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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성지순례 기행

[튀르키예 여행/ 성지순례 여행] 갑바도기아, 광야의 지혜를 만나다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19. 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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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바도기아 암석들 모습 @함신주

성지순례 일행은 이스탄불을 떠나 비행기를 타고 카이세리공항으로 향했다. 한 시간 반여 여정이었지만 저녁 비행기였고 날씨가 쌀쌀했다. 적어도 터키는 덥고 건조하며 따뜻한 날씨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무지를 완전히 깨뜨리는 순간이었다. 저녁 늦게 카이세리 공항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시간여 버스를 타고 숙소로 이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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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함께 걸었네 - YES24

흥미로운 여행기를 토대로 성경의 배경과 교회사를 이해하고 인문 고전의 깊은 상상력까지 풍부하게 더할 수 있는 책이 나왔다. 역사신학을 전공한 함신주 목사가 코로나19로 세계 여행의 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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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바도기아는 성경과 교회사에 굉장히 중요한 곳이다.
갑바도기아는 성경에서 두 번 정도 언급이 된다.  
그리고 교회사적으로 그곳은 유명한 갑바도기아의 세교부, 성 바실레이오스,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 그리고 니사의 그레고리오스가 활약했던 곳이다.
갑바도기아에서, 성 바실레이오스를 만나다.

갑바도기아에 위치한 카이세리는 초대 교부 교회사에 등장한 유명한 신학자 일명 '갑바도기아의 세 교부' 중 한 사람인 성 바실레이오스(성 바질 혹은 바실리오 Ἅγιος Βασίλειος ὁ Μέγας 330-379)의 고향이다.  성 바실레이오스는 330년 폰토스에서 수사학자인 대 바실레이오스와 카이세리(옛 카이사리아)의 에멜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바실레이오스는 350년경 카이세리에서 정규 교육을 받았으며,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를 만나게 된다. 그레오리오스와 함께 콘스탄티노플로 유학을 갔다. 그후 아테네로 가서 언어학 철학 수사학과 행정을 배우며 실력을 쌓았다. 356년 그는 다시 카이세리로 돌아와 법학과 수사학 교사로 재직한 후 362년경 부제로 서품을 받는다. 그는 일생을 하나님께 바치기로 결심한다.
"나는 복음서를 읽고 완덕에 이르는 훌륭한 길은 자신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이세상 삶에 대한 관심을 버리고 영혼이 세상 것에 대한 어떤 미련도 갖지 않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365년 카이세리의 에우세비오 주교에 의해 사제로 서품을 받는다. 나지안조스 그레고리오스와 함께 아리우스파들과 신학 논쟁을 통해 당대 최고의 신학자가 된다.
바실레이오스가 신학자로 활약하던 370~380년은 교회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시기이다. 당시 동방교회는 니케아 신조이후에 삼위일체파와 반삼위일체파로 분열 되어 교회안밖으로 어지러웠다. 황제는 교회의 화합과 일치를 위해 어떻게든 이 논쟁의 불씨를 정리해야했다. 그러나 쉽게 종식되지 않았는데 이는 삼위일체 논쟁 안에는 순수 신학논쟁뿐아니라 정치논쟁으로도 점철(點綴)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등장했던 인물들이 갑바도기아의 세 교부 였다. 신 니케아파(Neo-Nicene party)라고 불리는 차세대 동방교회의 리더들이었다. 신 니케아파 라고 불리우듯이 이들은 니케아 신조의 삼위일체를 따르는 이들이었다. 다시말해 그들은 '성부 성자가 본질에 있어서 같거나 동등하지 않고 유사하다.' 라고 하는 유사본질(ὁμοιούσιος)을 배격했다. 그리고 성부와 성자가 그 본질상 동등 또는 같다고 주장했다.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열렸던 곳으로 추정되는 하기아 이레네 성당 내부 @함신주


381년 제 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소집이 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의 주최로 열렸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정치적으로 아리우스파를 지지하는 이들이 많은 곳이었다. 반면 서 로마는 외부의 침입과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성자 하나님의 위치를 격상(格上)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래서 바실레이오스는 서 로마와 긴밀한 대화를 끊임없이 가졌다. 니케아 신조를 지지하던 황제는 갑바도기아의 세 교부를 중심으로 공의를 주도 하기 시작했다. 참가자는 150명 정도로 대부분 동방 지역에서 참가한 사람들이었다.
회의에서는 기존의 니케아 신조를 확립하는 성과가 있었고 성령에 대한 내용을 결의하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조를 채택한다. 이로써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배척하는 역사적 결과를 얻게 되었다.

