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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성지순례 기행

[튀르키예 여행/ 성지순례 여행] 밀레토스, 인생은 작별 그 자체이다.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19. 8.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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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미르에서 2시간여 버스를 타고 갔다. 끝없는 평야지대의 터키는 비옥한 땅임이 분명하다.
게다가 멀리 높은 산맥들은 마치 한국이랑 비슷한 느낌이다. 고요하고 평화롭기도 하다.
사도바울은 전도여행으로 소아시아를 다니면서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사도바울의 삶을 신약성경을 통해 추적할때마다 목사로서 마음에 와닿는 장면들이 많이 있다.
목회자라면 꼭 한번 쯤 가보고 싶을 장소가 여럿있는데, 그중 하나가 밀레토스이다. 오늘은 그 밀레토스로 향한다. 밀레토스 야외박물관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를 반기는 것은 거대한 야외 극장이었다. 반쯤 허물어 졌지만 규모는 어마어마 했다.

밀레토스 야외박물관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를 반기는 것은 거대한 야외 극장이었다. 


왜 밀레토스는 목회자들에게 가고 싶은 곳중 하나일까?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곳은 철학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밀레토스 학파가 생겨난 곳이기 때문이다. 철학과 인문학의 발원지랄까? 철학자 탈레스를 비롯해 만물의 기원을 철학적으로 사유한 학자들을 배출한 곳이다. 철학과 출신의 한 목사님께서 굉장히 진지하게 이곳을 설명해주셨다. 그런의미에서 밀레토스는 철학과 문학의 중심지이다. 게다가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 등장한 밀레토스는 리디아와 페르시아에 끊임없는 침략과 괴롭힘을 당한 민족이다. 또한 밀레토스는 아나톨리아 서부 해안에 있던 고대 도시들중 하나로 소개한다. 항구도시로서 해양 무역의 중심지였다. 그러니 침략자들은 밀레토스를 끊임없이 공략했을 것이다. 성경의 고레스로 불리우는 퀴로스는 밀레토스와 조약을 맺는다. 그래서 이곳은 한동안 평온을 유지하는 땅이 된다. 이렇게 밀레토스는 철학과 문화 그리고 번영의 도시가 될 수 있었다. 이 거대한 야외극장이 한편 그것을 말해주는 것 같다. 이곳의 철학과 문명이 얼마나 찬란했는지를 말이다.

엄청난 크기의 야외극장 한복판에 서보았다. 이 곳에서 다양한 주제의 연설이 있었을 수도 있고, 연극으로 웃고 우는 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한편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야외극장의 한복판에 서본다는 것이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는데, 야외극장은 그리스도인들의 공개 처형의 장소내지는 순교의 장소로 사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노래에는 자신이 없지만 목사님들과 더불어 야외극장 한복판에서 찬양을 해보았다.

저 멀리뵈는 나의 시온성 오 거룩한 곳 아버지 집
내 사모하는 집에 가고자 한 밤을 새웠네....

극장에서 관람객들의 만족과 평가는 사실 잔혹하다. 감동을 줘야한다. 그렇지 못하면 처형이다.
그날 분위기도 그랬다. 목사들이 순례자들에게 감동을 주고자 최선을 다했지만 그들의 평가는 잔혹했다.
감동을 주지 못한 우리는 그자리에서 즉각 처형을 당했다.

밀레토스의 야외극장 좌우에는 커다란 통로가 있었다. 그곳을 지나 극장 뒤쪽으로 걸어가니 넓은 대지가 나왔다.
흥미롭게도 그곳은 원래 항구터였단다. 지금은 내륙이 되었다. 이곳 항구에서 활발하게 무역이 이뤄지던 모습은 지금 찾기 어려웠다. 다만 상상을 해야했다.
밀레토스의 항구,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고 목회자들에게 의미있는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밀레토스는 철학과 문화 그리고 번영의 도시였던 셈이다. 


이곳이 목회자들에게 의미가 있는 또 한가지 이유는
밀레토스는 사도바울의 행적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목회자로서 마음을 뭉클하게 만드는 장면이 있다면 바로 밀레토스에서 에베소 장로들과의 작별인사이다. 오늘은 이 부분을 중점적으로 이야기하고 싶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사실 목회자들 뿐아니라 모든 사람들은 마지막 순간의 어떠함을 기대한다. 장엄하게 나의 달려갈길과 주예수께 받은 사명까지는 아니더라도, 마지막 순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그 간의 시간들의 아름다움을 나누는 그 순간을 기대한다.
그러나 현실은 대체로 많은 경우 갑작스럽게 마지막을 대한다. 아니면 오랜 기간 싸우다가 아프다가 지칠대로 지친 상태에서 마지막을 대한다. 아름다운 작별은 현실에서 온대간대 없다.

