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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한 기대 (삶)/책과 삶

리처드 마우의 무례한 기독교 IVP 을 읽고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09.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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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 또한 학부때 과제로 제출한 것이다. 좀더 수정하고 보완해야 할부분이 더 많지만,
챙피함에도 올리기로 결심했다.

이 역시 당시의 순수함을 잃지 않으려는 태도에서 비롯됬다.

시간이 좀 지나면 이 책의 서평을 좀더 멋지게
해보고 싶다.
개인적으로 현실적 안목을 높여준 책이랄까...

처음에는 우리나라의 현실과 좀 다른 듯한 느낌에
어렵게 읽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미국의 기독교의 모습을 따라가고 있었다....
그래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 시민교양, 십자군식 의식구조, 낙태반대론.....)
이책은 그런의미에서 참 중요하다고 하겠다.

이 서평의 구성은 이렇다.
책을 읽고 가상의 저자를 만들어서 개인적으로 질문해 보고 싶은 것을
질문하고, 책에서 해답을 찾아서 정리해 오라는
이숙경교수님(아신대 기독교교육학 교수)의 탁월한 과제 였다.

개인적으로 이글을 읽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움이 되고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필자: 안녕하세요? 리처드마우 교수님?
 무례한 기독교IVP 를 읽고 개인적으로 몇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기독교적 시민교양에 대한 오해 부분에서 대학시절 개인적으로 겪은 그레이 하운드의 전도자가 보여준 무례함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은 시민교양을 복음전도를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보지 않도록 조심해야한다고 말씀 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로잔언약의 제 4 전도의 본질 부분에서는
“전도 그 자체는 역사적 성서적 그리스도를 구주요, 주로써 선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그에게 개인적으로 와서 하나님과 화목함을 얻도록 설득하는 일이다”라고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복음전도의 가치와 그 능력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마치 카멜레온처럼 세상에 동화 되고, 정당히 타협하고 살아가고 있고 이로써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점점 상실해 가고 있습니다.
 더 이상 어디에서도 빛과 소금의 그리스도인은 쉽게 만나볼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저는 기독교적인 시민교양과 복음전도는 언제 부터인가 더욱 그 관계가 긴밀해져 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민교양은 복음전도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저는 왜 시민교양을 복음전도의 일환으로 보지 말라고 하시는 것인지를 알고 싶습니다.  


 리처드 마우: “나 역시 복음주의자로서 이점을 지적할 때 오해하지 않도록 조심해야할 필요가 있다. 나는 사람들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좋은 소식, 곧 복음을 영접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나는 복음전도 사역에서 상당히 높은 우선순위를 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적 시민교양이 전도의 책략에 불과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즉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게 할 목적으로 그들을 예의 바르게 대해야한다는 말이 아니라는 뜻이다. 시민교양은 그로 말미암는 전도의 열매나 정치적 효과를 떠나서 자체로 귀중한 가치가 있다 남을 존중하고 좀 더 온유한 사람이 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길이다 ”


● 그렇다면 이 부분에서 시민교양에 대한 의미와 그 의도를 알지 못한다면 시민교양이 상대주의적인 관점으로써 충분히 많은 오해의 소지를 불러일으킬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좀 더 정확한 시민교양의 정의 그중에서 특별히 기독교적인 시민교양의 정의를 내려주셨으면 합니다.


 리처드 마우: "교양이란 우리가 나는 사람들을 존귀 하게 대하는 것 이상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함께 영위하는 공동의 삶에 관심을 기울리는 일이다. 그것은 가까운 관계를 가꾸는 일일 뿐만 아니라 시민사회에 깊은 관심, 즉 공동의 영역-인도와 고속도로, 축구 경기장과 국립공원, 백화점과 국회-에서 이루어진 삶의 모습을 유념하는 것이다 여기서 기독교적 시민교양은 상대주의적 관점을 갖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다.
 교양인이 된다고 해서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현상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믿고 행하는 것을 옳다고 인정하는 것이 교양 있는 태도는 아니다. 다른 이들이 자신의 신념을 표현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서로 다르다.
 시민교양은 이 가운데 첫 번째 것에 의거해서 살도록 요구한다. 하지만 둘째원리를 따라야 한다고 요구하지는 않는다. 모든 믿음과 가치관이 동등한 것처럼 대우 받아야한다고 말하는 것은 상대주의를 주장하는 것으로 이는 기독교 신앙 및 관행과 양립할 수 없는 관점이다.”


