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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든지 죽든지 (신학)

해방 후 한국의 보수계열 개신교회 형성의 역사적 배경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20.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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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한국 개신교의 70%이상이 극우 내지는 보수적인 종교라고 인정한다.
조심스럽게 그 역사적 배경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아래의 글은 수년 전 필자가 한국교회사 학위 논문을 준비하면서 필요를 느껴  짧게 연구한 소 논문이다. 
아직 블로그 기술이 부족하여 각주는 생략한다.ㅜㅠ 
(혹시 참고문헌이나 각주에 대한 질문이 있거나 외부 공유시에 댓글을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해방 후 한국의 보수계열 개신교회 형성의 역사적 배경>>

 

1. 해방 후 출옥성도들의 교회재건운동

 

a. 해방 후 출옥성도와 보수주의 교회의 형성

해방 후 개신교회는 일제시대에 신사참배 반대와 같은 정치적인 저항운동을 했던 일부 보수적인 인사들을 중심으로 보수적인 교회가 형성된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순교한 50여명의 순교자와 20여명의 출옥성도라고 알려진 이들을 중심으로 교회재건운동에 앞장서게 된다.

 

그들은 出獄後 그들의 그립던 敎會家庭으로 돌아가지 않고 獄中에서 殉敎朱基徹牧師奉仕하던 平壤山亭峴敎會로 모여 約 二個月間 滯留하며 韓國敎會再建諸般問題討議하였다.

 

교회의 재건운동에 앞장섰던 이들은 1945920일 신사참배를 반대한 출옥성도들을 중심으로 모였으며 교회재건원칙을 발표하게 된다. 이때 친일파 목회자들의 처리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그들의 發表韓國敎會再建基本原則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1) 敎會指導者(牧師及長老)들은 모두 神社參拜하였으니 勸懲의 길을 하여 痛悔 淨化한후 敎役에 나갈 것. (2) 勸懲自責이나 自肅方法으로 하되 牧師는 최소한 二個月間 休職하고 痛悔自服할 것. (2) 牧師長老休職중에는 執事平信徒禮拜引導할 것. (4) 敎會再建基本原則을 전한 各老會 또는 支敎會傳達하여 一齊히 이것을 實行케 할 것 (5) 敎役者養成神學校復舊再建할 것.”

 

이러한 친일 개신교지도자들의 원칙에 반발한 이들도 있었다. 그중 신사참배를 가결한 27대 총회장인 홍택기목사가 있었다. 초기 보수적인 개신교회의 등장은 출옥성도를 중심으로 강한 반일적이며 민족주의적인 배경을 가지고 등장하였다. 또한 이들의 대부분은 해방후 국가를 재건하는 건국운동에는 참여하지 않았는데, 이들은 보수적인 선교사와 선교회의 신학을 받아들인 보수적인 그룹이었다. 당시 보수적인 선교사들의 신학사상은 어떠했는지 그 신학사상의 영향은 어떠했는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b. 해방 후 보수주의교회의 특징

보수적인 교회 지도자들인 출옥성도들의 신사참배거부 운동에는 독특한 신학적 배경이 있는데 이들은 대부분이 세대주의 전 천년설을 고수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임희국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세대주의 전 천년설을 굳게 붙잡은 교회지도자들은 임박한 예수의 재림을 기대하고 재림과 동시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것을 고대하며 신사참배를 하지 말 것을 강조했다고 한다.

김영재는 북 장로교회와 선교회들은 개혁주의 신앙고백이 강조하는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신앙을 고수하였고 특별히 천년왕국의 그리스도의 왕적인 통치에 둔 신앙을 믿음으로 신사참배에 반대하였다고 하였다. 간하배(Harvie Conn)역시 보수적인 그룹의 천년왕국의 강조는 일제의 신도주의와의 교회의 투쟁에서 강력한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즉 보수적인 선교사들은 대부분이 미국의 매코믹신학교과 프린스턴출신들이며 이들 초기 선교사들의 신학은 칼빈주의에 보수적이었으며 전 천년주의자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전 천년설을 굳게 유지하려는 교회들은 신사참배를 반대하였다. 그러므로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신학사상과 연결되는 문제였던 것이다. 게다가 신사참배반대운동은 흣날 보수와 진보로 구분되는 분기점과 같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김남식도 신사참배의 찬반문제는 신학교육내지 현재의 신학사상과 연결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들의 신학사상을 깊이 통찰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간하배는 자유주의적인 경향을 전통적으로 가지고 내려오던 선교부 간부들이 신사참배에 관하여 완화책을 내세웠다고 하였고 보수적인 장로교 선교부는 신사참배를 강경하게 반대하는 주장을 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신사참배의 문제가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를 구분하는 기준이기도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대체로 일제의 순교자들과 출옥성도들의 신학이 보수적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당시 교회재건에 앞장선 보수적인 기독교신자들의 사회에 대한 입장은 어떠했을까? 이미 필자가 언급한대로 대체로 해방 후 보수적인 출옥성도들은 국가의 건국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들 전 천년주의자들은 확고한 정교분리적 입장이었기 때문이었다.

