 이곳은 가톨릭 교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내부로 들어갔다. 천정에 폴리캅의 순교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놓았다. 뿐만아니라 좌우에 성인들을 위한 제단도 갖추어져 있었다. 순교기념교회는 굉장히 화려했다.

순교 장면과 천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폴리캅

서머나교회는 폴리캅이라는 순교자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이 적절할 것같다.
교회사(敎會史)에서 폴리캅은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교회사가 필립샤프는 폴리캅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폴리카르푸스(폴리캅)은 사도요한에게 배우고 그를 곁에서 모신 사람으로서, 서머나 교회의 수석 장로였다. 지금도 그곳에는 그의 무덤임을 알리는 평범한 돌비석이 서있다. 폴리카르푸스(폴리캅)은 리옹의 이레나이우스를 가르친 스승이었으며 그런점에서 사도시대와 속사도 시대를 잇는 가교같은 인물이었다."

그리고 와딩턴(Waddington)은 폴리캅의 순교는 스타티우스 쿠아드라투스(Statius Quadratus)가 소아시아 총독이던 155년 2월23일에 발생한 것으로 밝히고 있다.

그의 순교이야기는 설교단상에서 익히 들었을 것이다.

".......폴리카르푸스(폴리캅)은 총독앞에서 자신의 왕이시며 구주이신 분을 부정하기를 끝내 거부했다. 자신이 여든 여섯의 세월을 섬기는 동안 오직 사랑과 긍휼만을 베푸신 그분을 부정할수 없다고 하였다. 기쁘게 화형대에 올라간 그는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자신을 "순교자들의 반열에 서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고난의 잔을 마시게하시고 성령안에서 썩지 않을 영혼과 육체의 영원한 부활에 참여할자'로 인정해 주신 하나님께 찬송드렸다." (p.66-67)

그는 여든 여섯의 생애동안 오직 사랑과 긍휼을 베푸신 그분을 부정할수 없다고 여겼다.
게다가 순교자들의 반열에 오르게 된것을 영광스럽고 기쁘게 여겼다. 기쁨으로 화형대에 오른다.
순교는 그리스도인들과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다. 고난받음은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따라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순교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우리는 신앙생활을 한다. 심지어 자기포기 내지는 영적인 죽음 이라는 이름으로 순교를 이야기한다. 어쩌면 순교라는 명목이 아주 저렴해지고 가벼워진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순교라는 이름으로 사는 것을 꺼려한다.

스데반을 비롯하여 많은 순교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본 시점은 언제일까? 절정에 다다르는 고통속에서 였다. 순교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고통속에서 하나님은 그의 영광을 보이신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위로를 주시기 위함이요. 고통속에서 기쁨을 주시기 위함이다. 그리고 많은 이들에게 순교란 하나님의 영광임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폴리캅은 기쁨으로 화형대로 올랐다. 그리고 찬송했다. 순교는 분명 하나님의 영광이다.
서머나 교회는 폴리캅이 순교한 후 "폴리캅의 순교(Martyrdom of Polycorp)"라는 문서를 기록하여 여러 공동체에 보낸다. 그들중에 필로멜리움(Philomelium)에 보낸 편지가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다.

교회사가 후스토 곤잘래스는 이 문서가 전달하는 이야기의 흐름이 드라마적이며 문체가 진지하게 전개되어 흥미를 주는 것 뿐아니라 교회가 순교자의 유물을 보관하는 관습이라든지 기독교와 이교도간에 마찰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알게해주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평가한다.

"폴리캅의 순교" 문서에서 폴리캅을 회유했던 이는 지역 실권자 '헤롯의 아버지 니세테스' 였다. 그들은 폴리캅에게 '카이사르를 신이라 말하고 제사를 지내 목숨을 구하는 것이 무엇인 그렇게 해로운 일이냐' 라면서 죽음을 피하도록 권유했다. 그러나 폴리캅은 거절하였다.
군중들은 폴리캅을 향해 '그는 그리스도인들의 선생으로 신의 파괴자이며 희생제사를 드리지도 못하게 숭배도 못하도록 가르쳤다'고 고소하였다.
총독 스타티우스 쿠아드라투스가 다시한번 '신이신 카이사르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목숨을 구할 것을 권유한다. 자비를 베푼것이다. 그러나 폴리캅은 이렇게 고백한다 '나를 구원한 나의 왕을 두고 어찌 황제의 게니우스를 두고 맹세하랴'"

