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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그리고 한 페이지 인생

[유럽여행]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의 방패교회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24. 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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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비전트립팀이 향한 곳은 알자스 로렌지역의 ‘스트라스부르’(Strasbourg)다. 스트라스부르는 독특한 곳이다. 독일과 프랑스 간의 문화들이 교차되고 있다. 지금은 프랑스의 영토였지만, 이곳은 옛 독일의 점령지 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복잡한 역사보다는 그저 아름다운 마을로 유명한 곳이다. 성 토마스 교회와 방패교회를 위해 오랜시간 버스 여행을 시작했다. ‘작은 프랑스’라 불리는 이곳 스트라스부르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도시의 아름다움에 넋을 나가 방문의 목적을 잃을수도 있겠다. 비전트립팀이 이곳을 방문한 목적은 다름이 아니라 종교개혁자 ‘깔뱅’의 자취를 찾기위해서이다.

 




스트라스부르 안쪽 지역을 다니다가 만난 칼뱅의 생가와 방패교회는 프랑스에서 깔뱅이 목회한 첫 교회이다.
종교개혁자 깔뱅은 제네바에서 성경교사이자 목회자로 사역을 하던 중 추방령을 받아 프랑스 남부로 피신을 온다.
칼뱅은 스트라스부르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부처(Martin Bucer)를 이곳에서 만난다. 부클리에 주변에서 마틴 부처의 생가와 깔뱅이 재세례파 미망인과 결혼해 살던 신혼집을 볼 수 있었고, 그가 목회했던 방패교회를 방문할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방패교회는 목회자인 내게 중요한 인상을 주었다. 방패교회가 세워진 설립의 목적때문이었다.


방패교회는  프랑스 파리의 개신교도들인 위그노들은 로마가톨릭과 정부의 박해을 피해 조국을 떠나게 된다.
이후 그들은 스트라스부르에 정착한다. 

마르틴 부처는 깔뱅에게 프랑스 피난민 교회인 방패교회에서 목회를 부탁했다. 이곳은 소위 피난민들을 위한 피난민 교회인것이다.
깔뱅이 이곳에서 1538년부터 1541년까지 3년의 짧은 시기동안 목회를 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역사 중 상당한 결실을 이곳에서 맺게 됐다. 깔뱅은 이곳에서 기독교강요를 출판한다.  

방패교회에서


방패교회는 개혁교회의 정신을 그대로 교회의 내부에 실현해놨다고 평가를 받고 있는 교회였지만, 우리가  방문했을 때에는 그곳의 안을 들여다볼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방패교회는 여전히 피난민들과 소외된 이들을 위한 목회의 현장으로 쓰임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방패교회가 그저 박물관이나 역사의 낡은 기념 건축물이 아니라 여전히 그 부르심에 맞게 서있는, 살아있는 교회였기에 우리가 함부로 대할수 없었던 것이다. 유럽의 많은 교회가 박물관이 되었다. 기념건물이 되었다. 하지만 방패교회를 통해 신선한 충격을 받은 것은 그곳은 지금도 세워진 목적에 따라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생생한 목회의 현장 이라는 것이다. 

교회의 위대함은 다른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그 지역에 세워졌을때, 
그 세워진 목표와 부르심의 방향을 수백년이 지나도 지켜왔을때 그 자리에 그대로 서있을때 나오는 것이다. 
방패교회는 그런의미에서 위대하다고 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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