박용규는 초기 한국 선교사들은 전 천년주의자들이었으며, 성경의 무오와 성경의 다른 근본 교리들 뿐 만아니라 일제 식민통치기간에 전국적으로 일어난 신사참배운동과 직접적인 연계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암울한 정치와 종교적인 현실 때문에 자연히 이들은 현실보다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동시에 성도들과 통치하는 천년왕국을 소망했던 것이었다고 말한다.

즉 전천년설을 고수해온 보수주의 선교사들과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정치나 사회적 관심보다는 현실 도피적이며 내세지향적이며 종말론적인 관심을 갖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해방후 등장한 보수적인 개신교는 신사참배반대 운동과 세대주의 전 천년설을 고수한 내세지향적이며 정교분리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2. 신탁통치논쟁에 대한 보수주의 교회의 입장

 

갑작스럽게 맞이한 해방정국에 기쁨도 잠시 반탁과 찬탁의 두 양갈래에서 혼란스러운 그 자체였을 것이다. 이러한 국가의 중대 상황속에서 개신교회가 취한 입장은 반탁의 입장이었다. 왜 이들은 반탁의 입장을 취한 것일까?

김홍수는 반탁과 찬탁의 국면에서 개신교회는 반탁의 입장을 취했으며 그 입장을 가장 먼저 표명한 것을 19451127~30일 정동제일교회에서 열린 조선기독교남부대회에서 였다고 밝히고 있다. 조선기독교남부대회는 당시 일제시대로부터 해방한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의 명칭을 조선 기독교교단으로 바꾸고 남한만의 대회를 가짐으로써 조선기독교남부대회라고 하였다. 그리고 남부대회를 계기로 정치적 성격을 강하게 띤 기독교 신민회와 독립촉성기독교중앙협의회가 탄생했으며 김구(金九)와 한독당의 기독교 지지기반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반탁을 주장했던 김구는 경찰서(警察署)열을 세우지 말고 교회(敎會)하나를 세우라........곳 성서(聖書)우에 세워야한다. 그리하야 우리는 하나님의 국민(國民)이 되어 서로 잘살자.”라고 하며 기독교 지지기반으로 반탁운동을 실시하게 된다. 또한 194663일 정읍발언에서 단독정부 구상을 밝힌 이승만(李承晩)만세반석(萬世盤石)되시는 그리스도 우에 이 나라를 세우자고 하였고 이에 교계 지도자들이 이승만의 건국운동에 힘을 실어주었던 것이다. 해방후 보수적 개신교는 임시정부, 한민당(한국민주당), 독립촉성중앙협의회 등의 우파 정치세력으로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과에 반발하며 신탁통치 반탁을 결의하였다.

안종철은 미군정 참여 미국 선교사들의 대한민국 수립에 대한 입장을 연구한 글에서 이승만을 절대적으로 지지했던 선교사그룹은 반공 이데올로기와 선교활동의 자유를 위해 대한민국 정부의 수반 이승만을 전제군주라고 보고 대한민국의 탄생을 우호적으로 보았다고 하고 있다. 그러므로 반탁과 단일 정부수립 입장을 취한 개신교는 대체로 친() 이승만계열의 보수적인 교계 지도자들과 선교사들의 영향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승만은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보수적 개신교의 지지기반으로 수립하게 되었다. 1948531일 제헌국회 개원식에서 1025분에 대한민국 임시의장 이승만이 등단하여 대한민국 독립민주국회 제1차의회를 열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바이다. 먼저 서울시 종로갑구 국회의원 李允榮氏 나와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기 바란다.’고 이윤영(李允榮)을 지명하여 총기립하에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게 하자 이윤영은 앞날의 독립과 행복을 비는 기도를 하였다. 강인철은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내각 21개 부서장 가운데 9명이 개신교 신자였고 그중에 2명이 목사였다 게다가 개신교 신자 정치인들은 국가기구중에도 주로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수행하는 역할을 했다고 분석하였다.