이것은 당시 황제 숭배가 기독교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것을 거부했을때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황제숭배는 훗날 점차 정치적인 것으로 시작해서 종교적인 것으로 변화 된다.
뿐만아니라 기독교인들에게 내리는 박해도 점차 조직적으로 확대 되기에 이른다. 소수의 학자들에 따르면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에도 황제들은 황제 숭배에 대한 야심을 버리지 못했다고 한다. 황제에게 있어서 제국을 움직일 명분, 평화로운 로마를 위해서 황제 숭배는 어쩌면 필요이상의 것이었을 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겐 절대로 있을수 없는 것이었다. 가난하게 살지라도, 어떤 삶의 좋은 혜택이 없더라도 일생동안 사랑과 긍휼을 베푸신 그분을 부정할수 없는 것이라 여겨 기꺼이 순교의 자리로 나아갔다.

계속해서 "폴리캅의 순교(17,1~18,1)" 문서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문서는 당시 순교자들의 신앙과 황제숭배사상의 모습의 어떠함을 보여주는 것 뿐아니라 아주 좋은 역사적 가치를 제공해 주는데, 당시 초대교회 공동체가 순교자의 유물을 어떻게 보관했는지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내용을 잠깐 살펴보고자 한다.
계속해서 "폴리카르포스의 순교" 문서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문서는 당시 순교자들의 신앙과 황제숭배사상의 모습의 어떠함을 보여주는 것 뿐아니라 아주 좋은 역사적 가치를 제공해 주는데, 당시 초대교회 공동체가 순교자의 유물을 어떻게 보관했는지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내용을 잠깐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나 폴리카르포스의 순교의 위대함과 처음부터 계속된 그의 흠없는 삶 그리고 어떻게 불멸의 화관이 그의 머리위에 씌워졌으며 또한 그가 논의의 여지가 없는 상을 쟁취했는지를 보고서는 많은 사람들이 폴리카르포스의 시신을 취하여 그의 거룩한 육체와 더불어 친교를 나누기 웠했음에도 불구하고 의인 집단의 적이며 질투가 많고 악의가 있는 그 사악한 자는 우리가 그 시신을 가지고 가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 사악한 자는 헤롯의 아버지 이며 알케(Alce)의 형인 니케타스(Nicetas)로 하여금 행정장관에게 폴리카르포스의 시신을 넘기지 말라고 간청하고 부추겼습니다."
문서를 통해서 살펴볼수 있는 것은 초대교회 교인들은 순교자의 유해를 아주 가치있게 여겨 보관했으며 그의 순교의 날을 생일로 여겨 축하하는 일들을 했다는 것을 알수 있다.
” 유대인들 가운데 우두머리가 그드릐 다투기를 좋아하는 기질을 알고는 그것(폴리카르포스의 시신)을 가운데 놓고 그들의 관슴에빠라 불살랐습니다. 나중에 저희는 값비싼 보석보다 더 귀중하고 금보다 더 소중한 폴리카르포스의 유골을 모아 적당한 장소에 묻었습니다. 그곳에서 주님꼐서는 이미 앞서 간 경기자들을 기념하면서 저희로 하여금 폴리카르포스가 순교한 날을 그의 생일로 축하하기 위해서 그리고 장차올 경기자들을 훈련하고 준비시키기 위해서 기쁨과 즐거움으로 함께 모일수 있도록 허락해 주실것입니다.“

