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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한 기대 (삶)/책과 삶

이시대의 종말론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17.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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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의

"모두스 비벤디: 유동하는 세계의 지옥과 유토피아(Liquid Times Living in an Age of Uncertainty)" (한상석 역) 라는 책을 읽고 있다.

 

읽는중에 정제헌 목사님과 카톡으로 대화를 나누게되었다. 그는 지금 광주에서 부목사로 성실하게 사역중이다.  

이야기중에 종말론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교회에서 교역자들이 돌아가며 신학강좌를 여는데 종말론 특강을 한모양이다.

여전히 교회에서 평신도들을 대상으로 하는 종말론강좌는 역사적인 의미에서 종말론, 조직신학내에서 종말론을 다루고 있다.

거기서 조금더 가면 이단 사상에 대응하기 위한 좋은 의미에서 종말론을 가르친다.

전에 대학원다닐적에 신약학 수업조교를 한적이 있다.

마침 성서학 심포지움을 조교들과 진행하면서 구약학 모 교수님께서 세미나를 하셨는데

역시 '구약에 나타난 종말론에 관한 세미나'였다.

그분의 강의중 한마디가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종말론적 개념이 지금까지는 언제오시느냐 어떤 모습으로 오시느냐 였다면,

 이제부터는 우리는 어떻게 기다려야하느냐 여야 한다."

 

동의가 되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예수께서 언제오시느냐 어떻게 오시느냐에 너무나 많은 관심을 기울인 나머지

우리가 그 종말에 어떻게 참여하며 어떤모습으로 준비하고 기다려야 하는가에 대해서

잊어버린채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 종말론은 생태학적인 접근, 우리의 세계를 어떻게 잘 다스리고 보존해야하는가? 여야 하며

사회학적 접근 오늘날 종말론이 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으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고민을 해야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오늘날의 세상을 '열린사회'이며

이 열린사회는 운명의 횡포에 무방비로 노출된 사회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열린사회의 주민은 스스로를 방어할수 없는 상황에서 오는 공포에 질려 사회의 경계가 튼튼한지

그안에 사는 개인이 안전한지에 등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있다고 그는 통찰한다.

다시말하자면 열린사회는 곧 '공포의 사회'라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 공동체는 열린사회로서 소그룹안에서 개방적 자세로 자신의 것들을 나눈다.

나도 전에 사역했던 교회에서 청년 공동체를 향해

우리 공동체는 무엇을 나누어도 안전한 공동체였으면 좋겠다고 한적이 있다.

개방성, 열린 사회가 공포사회가 되는 것은 몇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어떤 권위나 권력에 들어갔을때 다시말해서 소위 약자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떤 시스템이나 권력으로

개방성내지는 열린 사회를 요구했을때 그렇다는 것이다.

열린세상과 개방적 분위기를 위해서 리더십에 의해 파티션을 치운 사무실, Facebook이나 SNS를 통한 민간 사찰등등이 그런것이다.

열린사회와 개방적 분위기는 권위적 분위기가 아닌 평등한 입장에서

그리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기다려주고 함께 머물러 줄때' 가능하다.

 

그리고 둘째로 열린사회가 개방성이 폭력이 될때는' 인간의 공포에 대한 근원적 치유내지는 회복을 경험하지 못할때이다.

(사실 필자는 이부분을 좀더 깊이 다루고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공포에 대한 바우만에 의하면, 공포의 실존적 전율과 행동이 하나가 될때 그리고 그 깊은 심연으로 들어가

인간 공포로부터 자유, 근원적 치유가 시작될때 가능하다.  

 

공포는 방어적인 행동을 유발하는데, 안전에 대한 보장, 세상은 더욱 믿지못하고 두려운 곳이 되어 불안 세상을 조장하게 된다.

더나아가 바우만은 오늘날의 공포는 공포가 유발한 행동들과 그 유발한 실존적 전율이 분리되어 있다는 점을 밝힌다.

그래서 공포로부터 안정감을 주기위해서 실존적 전율 즉 그 불안의 근원으로 들어가

그것으로부터 공포의 근원을 불식시키거나 차단시켜야 그 공포로부터 나오는 방어적 행동 안전에 대한 보장들로부터

안정감을 얻게될텐데 근원으로부터 분리하여 공포에 유발한 행동들에 집중하고 그것을 차단시킬 궁리를 찾기만 한다는 것이다.

 

국가가 실존적 전율을 막아주려고 만들어 관리하던 방어장치들은 점점 해체되고 시장경쟁 압력으로 인해

노동조합이나 그밖의 자기 방어 장치같은 약자들의 결속력들을 약화시키고 있다.

그래서 생존의 수단은 개인에게 맡겨두는 세상, 방어막을 스스로가 치고 살아야하는 세상을 조장하게 되었다.

 

공포의 실존적 전율은 무엇일까? 나는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공포의 실존적이며 근원적인 전율은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다시말해서 인간의 실존적 종말인 죽음말이다.

죽음의 문제로부터 자유하도록 한다면 인간은 먹고사는 문제로부터 자유하게 될것이다.

 

기독교는 이 실존의 문제를 다룬다. 종말론은 인간의 삶에 공포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려줘야한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신 분 사망의 공포를 해결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을 알고

우리의 근원적인 문제로부터 자유함을 얻는다면

예수께서 언제오시느냐 어떤모습으로 오시느냐는 더이상 우리의 관심이 아니다.

어떻게 기다려야하는가가 우리의 관심이 될것이다.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분명 열린공동체이다.

우리의 공포에 대한 실존적인 전율을 근원적으로 치유하기 위해서는 소위 공포에 대한 직면이 필요한데,

그것은 열린 마음, 개방적 태도로 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러한 공포로부터 자유함과 치유는 오직 공동체로 모인이들이 기다려주고 함께 머물러줄때 가능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죄와 사망 우리의 모든 저주로부터 자유케한다는 믿음과 신앙고백으로 가능하다.

그날이 가까울수록 우리가 모여야하는 이유이며,

이시대에 공동체가 필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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