반면 좌익계는 1946년 여운형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운동이 추진되고 19472월 북조선 인민위원회가 출범하면서 좌익진영이 등장하게 되는데, 3.1운동당시 민족 대표 33인중에 한사람이었으며 감리교신학교의 교수였던 김창준 목사가 민족주의 민주전선(약칭, 민전)에 참여하게 되고 좌익 개신교 진영으로써 대표를 맡았다. 그는 기독교민주동맹을 출범시켰고, 모스크바 삼상회의를 지지하였다. 그 선언문을 살펴보면,

 

상호평등적인 민주주의 연합국과 친선관계를 맺으면서 우리나라의 완전한 민주독립을 위하여 국제헌장으로서 보장된 국제 평화노선인 막부 삼상결정으로 총체적으로 지지하고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에 협력하자

 

그 후 김창준은 1948남조선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하는 남조선정당단체에게 고함이라는 문건과 초청장을 받고 월북하여 그대로 잔류하게 된다. 신탁통치 논쟁은 1948년 각각 남북한 단독수립으로 종결하게 된다.

정리하면 해방후 신탁통치논쟁에서 보수적개신교의 입장은 이승만과 김구등의 보수적이며 우파적인 입장의 반탁 입장을 지지하였다. 보수주의 교회가 우파의 입장을 따랐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흥미있는 사실이다. 이것에 대해 보수적인 신학이 정치적 우파와 어떤 연결점이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대체로 이 둘의 연관성에 대해서 신학적인 연결점 보다는 정치적이며 이데올로기적이며 상호 복잡한 요소가 작용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3. 미군정과 반공주의 형성

 

a. 미군정의 친미적성향

해방 후 개신교는 1920~30년대에 등장한 사회주의, 공산주의자들과 갈등 겪으면서 미군정의 친미와 반공주의를 중심으로 성장하게 된다. 한국 기독교의 친미적인 성향에 대한 배경으로 강위조(Wi Jo Kang)2차세계대전이후 선교사들과 미군에 대해 한국인들은 일제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킨 해방자로 여겼고, 그들의 개선을 축하해주는 특별집회를 갖기도 하였으며, 미국 정부 관리들은 선교사들의 긴밀한 협조를 환영하였다고 하고 있다. 또한 대다수의 독립운동을 하다가 해방후 귀국한 정치지도자들이 기독교인들이었다. 이들 대다수는 미군정시기 해방 후 국가재건에 참여하였다.

미군정시기는 한국인들의 해방정국의 혼란스러움과 반일감정으로 인해 당시 관리와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서 더 이상 일본인들을 이용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그 자리에 적당한 한국인을 임명하였다. 이들의 대부분은 미군정의 통치기반에 편의를 위해 영어를 구사할수 있었다는 점에서 미국 유학을 경험이 있는 지주였던 지식인 계층이었거나 기독교인으로서 미군과의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특별히 서북지역의 지주들로 구성이 되었던 이들은 평양신학교와 숭실전문학교 출신의 기독교인이 대다수였고 이들은 기독교인으로서 미군정기의 정치에 참여하였다. 장동수는 그의 논문에서 정계에 입문한 대다수의 개신교인들은 유학파 출신임을 발견하였고, 미국이나 일본 유학출신자들에 비해 비유학 출신자들은 미군정의 참여가 상대적으로 주로 적고 좌파계열의 단체에서 주로 활동한 것으로 분석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안창호가 창립한 흥사단내지는 수양동우회에 가입하여 이 단체를 주도하게 된다. 좌파계열은 여운형의 건국 준비위원회와 박헌영의 조선공산당과 연합하여 조선인민공화국을 설립하게 된다. 당시 미군정이 해방후 19467월에 실시한 대규모 여론조사에 따르면 한국인 85%가 대의기구를 통한 모든 인민의 지배가 바람직한 정부의 형태라고 응답하였으며 사회주의 지지세력이 약 70%, 공산주의 지지세력이 약 13%정도 자본주의지지 세력이 약 17%로 나타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먼저 해방후 국민들 사이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어떤 의식이 있었으며, 사회주의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있었을까? 전상인에 의하면 사회주의'라고 답한 사람들은 막연히 '다 같이 잘 살아 보자'는 국민감정을 표출한 것이지 당시 분명한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의식이 높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어 체제 선택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강준만은 당시 해방정국의 신문들은 좌익이 우세했으며, 이러한 매체의 여파가 민중들의 사고에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보고 있다. 좌파계열의 기독교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연구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공산주의와 기독교사회의주의 관계, 해방 후 북한에서 기독교사회주의지도자들의 활동을 통해 해방 후 진보계열의 개신교의 형태가 어떻게 나뉠 수 있는지, 분단이후에는 좌파계열 혹은 진보주의 개신교와 어떤 연결점을 가지며 존재하는 지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b. 보수주의 우파계열의 정당활동