폴리캅 순교 기념교회에서 폴리캅의 비석이라든지 흔적은 찾을수 없었다. 천장은 프레스코화의 화려함이 순교자 폴리캅이 얼마나 위대한 일을 했는지를 칭송해주는 듯했다. 좌우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서의 내용들, 성인들의 기도장면들이 그려져있었다. 천장의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했다.
그냥 마치 나도 저 분들의 숭고한 신앙을 통해 여기에서 기쁨을 누리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관계자들에게 허락을 얻어 그곳에서 작은 예배를 드릴수 있었다.
찬송가 360장을 불렀다. 스피커나 마이크가 필요없었다. 교회 공간에 찬양이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행군 나팔소리에 주의 호령났으니 십자가의 군기를 높이 들고 나가세
선한 싸움 다싸우고 의의 면류관 의의면류관 받아쓰리라
선한 싸움 다싸우고 의의 면류관 예루살렘 성에서
면류관 받으리 저 요단강 건너
우리싸움 마치는 날 의의면류관 예루살렘 성에서

그 공간에 찬양이 울려퍼졌다. 신앙은 면류관을 얻기위해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이다.
누군가 신앙을 전쟁과 같이 하는 것을 비판한 글을 봤다.
그러나 신앙의 성격은 전쟁이요 싸움에서 찾아 볼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의 삶의 간극을 좁혀가는 싸움이요.
내 생각과 내 가치가 주께 굴복하며 다스림을 받는 삶을위한 싸움이 신앙이다.
면류관을 위한 싸움말이다.

찬양을 마치고 기도한후 밖으로 나가는 길에 벽에 걸린 그림을 보았다.
천정의 화려한 프레스코화 벽화는 아니지만 작은 폴리캅의 순교 그림이 마음에 들어왔다.
하나님은 폴리캅의 순교의 장면을 어떻게 보셨을까? 궁금했다.


또 한편 폴리캅은 어떻게 이 혹독한 죽음의 두려움을 이길수 있었을까? 그는 어떻게 순교할수 있었을까?
내 삶이 도무지 그의 삶을 닮아 갈만한 용기나 자신이 없기에 자연스럽게 나오는 질문이었다.
그는 어떻게 험하고 고된 박해 뿐아니라 순교의 걸음을 걸어갈수 있었을까?

폴리캅은 기원후 115년에 서머나의 감독이 된다. 많은 이들은 그가 죽기전에 사도 요한으로부터 온 요한계시록 2장의 서머나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었을 것이라고 추정을 한다.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계2:1)

예수 그리스도께서 서머나 교회에게 자신을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예수께서도 혹독한 고난을 받으셨다. 뿐만아니라 죽으셨다. 그리고 살아나셨다.
죽음의 권세는 그의 발앞에 엎드려졌다 굴복당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가 그의 부활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졌다. 이것을 믿는 이들은 죽음의 권세앞에 두려워하지 않는다. 부활을 믿는 다는 것은 그런것이다.
부활을 사는 이들은 현실에서 두려워하지 않는다. 먹고 사는 문제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경제적 어려움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너무 비현실적인 삶인가? 사실 부활을 산다는 것은 비현실적인 삶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죽음은 진리앞에 굴복하게 만든다. 죽음은 두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음을 이기는 부활은 진리 앞에 당당하게 만든다.
폴리캅은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
이것은 나에게도 과제다 나도 그럴수 있을까.

얼마전에 한 성도님께서 별세하셨다. 이렇게 설교를 하였다.
'죽음은 우리를 슬프게 하고 힘들게 한다. 마치 죽음은 우리를 이긴것같다. 그래서 대 제국의 황제도, 진리를 믿고 있는 자도, 사랑하는 사람도 죽음앞에서 벌벌 떨거나, 진리를 거부하거나, 사람을 버린다. 죽음이 두렵기 때문이다. 사망의 쏘는 것 앞에서 무서워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으셨다. 그리고 부활하셨다.
그 사실을 믿는 자들은 죽음 앞에서 이렇게 외친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있느냐?네가 쏘는 것이 어디있느냐?...... 우리주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전 15:55,57)
주는 죽으셨다. 그리고 살아나셨다. 폴리캅은 그 사실을 분명히 믿었다.
요즘 나는 틈 나는 대로 속으로 중얼거리는 말이 있다.
"예수의 승리 내 승리 .... 예수의 평안 내 평안....."