그러나 작별은 우리에게 중요하다. 그것은 인생 그자체이기 때문이다.
롤랑바르트는 이렇게 말했단다. '사진을 찍는 순간 바로 죽음에 이른다.' 짧은 찰라의 셔터로 현재를 찍지만, 셔터가 눌러진 순간 그것은 이미 과거가 된다는 것이다. 즉 '존재했던 것' 이 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 현재라는 순간은 사실 우리에게 없다. 약간 허무하지만 현재라는 것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것은 사실, 허상이다. 왜냐하면 결국 사라질것들이기 때문이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지금 이 순간의 나' 도 방금, 시간의 흐름과 동시에 사라졌다. 그러므로 인생은 매순간이 작별이고 매순간이 이별이어야 한다. 사라질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별은 인간들이 고안해낸 아주 좋은 위안법이다. 작별을 통해 아쉬움을 보내고 슬픔을 달랜다. 위안하는 것이다. 한편 죽음과 마지막이라는 현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이라는 것이 허상이라는 사실을 모른다면, 작별이라는 위안을 느낄수 없게 된다. 현실에 지나치게 충실하게 된다. 작별을 할 줄도 모른채 살아가고 마치 이별이 없을 것 처럼 살아간다. 썩지 않을 것처럼 살아간다. 현실에 지나치게 충실한 것은 어쩌면 작별과 이별이 주는 의미를 모르기 때문일수도 있다.
인생은 죽어가는 과정이다. 우리가 여행을 하는 것도 매 순간이 하나의 작별이기 때문이다. 같이 밥을 먹고 시간을 갖는 것도 하나의 작별의 연습이다. 좋은 인생을 살았다는 것은 얼마나 이별연습을 잘했느냐 일 것이다. 진짜 작별의 순간 그런 것들이 추억으로 남겨지기 때문이다. 그런의미에서 인생은 그자체로 이별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이별과 작별은 참 중요하다. 이별과 작별을 우리의 인생에서 소홀하게 여겨서는 안된다.

목회자로서 장례는 참 쉽지 않은 사역이다. 그런데 장례의 예배를 인도할때마다 드는 확신이있다. 장례 예배는 죽은 고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유가족들을 위한 것이고 그들과 더불어 인생의 참 주인이신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유가족들은 장례예배를 통해서 고인과 영원한 작별을 또는 다시 만날 것을 기대하며 떠나보낸다. 장례예배는 유가족과 고인간에 작별의 시간이다. 이 시간들을 잘 갖지 않으면 안된다.

밀레토스는 사도바울의 작별의 장소이다. 에베소 장로들과 함께 복음을 위해 헌신했던 순간들을 떠올린다.
사도행전 20장 17절은 사도바울이 밀레도 항구에서 에베소로 사람을 보내어 장로들을 오도록한다. 사도바울은 이들과 마지막 시간이 될것이라고 예상했던 것일까? 그의 사역을 회고하며 다소 장황하면서 마음이 담긴 고별설교를 한다.

바울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내가 아무의 은이나 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밀레토스는 사도바울의 작별의 장소이다. 밀레토스의 항구 터

순례팀들은 바울과 에베소장로들이 눈물의 고별시간을 가졌을법한 즉 항구로 추정되는 장소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밀레토스는 항구였다. 특별히 이지역은 지대가 낮았다. 바다물이 우리가 서있는 내륙까지 들어왔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해안선은 보이지 않는다. 폐허로 남은 유적들만 남아있었다.

저 어느 지점에서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과 감동적인 작별인사를 나눴을 것이다. 그래서 목회자들에게 이곳은 감동을 주는 장소이다. 달려갈 길과 예수께 받은 사명을 마치고 성도들과 감격스러운 작별의 인사를 고하는 모습은 목회자라면 어느 누구나 꿈꾸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은 쉽지 않다는게 아쉬움이다. 목회자는 작별에 어색하다. 성도들은 그런 목회자와 어색하다. 사실 인생은 작별 그자체이다. 목회자는 인생을 말씀으로 하나님백성되게 하는 사명을 지닌다. 목회자는 작별에 인색하고 어색해서는 안된다. 밀레토스는 그런의미에서 목회자들의 꿈과 소망이 담긴 곳이라 하겠다.

이제 밀레토스를 내려온다. 버스를 타고 셀축으로 떠난다. 에베소에 있는 요한 기념교회로 향한다.

http://m.yes24.com/Goods/Detail/93720745

 

바울과 함께 걸었네 - YES24

흥미로운 여행기를 토대로 성경의 배경과 교회사를 이해하고 인문 고전의 깊은 상상력까지 풍부하게 더할 수 있는 책이 나왔다. 역사신학을 전공한 함신주 목사가 코로나19로 세계 여행의 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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