흥사단과 수양동우회와 서북지역의 정치세력은 한민당을 결성하게 된다. 해방 후 일제하 온건하게 민족운동을 하였던 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정당 결성 움직임이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신간회간부였던 김병로, 백관수 수양동우회의 조병옥과 고려민주당을 조직했던 원세운 등으로 818일 정당 발기회를 개최하였다. 한편 해외유학파와 소장세력을 중심으로 한국국민당 발기회를 개최하였다. 하지만 민족주의세력의 정당이 갈라져서는 안된다는 의견에 의해 92일에 한민당 발기회를 개최하게된다. 916일 천도교회관에서 100여 명의 대표자들이 모인 가운데 한국민주당’(한민당)을 창당하였다. 한민당은 민족주의대표와 더불어 좌파의 세력에 대한 견재세력으로서 그리고 이승만의 반탁과 단정노선을 추진하기 위해 등장했다는 의견도 있다. 당시 남한에서는 우파계열의 정당활동을 통하여 그리고 북한에서는 좌파계열의 정당활동을 통하여 사회갈등에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점점 남한과 북한은 심한 이데올로기적 갈등을 겪기 시작했다. 강인철은 한민당의 집단지도체제에 의해 운영된 한민당의 8인의 총무가운데 5인이 저명한 개신교 지도자들이었다고 분석하여 밝히고 있다. 더불어 미군정과의 교섭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해외유학부라는 별명이 붙은 외교부원 9인가운데 적어도 5명이 개신교신자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김구를 중심으로 임정세력인 한독당은 또 다른 보수주의 우파계열로 정통 민족주의적지향을 보여주었다. 한독당의 이대위와 오택관, 이남규등이 목사로서 정당활동에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한독당은 이승만의 단일정부추진과 강한 민족주의적 성격으로 인해 미군정과 관계를 맺기는 어려워 점차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진덕규는 미군정시기 정치적 주도계층의 형성과 관련하여 미국지향적인 인사가 자행되었으며, 기독교와 친미 반공성향의 보수우파중심 그리고 반일에 소극적이었던 부일 친일적인 기회주의적인 인사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민족주의적인 정치지도자들을 반영할 수 없었다고 밝히고 있다.

미군정 관료에 등용되었던 한국민주당(한민당) 발기인 및 당원들은 미군과 협력하고 보수적이며 일제시대시 지주와 관료출신들이 많은 소극적 항일인사였으며 기회주의적인 인사였다. 게다가 종교적으로는 대다수가 개신교 지도자들이었으며 개신교인들은 정당활동과 사회단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서 반공우익단체를 지지하였다. 관련하여 한민당의 당원들을 평가하고 이들의 성향과 종교를 분석하는 연구가 찾기가 쉽지 않다. 특히 개신교인들이 해방 후 국가재건에 있어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데 이는 오늘날 보수주의 교회의 정치참여에 대한 역사적 분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c. 반공주의형성

1920년대 등장했던 사회주의운동가들의 반종교운동을 펼침으로 인해 개신교인들과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1925417일 조선공산당 조직을 위한 창당대회에 몇 가지 원칙을 발표하게 되는데, ‘일본 제국 자본주의에 대항하여 투쟁할 것과 기독교를 타도하자6가지 투쟁슬로건을 통과하게 된다.

개신교는 19329월 조선예수교 연합공의회에서 채택한 사회신조를 발표하게 된다. 사회신조 전문(前文)에는 기본입장이 천명되고 있는데 그리스도만이 사랑과 평화, 그리고 정의의 이상(理想)이라고 선언하고 일체의 유물론사상과 계급투쟁, 혁명 및 반동적 탄압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천명하였다.

한편 해방 후 반공주의형성과 관련하여 김양선의 글에서 개신교회가 격렬하게 반공운동을 통해 성장하였던 이유에 대해서 다섯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 공산주의는 무신론을 주장하기 때문에 둘째, 공산주의는 유물론에 입각하여 인간도 유물적으로 보기 때문에 셋째 반종교 반기독교이기 때문에. 넷째 폭력혁명과 독재(獨裁)를 하기 때문에. 다섯째 인간의 자유를 구속(拘束)하고 세계를 뇌옥화(牢獄化)하기 때문에. 여섯째 공산당이 한국을 지배(支配)하게 되는 때에는 한국은 소련(蘇聯)의 지배(支配)를 받겠기 때문이다.”