죽음의 문제는 살아있는 모든자들에겐 난제요 과제다.
그러나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죽으셨고 다시 사신분이라는 것을 믿는다.
그리고 그의 죽으심과 부활은 모든 믿는 자들의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의 평안의 이유다.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자들이 죽음앞에 겁을 내고 두려워한다는 것은 이상한 것이다.
믿지 못하거나 내것이 아니거나 둘중하나이다.

이즈미르의 거대한 쇼핑몰, 돈과 물질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믿는 모든 삶속에서 교회는 무엇을 외쳐야 할까? 우리에게 현존하는 경제적 어려움, 불안과 두려움이 가중되는 현실속에서 교회는 어떻게 존재해야 할까?
우리의 믿음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할까?

먼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어야 한다.
그 믿음은 우리로 더욱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도록 한다.(고전 15:58)
그리고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하지 않게 한다. 죽으심과 부활은 우리로 끝까지 한 길 걷게 한다.

그리고 우리가 받게 될 환난을 십일 동안 이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다시말하면 끝이 있는 환란이라는 것이다. 십일 동안의 환란 이다. 영원한 삶에 비하면 너무나도 짧은 순간이다.
물론 그 순간은 너무 힘들 것이다. 이 환란이 언제 끝나나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환란은 끝이 있다.
지금 겪는 인생의 고통, 경제적 어려움, 질병 은 반드시 끝이 있다.
십일 동안의 환란 때문에 영원한 생명의 면류관을 얻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없어야겠다.

마지막으로 환란을 마친후 우리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한다.
생명의 면류관, 부활을 말하는 것일수도 있다. 그것은 충성한 자들에게 주시는 은혜요 상급이다.
예수께서 우리의 상급되신다면 부활 만큼 우리가 영생을 누리는 존재가 되는 것만큼 가장큰 은혜와 상급은 어디있을까?
그래서 환란 가운데 충성한 이들의 마지막은 비참이 아니다. 폴리캅의 죽음은 분명 비참한 죽음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과 그 공동체는 그 죽음을 영광스럽게 생각했다. 기뻐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좌 우편에 앉아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환란앞에서 죽음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견실하며 충성할수 있는 이유는 그 끝에 생명의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2:10)

폴리캅 순교 기념교회 모습

무거움과 기쁨, 폴리캅 순교 기념교회를 방문하고 나올때 얻은 느낌이다.
그 길로 걸어서 멋진 야자수가 놓여진 가로수 길을 걸어갔다. 지금까지 고대유적지를 방문하면서 조용하고 한적한 시골로 다니다가 이런 대도시를 만나니 낯설기도 했다. 터키는 현재와 과거가 교차되는 곳 같다.
게다가 근처에 대학이 있어서 인지 젊은이들이 거리에 많았다.

터키는 현재와 과거가 교차되는 곳 같다. 대학로의 헌책방 거리.

호텔에 들어갔다. 에게해가 보였다. 에게해는 호수 처럼 잔잔했다.
파도가 일지 않아서 바다 해변 도로에서 사람들은 여유롭게 카페에 앉아 차를 즐기기도하고 운동을 하기도하였다.
파도가 없는 바다라. 잔잔해 보여서 좋지만, 에게해는 물고기가 많이 없다.
이러한 해변가에는 분명 해산물 요리 집이 즐비해 있어야 하는데, 발견한 것은 일본 스시집 한 군데가 전부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에게해를 죽은 바다 라고 까지 한단다.
우리 인생에 적당한 파도는 살아있다는 증거인것 같다.
파도가 없는 바다를 죽은 바다라고 한것 마냥
파도가 없는 인생은 죽은 인생이다.

환란과 핍박과 순교.... 그것은 교회가 살았다는 증거다.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숙소에서 바라본 에게해 해변.




참고: 1.문영식, "제2소피스트 운동의 수사학적 함의," 인문과학연구 53호(2017.6),229.
2. 필립샤프의 교회사 전집 2권 니케아 이전의 기독교.
3. 그레고일 K 비일, NIGTC 요한계시록.
4. 공성철 역, 고대교회.
6. 후스토 곤잘래스, 기독교 사상사1.
7. 토마스 브리스코(Thomas V. Brisco), [Holman Bible Atlas](두란노 성서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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