괴뢰메 야외박물관에 있는 교회 프레스코화 벽화들, 성바실레이오스의 모습도 그려져 있다.@함신주

다시 바실레이오스의 이야기로 가보자. 370년 에우세비오 주교가 선종한 후 카이세리의 교구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특별히 바실레이오스는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로 알려져있다. 그는 가뭄으로 극심한 고통중에 있는 이들을 위한 사회복지시설인 바실리아스(Basileias)를 설립한다. 바실레이오스의 재물관은 독특하다. 공동소유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겼다. 인간의 탐심과 탐욕은 금과 은에 집착하게 만들었고, 부자가 되기를 열망하는 존재로 만들었다고 한다. 금과 은을 향한 인간의 탐심은 끝이 없다. 무엇으로도 만족할수 없는 존재가 된다고 여겼다.
"곳간들을 헐어내고 더 큰 것을 지어야 지.... 더 큰 곳같이 또 차면 그때는 어떻게 할 작정입니까 그것들을 헐고 다시 더 큰 것들을 짓지 않겠습니까?..... 곳 간을 갖고 싶다면 가난한 이들의 배속에 곳간을 지으십시오 천국에 여러분을 위한 보물을 쌓아 두십시오..."

성 바실레이오스 교회 입구 @사진 맹성숙


다시 바실레이오스의 이야기로 가보자. 370년 에우세비오 주교가 선종한 후 카이세리의 교구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특별히 바실레이오스는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로 알려져있다. 그는 가뭄으로 극심한 고통중에 있는 이들을 위한 사회복지시설인 바실리아스(Basileias)를 설립한다. 바실레이오스의 재물관은 독특하다. 공동소유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겼다. 인간의 탐심과 탐욕은 금과 은에 집착하게 만들었고, 부자가 되기를 열망하는 존재로 만들었다고 한다. 금과 은을 향한 인간의 탐심은 끝이 없다. 무엇으로도 만족할수 없는 존재가 된다고 여겼다.
"곳간들을 헐어내고 더 큰 것을 지어야 지.... 더 큰 곳같이 또 차면 그때는 어떻게 할 작정입니까 그것들을 헐고 다시 더 큰 것들을 짓지 않겠습니까?..... 곳 간을 갖고 싶다면 가난한 이들의 배속에 곳간을 지으십시오 천국에 여러분을 위한 보물을 쌓아 두십시오..."

게레메의 한 암석교회에서 교부들 프레스코 벽화 @함신주 

 

괴레메 동굴교회와 야외 박물관
숙소에서 나와 40여분 버스를 타고 갔다. 주위에 기이한 암석들로 인해 버스안에는 이내 탄성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괴레메(Göreme)는 초대 교회 시절 고대 로마 군인들과 이슬람 박해자들을 피해 지하나 동굴속에 교회와 생활공간을 만들어 신앙생활을 했던 곳이다. 입구로 들어가 걸어 올라가 보면 여러 동굴 교회들이 등장한다.
동굴교회 좌우 벽과 천정에는 프레스코 벽화가 있다. 프레스코화기법은 건조 되지 않은 덜 마른 석회 벽위에 기름으로 갠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고 잘 건조를 시키는 기법이다. 프레스코화 기법으로 그린 벽화들은 오랜 수명을 유지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벽화들은 비잔틴 제국내에 성상숭배 반대 운동, 이슬람의 탄압 등으로 많이 훼손되어 있었다.
입구에서 걸어 올라가 야외박물관의 중심지에 이르렀을때 간랴하게 여행 가이드로부터 정보를 제공받았다. 중심지로부터 윗쪽으로 올라가면 교회들이 있는데 어둠의 교회, 뱀교회, 사과교회 등등이 있었다.
어둠의 교회라고 불리는 Karanlık Kilise (or the Dark Church) 내부에는 신약성경의 내용으로 된 프레스코화 가 있다. 11세기 비잔틴 예술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그림들이며 보존이 가장 잘되었다고 한다.
뱀교회라고 불리우는 Yılanlı Kilise (the Snake Church)의 내부와 그 안의 프레스코 벽화 모습을 보았다. 두 사람이 말을 타고 가운데 커다란 뱀을 사냥 또는 죽이는 장면인데, 인상적이었다. 이는 갑바도기아 수도사인 성 제오르지오(St. George)와 성 테오도로 (St. Theodore) 가 뱀을 무찌르는 장면이다. 뱀은 무엇일까? 사단을 상징하는 것일까? 이단자들일까? 박해자들일까? 어째든 성인들은 그것들을 몰아내고 무찌르고 있다.
벽화들은 그 자체로 신앙 교육이었다. 그리고 고백을 담아냈다. 믿음을 표현했다. 우상숭배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그것에 믿음을 담았다. 나름 교회사 전공생으로서 훼손된 벽화들이 내심 아까웠다.
특별히 어두운 동굴과 빛의 대비, 화려한 프레스코벽화가 신비감을 더해준다. 그들은 이곳을 하나님나라라고 여겼을 것이다. 동굴벽화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하나같이 무표정이었다.