 

즉 해방 후 개신교는 강한 반공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개신교의 강한 반공주의와 관련하여 강인철은 해방이후를 개신교 반공주의가 정형화되는 시기라고 보고 있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초기 정치권력의 중심부로 들어간 개신교 지도자들은 사회주의에 대한 공격에 앞장섰고 사회주의와 개신교는 극심한 갈등이 일어났다. 당시의 월남한 사람들의 계층을 중심으로 월남의 동기를 연구한 통계 및 자료들이 있는데, 조형과 박명선의 연구에 의하면 월남자들 중 중상위층들은 정치와 공산당의 사상에 대한 반대와 종교탄압 그리고 농지개혁 등으로 인한 재산상의 피해로 인하여 월남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장병욱은 194510월부터 19484월까지 전체 월남자 숫자를 최소 80만명, 최대 200만명으로 추산 후 이중 70%이상이 개신교인이고, 또 이중 절반이 서북지역 출신자라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왜 월남했는가에 대해서는 강인철의 연구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강인철은 당시 미군정의 통역관으로 임명된 서북지역의 지주들에 대해서 연구하였다. 이들은 북에서 사회주의와의 격렬한 대립으로 인해 갈등했던 서북지역의 기독교인들이 대거 남하 하면서 남한 개신교회는 매우 공격적인 반공주의 자들의 집결지가 되었다고 보았다. 왜 이들은 사회주의와 갈등관계가 되었을까? 먼저 1920년이후 북의 사회주의자들은 친일의 청산과 반종교운동을 하였다.

서북지역의 지주들은 대체로 개신교인들이었다. 사회주의자들과 기독교인들 사이에 큰 갈등이 있었다. 이들은 19451116일 기독교 사회민주당 용암포지부 결성대회에서 공산주의자들이 급습하였다. 이를 계기로 1123신의주 학생의거 사건이 일어났고 공산당과 소련군의 진압으로 인해 많은 사상자가 생겨났다. 이러한 기독교와 공산정권의 충돌은 1946년에 일어나게되는데, 113일 주일에 인민위원회 총선거일 일정을 정해놓고 이를 강행하고자 했다. 이에 이북5도연합노회가 중심이된 주일선거 반대운동이 시작이 되었고, 김양선에 따르면, 1020일 주일성수 문제를 가지고 결의문을 채택하여 당국에 통보하게 된다.

 

北韓二千敎會三千萬 基督敎信徒들은 信仰守護敎會發展하여 五條項敎會行政原則信仰生活規範....... . 聖守主日生命으로 하는 敎會主日에는 禮拜以外如何行事에도 參加하지 않는다. . 政治宗敎는 이를 嚴格區分한다......., 現職敎役者政界從事境遇 敎職辭免해야한다........”

 

공산당 정권은 노동당 제2차 대회가 열린 19483월 전후로 친미성향을 띤 교회지도자들을 강하게 공격하였다. 결국 이들은 공산정권의 박해에 월남을 선택하게 된다. 1945년부터 1950년까지 약 5백만명의 북한주민들이 공산주의 박해를 피하고 경제적인 자유를 갈구하여 남한으로 탈출했다. 그리고 남한에 친미적이며 반공정신으로 무장한 교회를 세우게 된다. 그중에 한경직목사가 개척한 베다니전도교회(영락교회)가 있으며 월남한 청년들이 많이 있었다. 영락교회가 반공주의의 정신으로 무장했다는 사실은 한경직목사의 1947년의 설교를 통해서도 발견할수 있다.

 

저들의 말 그대로 공산주의이야 말로 일대 괴물입니다. 이 괴물이 삼천리강산에 횡행하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이 괴물을 벨 자 누구입니까? 이 사상이야말로 묵시록에 있는 붉은 용입니다.”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는 주재 지주들은 대체로 항일운동에 소극적인 사람들이었으며, 당시 토지개혁에 반발했는데, 당시 지주들이 자진하여 토지를 포기하였을 경우 가옥을 소유하고 그 고장에서 사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리고 몰수한 토지들은 가정의 총점에 근거하여 농지의 품질에 따른 차이를 감안하여 재분배를 행하엿다. 그렇지 않을 경우 타 지역으로 옮겨가 적은 농토를 배당받았다. 월남한 서북지역의 개신교인들은 대체로 부유한 지주계층이었을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이들의 대부분은 남한을 택하여 내려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강정구 역시 해방직후 월남집단은 주로 지배계급이 주도하였다고 보았으며, 이들의 월남 동기는 주로 정치(반민족행위자들에 대한 제재), 사상적 요인과 계급(반공, 반북이데올로기), 경제적 요인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로 인해 서북지역의 지주 출신들은 강한 반공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6.25전쟁을 겪게 되면서 우익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정치적 세력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들 서북지역의 유학파들과 친미적 성향을 가진 개신교인들은 미군정의 선호한 조건들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미군정의 관료로 인명됨과 동시에 대한민국정부의 권력구조의 핵심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박현채는 미군정은 1930년대 일어난 수많은 소작쟁의나 노동쟁의를 모두 공산주의자들의 책임으로 돌렸으며, 반공이라는 정치기반을 가진 미군정이 일본인 대신 맞아들인 최고 간부급 한국인들은 영어회화능력이 있는 사람들뿐이었다고 하였다. 그는 이 능력은 영.미권등의 외국에서 교육을 받은 부유층임을 의미하거나 기독교 미션계 학교에서 교육받은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의미 하였다. 그래서 이 부유한 교육받은 기독교인들이 공산주의자들에게 적개심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보았다.