십자군식 의식 구조는 군사적인 행동에 국한되지 않다고 하시면서 많은 그리스도인이 영적인 십자군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하고 계신 부분에서 저도 많은 부분에서 공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낙태 논쟁을 좋은 사례라고 열거하시면서 모든 낙태를 살인이라고 주장하는 낙태 반대론에 동의하지 않으시는 입장을 보면았습니다
 그러나 현재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엄연히 낙태는 살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자기들의 대의명분을 위해 어떠한 수단이라도 써서라도 반드시 이겨야한다는 ‘정당한 전쟁론’ 즉 십자군식 의식구조에 대해 설명하기에는 낙태논쟁은 좋은 사례라고 보기에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단지 ‘살인’이라는 단어의 부적합성 대해 낙태 반대론을 동의하지 않는 것인지, 아니라면 왜 굳이 심각한 윤리적인 문제인 낙태논쟁을 우리 안에 있는 십자군식 의식구조로서 그것을 설명하려고 하며, 그리고 그것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으로써 우리가 가져야할 분명한 의식구조는 무엇입니까?


 리처드 마우: “나는 낙태가 인간의 생명을 앗아가는 행동인 만큼 언제나 유감스러운 관행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든 낙태를 살인이라고 주장하는 낙태반대론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살인이라는 단어는 법정에서 사용될 경우 엄밀성을 지닌 전문 용어다. 살인은 말하자면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과실치사와 다르다. 이런 법적인 의미를 상기시키는 것은 결코 궤변이 아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법적인 전문 용어는 삶과 죽음의 문제를 수반하는 복잡다단한 상황에 대응하여 개발한 것이다. 내가 낙태 반대론자 친구들에게 이런 문제를 제기하면 그들도 살인이라는 단어는 약간 과장된 표현임을 인정한다
 하지만 논쟁점상에서는 그것이 여전히 유용한 용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우리는 아주 중요한 싸움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멈춰서서 그모든것이 도덕적으로 바람직한지 여부를 따질 시간이 없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십자군식 정신자세다. 
 무슨 댓가를 치루더라도 이겨라 그 싸움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그리스도의 유일한 대의면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하나님이 어떻게 영광을 받으시는가 하는 것이다. 확신에 찬 그리스도인이라면 십자군의 유혹을 받을가망성이 높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규칙이 필요하다 초심자라면 자신의 죄성과 타인의 인간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좋다. 우리는 자신과 타인에 대해 더 정직해 질수록 더욱 교양 있는 모습을 갖추게 될것이다.”   


● 마우 박사께서는 양극화를 초월하는 길로써 여러 다종교간의 대화를 계속적으로 강조하고 계심을 보았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복음의 우월성과 복음만이 가지고있는 특수성을 강력하게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 확고한 복음을 향한 신념과 복음안에서만 나타나는 구원의 특수성등을 견고하게 하지않은 상태에서 또는 포스트모더니즘 적이며 상대주의적인 입장이 난무하고있는 아무런 대책없는 현대의 상태에서 종교간의 대화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개인적으로 생각됩니다
 오히려 이것은 종교 다원주의라는 극한적인 상황으로 치닷을수 있는 결과를 몰고 올것이라고 우려가 됩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다른 종교와 대화를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며 우리가 얻은 그 유익들을 통해서 그들에게 어떻게 나아갈 수 있을까요?.

 
 리처드 마우“사실 대화는 복음 전도를위한 중요한 전략이 될수있으며 관계 중심 전도를 주창하는 복음주의자들이 강조해온것이다. 이는 그들의 말을 경청하고 그들의 희망과 두려움에 공감하고 그드르이신뢰를 얻음으로써 가능하다. 예수님은 유일한 진리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종교 전통에 속한사람들과 대화할 때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만일 그들이 하는 말에서 어떤 진리를 발견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붙잡기위해 믿음 안에서 과감하게 발을 내디뎌야한다. 그러면 예수님의 팔이 우리를 붙들어 주실것이다. 그렇다면 종교간의 대화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안에서 행하는 활동이라 할수있다.
 내가 타종교인과 대화할 때 그리스도를 구워자로 믿는 내믿음을 협상 테이블위에 올려놓을수는없다. 하지만 나는 대화에 임할 때  그리스도의 숨은 권위와 능력의 범위에 대해 새로운 것을 배우겠다는 열린자세로 나아갈수있다.”


무례한 기독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리처드 마우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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