어둠의 교회 천정에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린 프레스코화 손 모양은 IC XC Nika 를 상징한다. 승리자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한 것이다. 사진 출처 :https://www.ktown1st.com/blog/nounkwak/1269


각 이콘들의 신비로운 표정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정점을 이룬다. 초점이 뚜렷하지 않은 큰 눈은 어느곳이나 보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하였다. 작은 입술은 묵언과 침묵을 상징한다. 귀도 마찬가지다. 그런의미에서 자애로운 모습보다는 경외감으로 둘러싸인 모습 권위적인 모습까지도 느껴진다. 또한 오른 손은 'IC XC NIKA' 를 표현한 것으로 '승리자 예수 그리스도'이다. 동방교회 전통이라고 볼수있다. 왼손엔 복음서의 말씀을 들고 있다.
게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방은 복음서의 네 저자의 모습이 늘 그려져 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이 각 복음서의 특성을 살려 예수의 모습을 그려냈다.
이들은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을 보며 현실은 박해를 피해 동굴에 있지만, 함께 모여살며 불편을 감수하며 살았다. 벽화의 그림들을 보며 예수님은 부활하시며 우리와 함께 계시다 확신했다.

Karanlık Kilise (or the Dark Church) 외부 모습 내부에는 신약성경의 내용으로 된 프레스코화 가 있다. 11세기 비잔틴 예술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그림들이며 보존이 가장 잘되었다고 한다. @맹성숙 사진

 

Yılanlı Kilise (the Snake Church) 뱀교회 내부와 그 안의 프레스코 벽화 모습이다.  갑바도기아 수도사인 성 제오르지오(St. George)와 성 테오도로  (St. Theodore)  가 뱀을 무찌르는 벽화에서 교회 이름을 땄다고 알려져 있다. 사진 출처 https://www.ktown1st.com/blog/nounkwak/1269


기독교가 공인된 313년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 칙령이후 박해는 없어졌다.

"나 황제 콘스탄티누스와 황제 리키니우스 우리 둘이 공공의 행복과 안녕이 광계된 일을 논의하기 위해서 기쁘게 밀라노에서 회동하였을때, 문제들 가운데 다수에게 유익한 것을 약속했던 것들 중에서 무엇보다도 신을 섬기는 문제에는 새로운 규율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말하자면 우리는 모든 자들, 곧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들에게도 각ㄱ자가 원하는 종교를 따를수 있는 자유와 가능성을 주어서 하늘 보좌에 앉은 신적인 것이 우리와 모든 제국국민들에게 자비롭고 친절하게 대할수 있도록 해야했다."

결국 380년경 테오도시오스황제에 의해 기독교는 국교화 된다. 종교가 한나라의 국교가 된다는 것은 곧 세속화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세속으로부터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한 몸부림이 필요했다. 그리고 복음에 헌신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들은 사막으로 나갔다. 고독하고 개인적인 영적인 삶을 위해서 광야로 나갔다.

"그들은 일찍부터 명망을 얻었지만 그 명망에서 벗어나고자 더 깊은 사막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들이 포기한 세상의 기준을 그들에게 들이댔을때 그들은 결코 성공한 개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이 실제로 믿은 것을 두고 그들을 본다면 우리는 그들이 지닌 진정성 그리고 단순성에 깊은 울림을 얻고 감탄하게 될것입니다. 그들은 도망자가 아니라 전사였고 여행객이 아니라 순례자였습니다. " (로완 윌리암스)
그들은 사막을 하나님나라로 삼았다. 하나님의 말씀에 단순하게 반응하기 위해 독대의 장소로 나아갔다.
단순하게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기 위해 금욕과 절제의 삶을 살았다.
기도의 삶을 살기위해 고독의 장소로 나아갔을 뿐아니라 기도가 노동이고 노동이 기도라 여기며 노동의 신성함을 강조하였다. 기도가 곧 노동이다.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가 일하고 살아가는 모든 것이 노동이다. 그 노동속에서 예수를 발견한다면 그것은 기도다. 수도원은 예수를 발견하기 위한 몸부림을 치는 곳이다.
사람들은 이들의 금욕과 절제의 삶을 보며 이분법적이다. 고립과 도피자들이다 라고 손가락질 한다. 근면과 성실한 삶이 수도원에 부를 가져오고 결국 또다른 수도원 운동이 생겼다. 고립과 고독의 삶이 신비주의를 낳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수도원은 내 자신을 발견하는 곳이요. 복음의 가치를 위해 뛰어드는 곳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단순하게 믿고 듣기위한 곳이다.

괴레메 야외박물관 고독과 순종의 장소 @함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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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함께 걸었네 - YES24

흥미로운 여행기를 토대로 성경의 배경과 교회사를 이해하고 인문 고전의 깊은 상상력까지 풍부하게 더할 수 있는 책이 나왔다. 역사신학을 전공한 함신주 목사가 코로나19로 세계 여행의 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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