 

d. 6.25 한국 전쟁이후 심화된 반공주의

6.25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전쟁의 원인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적개심으로 가득하게 되었다. 허준은 6.25전쟁 경험을 통해 교회의 역사인식에 끼친 영향에 대한 연구에서 실제로 구술사적 작업을 통해 한국교회가 한국전쟁의 비극적인 경험으로부터 북한정권과 공산주의에 대한 태도는 굉장히 적대적인 것이라고 분석하였다. 그렇다면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한국전쟁의 인식은 어떠했을까? 허명섭은 6.25 한국전쟁에 대한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세 가지 정도 인식이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첫째로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둘째는 하나님의 원수인 공산당과의 전쟁으로 여겼다. 셋째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여겼다.

강인철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전쟁의 원인을 공산주의로 돌리며 사탄론이 급증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즉 전() 천년설주의자들이 공산주의를 사탄이나 말세의 징조로 보았고 그 결과 반공주의에 민족주의적 선민의식과 구원론적 요소들이 가미되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신흥종교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이들 박태선이나 나운몽 등은 강한 반공주의사상을 종말론적 구원론과 결부시키는 공통분모로 갖고 있다고 하였다.

한국전쟁 후 1952년 장로교 총회(37)는 이북노회의 총대를 초청하기로 결정하였고 13개의 이북노회가운데 10개 노회를 월남노회로 인정했다. 당시 총회 산하 전국 노회수가 25개였는데, 이 가운데 이북노회가 10개였으며, 월남 피남민 교회의 교세는 장로교 총회의 약 40%를 차지했다. 그러니 남한의 한국교회는 반공정신이 강한 집결지였다는 의견이 어느정도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e. 친미와 반공성향의 보수주의 개신교형성

해방 후 미군정시기의 정치권력의 중심부로 들어간 한국인 고위행정 담당자들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이들은 이미 살펴 본대로 미군정시기 일본 관리들이 면직되면서 그 자리를 영어를 구사할 줄 아는 한국인 통역관을 중심으로 세웠는데, 이들 통역관은 민족의식이 결여된 인사들로 유학생출신으로서 기독교와의 연관성 그리고 기회주의적이며 친일적인 성격을 견지한 인물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우파주의적임과 동시에 미군정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친미적인 성향이 강하게 나타났다고 하였다. 그래서 미군정시기 행정과 정치는 한국적 성향을 발전시키고 반영된 것이기 보다 미군정의 정치와 행정정인 뒷받침을 해주는 기능을 반영하였다. 즉 해방후 한국의 반공주의는 친미와 함께 등장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한국교회역시 친미와 반공주의가 함께 형성이 되었다고 할수 있는데, 허명섭은 한국교회의 이러한 현실정치의 적극적인 태도에 대해 해방 후 높아진 기독교의 위상, 1920년 사회주의 논쟁을 겪으면서 형성된 반공주의 노선, 우호적인 미군정의 수립, 기독교지식인들의 등장이라고 보고 있다.

해방 후 미군정기안에서 친미적이며 반공주의적인 개신교 보수주의 집단은 미군정의 해외 선교사들과 이해관계에 있었으며, 대부분이 우익계의 정당 단체이며 친() 이승만계열이었던 한국 민주당에서 활동하였다. 한국기독교는 건국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수많은 정치인들을 배출하였다. 안교성은 건국에 참여한 기독교인들은 보수층이 정치적 활성화 성향을 보이고 있으며 이들은 친미주의의 대표자이며 민족주의집단가운데서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해방 후 미군정에 의해 재편되는 한국의 건국과 재건에 깊이 참여하였다고 하였다.

이들의 친미적이고 반공주의적인 성향 미군정과 깊이 연대하여 친정부적인 성향은 당시 친일청산과 민족적 통일에는 그렇게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미군정은 한국적 상황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그들의 통치의 편리를 위해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소위 통역관 정치를 펼치게 되어 민족주의자들을 배제한 인재등용으로 인해 반발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대부분이 개신교 지도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결국 이들을 통해 반세기 넘는 분단국가가 되었고, 친일 청산이라는 과제는 친미를 등에 엎고 뒤로 하게 되었다. 오늘날 진보와 보수간에 뿌리 깊은 골은 친미와 반공이라는 보수주의자들의 정치이념의 고수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커밍스가 인용한 글에 의하면 다른 한 쪽인 급진적 혹은 공산주의적 집단은 여운형에 의해 조직된 집단으로 주된 힘이 인민공화국에 있다고 하고 있다. 해방 후의 보수와 진보는 이데올로기에 의한 정치이념의 나뉨으로 보는것이 타당하며, 당시 보수와 진보의 갈림길은 정당 활동을 통해서 내지는 사회 활동을 통해서 구분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남한에서 진보적 성향은 강한 반공주의로 인해 월북하거나 그 세력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고 소멸되었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

 

4. 교단의 분열과 보수주의 개신교 형성

 

a. 교단의 분열과 형성 의 역사

해방 이전 1920~30년대는 미국과 일본에서 유학한 유학생들에 의해 자유주의적인 신학이 한국에 소개되어 보수주의 신학과의 갈등이 있었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해방이전 한국교회와 지도자들은 내한 선교사들의 근본주의적이며 축자영감설, 세대주의 전 천년설, 정교분리원칙등을 고수하는 보수수의 신학의 영향을 받아 보수적인 신학이 형성되고 유지되었다. 그러다가 1930년대에 아빙돈 단권주석 (The Abingdon Bible Commentary,1930)번역으로 인해 갈등이 시작되었다.

 

류형기 목사가 어빙돈 단권 성경주석을 펴내자 이 성경관의 논쟁은 한층 격화되어있다. 이것은 그 뒤 소위 <모세 5경설>에 관한 논쟁으로 발전하여 장로교 안에는 길선주, 강병주, 박형룡씨 등이 중심이 된 보수파와 송창근, 김영주, 김춘배씨등이 중심이 된 진보파로 갈라지게 되었다.”

 

아빙돈 성경주석은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 제24(1935)’에 정죄당하였다. 결국 어빙돈주석 집필자인 채필근, 한경직, 송창근, 김재준은 징계를 받게 되었다. 즉 진보와 보수간의 신학적인 갈등은 성경관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우리 교회는 복음을 처음 받을 때 부터 잇어온 그대로.....5경과 신구약 모든 책을 다 포함하는 성경전서를 하나님의 말씀이요, 신앙과 본분의 정확무오한 법측으로 밋기를 조곰도 주저할 리유가 업스며..... 그런 사람은 우리 교회신조 제 1조에 위반하는 자임으로 우리 교회 교역자됨을 거절함이 가하나이다

 

보수주의 개신교회는 좀더 분명한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진보주의 그룹과 첨예한 대립속에 등장하게 된다. 이런 갈등은 지역구도속에서도 드러났다. 서북지역인 평안도와 황해도 그리고 경상도와 대구지역의 선교사들이 근본주의 신학을 내세우며 세력을 키웠고, 진보적인 신학을 옹호했던 서울과 경기지역과 호남지역이 있었다. 이러한 대립은 결국 해방 후 1950년에 들어가면서 교단의 분열로 이어지는데, 이는 신학적 입장으로 시작되었지만 6.25이후에 나타난 강한 이데올로기적 분열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1953년에 김재준의 신학사상에 대한 박형룡의 반발로 인한 예장과 기장의 분열이다. 보수계열은 김재준의 신()신학을 용공(容共)으로 몰아붙였다. 강인철은 교단의 분열과정은 보수 반공 개신교지형의 형성의 강화라고 보았다. 단순한 친일파청산을 넘어 반공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역할도 수행했음을 시사되고 있다. 그러므로 NAE의 보수계열은 WCC 가입한 교회들과 김재준의 신학을 용공(容共)이라고 비난했던 것이다. 그리고 1959년 박형룡의 ‘3천만환 유용사건의 책임을 지고 퇴진한 박형룡의 복권(復權)을 통해 보수신학의 고수를 위한 NAE 측의 에큐메니컬 운동에 대한 반발로 WCC측과 대립하게 되면서 결국 통합과 합동이 분열하였다.

해방 후 한국교회의 교단의 분열의 역사는 유학파들로 이루어진 신()신학의 유입에 대한 보수신학의 경계로부터 시작되었다. 즉 아빙돈 성경주석사건, 여교역자 안수문제 등의 성경관을 놓고 대립각을 펼치다가 점차 정치적인 갈등으로 증폭되었는데, 박형룡의 삼천만원 유용사건을 통해 드러난 보수신학의 신념을 확고히 지키려는 NAE 진영과 WCC 진영 그리고 반공주의가 그 중심에 놓여있게 되었다. 근본적이며 보수적인 신학을 고수하는 NAE 진영과 진보적인 신학으로 대변되는 WCC 진영의 교회 분열의 형성과 갈등의 역사는 현대 교회사의 진보와 보수로 갈라지는 분기점이 되었다.

 

b. 교단의 분열과 반공주의

민경배는 1954년 복음주의협회 NAE(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의 등장으로 WCC(World Council of Churches)의 에큐메니칼 계열 운동과 이념에 대한 도전을 NAE 계에서 시도하면서 격화되기 시작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칼 메킨타이어(Carl Mcintyre)가 국제기독교협의회 ICCC(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1948년에 창립함으로 WCC와 갈등이 고조(高潮)되었다.

ICCC의 칼 메킨타이어와 박형룡과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ICCC의 칼 메킨타이어는 극우 반공주의자이며 근본주의 신학의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박형룡은 복음주의협의회(NAE)회원이었다. 한국복음주의협의회는 미국 교회 주류와는 거리가 있는 근본주의적 보수 반공주의자인 칼 매킨타이어와 밀착했다. 그 이유에 관하여 박용규는 성경의 무오성, 삼위일체, 동정녀탄생, 대속적 죽음, 육체적 부활등 정통적인 교리를 표방하며, 로마 가톨릭과 WCC에 대한 엄격한 반대 공산주의에 대한 철저한 거부, 자유주의에 대하 전투적 반대 등 ICCC가 표방하고 있는 방향은 합동측이 지향하는 방향과 유사한 점이 많았다고 하였다.

한국정부 역시 대대적으로 WCC를 반대하였고, 정병준은 한국전쟁이후에 한국정부에서 WCC를 반대했던 이유에 대해서 이승만대통령과 그 측근 교계인사들이 배후에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강원용은 1954년에 이승만은 WCC가 평화공존을 이야기 한다는 이유로 공산주의라 여겨 WCC대표에게 여권을 주지 않았다고 하였다. 평화공존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여권을 내주겠다는 헤프닝도 있었다고 한다. WCC를 둘러싸고 점차 신학적인 문제제기 보다 정치적이며 이념문제로 전향되고 있음을 볼수 있다. WCC의 문제가 점차 신학적 문제에서 이데올로기적 문제로 전도(顚倒)되었을까? 왜 보수계열은 WCC 운동에 대해 용공이라고 하였을까? 대체로 WCC가 용공주의로 몰리게 된 사건의 중심에는 한국전쟁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WCC가 한국전쟁시에는 세계정의라는 명분하에 북한의 무력 침략 행위에 대한 UN군의 군사적 조치를 찬성하는 등 적극적으로 남한을 도왔다. 그러나 1952WCC는 빌링엔 대회를 개최하면서 미국 NCCWCC가 휴전문제를 다루면서 1953년을 중심으로 이승만에 의해 용공주의단체로 몰리게 되었다. 서정민은 한국교회가 WCC를 바라보는 많은 태도들이 있지만, 근본적이며 보수적인 신학적 성향문제보다 용공문제에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당시 한국의 분단과 전쟁이라는 민족사회의 콘텍스트로부터 영향을 받은것이라고 보았다.

1948년 암스테르담(Amsterdam)에서 WCC가 처음 조직될때에 한국에서는 장로교의 김관식이 참석하였고, 1954년에 에반스톤(Evanston)에 모였을때에는 김현전, 명신홍, 유호준이 참석하였다. 1954년 미국 에반스톤(Evanston)대회에서 공산국가 교회대표들을 참여시킨 가운데 공산국가들과의 평화적 공존(共存)문제를 논의하자 한국 대표들은 공산주의야 말로 모든 종교를 말살하려는 전 세계적인 제국주의임을 주장하면서 평화공존 노선에 대한 반대입장을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그러나 에반스톤 대회에 참석한 김현정은 WCC는 단일 교회 형성과는 무관하고 용공은 더군다나 아니며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하나 칼 빠르트(Carl Barth)씨 정도의 사상이라고 해명하였다.

정리하면 교단의 분열은 성경관으로부터 시작하였다가 박형룡과 김재준의 두 신학자를 중심으로 보수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으로 양분화되었으며 점차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보수신학으로 대변되는 NAE 측과 자유주의 신학으로 대변되는 WCC 측으로 나누어져 정치적인 논쟁이 중심을 이루었음을 알수 있다. 이러한 정치적인 논쟁의 중심에는 반공사상이 함축되어 있으며 반공주의로 인한 갈등의 구조는 60~70년 민주화운동시기에 NAE측은 교회의 성장과 복음주의 운동으로 WCC측은 민주화운동으로 나뉘어 졌으며 오늘날까지 이르러 보수와 진보의 양 갈래로 갈라지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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