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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든지 죽든지 (신학)/조직신학

칼빈의 칭의와 성화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09.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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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신옥수교수님의 구원론 시간에
발제한 글로서, 칼빈의 기독교강요 11장~19장까지의 내용과 칼빈 500주년 단행본
그리고 본교 종교개혁기념 학술강좌 조직신학 교수이신 현요한 교수님의 논문을 요약과 참고하여
칼빈의 칭의와 성화 (이중칭의)의 내용을 발제하였다. (각주는 생략하겠습니다.)


칼빈의 칭의와 성화

서 론


칼빈은 칭의와 성화를 분명히 구분했다. 이 두 가지 은혜는 믿음으로 얻어지며 같은 원천에서 나오는 분리되지 않고 구별되는 선물들이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3권 1장에서 '성령'에 대해서 믿음은 성령의 역사임을 간락하게 설명하고 있다. 2장에서는 믿음에 대해서 길게 설명한다. 이어서 3장에서 '믿음에 의한 중생: 회개(poenitentia)를 설명한다. 6장~10장까지 '그리스도의 삶' 부분에서 그의 성화론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또한 칼빈은 3권 11장~13장에서 칭의론을, 그리고 14장~ 19장까지 칭의의 지속적인 발전으로 칭의론에서 성화론을 다루고 있다. 

정리해보면 칼빈이 성화론을 다룰 때에 먼저 성령의 역사를 그리고 칭의에 앞서 회개와 중생을 먼저 언급하고 있다. 칼빈은 왜 칭의에 앞서 회개와 중생을 먼저 언급했을까?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칼빈은 이런 순서를 택한 이유를 분명하게 말한다. 

"이점을 올바르게 깨닫게 되면 우리는 인간이 어떻게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칼빈이 이러한 순서 채택은 칭의보다 중생에 더 중점을 두었다는 의미도 아니고 그 둘 사이의 인과 관계를 소개하려고 한 것도 아니다. 칼빈은 중생을 똑같은 수준에서 병렬하여 취급했다. 그러므로 성화가 시간적으로 칭의를 따라오는지 또는 성화가 칭의로부터 발전하는지 질문할 수 없다. 이는 칭의가 행위를 배제하지만 칭의는 선행과 무관할 수 없기 때문이다. 



1) 칼빈의 칭의론 



칼빈에게 "칭의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으로 인정하사 그의 사랑 속으로 받아들으시는 것이다. 또한 칭의를 죄를 씻는 일 (the remission of sins)과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키는 일(the imputation of Chirst's righteousness)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Inst.,Ⅲ,11,2. 라고 하였다. 

또한 의는 그리스도의 의로서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사람에게 전가된다. 칼빈은 이렇게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의한 칭의를 법적인 선언의 문제로 이해한다.

"첫째 하나님은 그의 시선을 칭찬보다는 항상 책망 받아 마땅한 그 종들의 행위로부터 돌려 자신과 화해시키신다. 둘째 그의 부성적인 관용과 인자하심으로, 그리고 그 행위의 가치를 고려하지 않고 그는 행위들을 이러한 영예의 자리로 올려주셔서, 그것들에게 얼마간의 가치를 부여하신다. 셋째 그는 바로 이 행위들을 용서와 함께 받아주신다. 그는 그것들을 그렇게 부패하게 한 불완전함을 돌리지 아니하시는데, 그렇지 않았으면 그것들은 미덕이 아니라 죄악으로 인정되었을 것이다."Inst.,Ⅲ,17,3. 

칼빈은 말하기를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소유하면 우리는 '이중은혜'를 받는다. 구원은 성령의 역사인 믿음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될 때 두 가지 은혜를 동시에 받는다. 첫째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며 동시에 둘째는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성화됨으로써 우리는 흠 없고 순결한 생활을 신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칼빈은 "회개와 죄 용서- 곧 새로운 생활과 거저 얻는 화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며,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그것을 얻는다."Inst.,Ⅲ,3,3.라고 칼빈은 회개를 설명하여 밝힌다. 

즉 칼빈은 우리가 성령과 믿음으로 그리스도에 참여하게 될 때 우리는 이중적 은혜를 받는다고 한다. 그것은 흠이 없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화해되는 것이요,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으로 성화되어 삶의 흠이 없음과 정결함을 계발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칼빈이 말하는 칭의와 성화이다. 그러나 칼빈은 칭의와 함께 성화를 강조하며 칭의가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해서 행위를 배재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이미 밝힌바 대로 칼빈은 칭의보다 회개를 먼저 다루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 입을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고 그 의는 완전한 그리스도의 의다. 그러나 중생한 자도 계속 죄사함을 받고 의롭게 되어 중생의 차원에서 그 거룩이 우리 생의 마지막에 그리스도의 의에 일치될 때까지 그리스도인은 성화해야 할 것이다. 


2) 칼빈의 회개론



죄인이 구원받는 길은 오직하나, 믿음으로 구원 얻는 길 밖에 없다. 믿음의 대상은 예수그리스도다. 또한 타락한 죄인은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의인이 되고 구원에 이를 수 없다.

칼빈은 "믿음을 하나님 아버지가 그리스도를 보내심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하며, "그리스도는 의와 죄 용서와 화평을 위해 보내졌을 뿐만아니라 성결을 위해서 보내지셨다"라고 말한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기초로 삼는다는 사실과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성화되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알 수 없다. 

회개와 죄사함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데,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그것을 얻는다. 그러므로 거룩한 생활이 값없이 의롭다 하는 일에서 분리될 수 없고, 회개는 항상 믿음을 따를 뿐 아니라 또한 믿음에서 생긴다. 그러나 칼빈은 믿음을 중생의 열매로도 설명한다. 왜냐하면 믿음 자체가 성령의 일이기 때문이다. 고로 칼빈은 회개와 중생을 같은 것으로 본다. 이 중생에 의해 사람이 처음 가졌다가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다. 

"경건한 자들도 아직 죽을 육신에 둘러싸여 있는 죄인이며, 그들의 선한 행실은 아직 불완전하고 육신의 악덕의 냄새가 나므로 그는 그가 그것들을 그자체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품어주지 않는 한, 이것에나 저것에나 호의를 가질 수 없다."

회개는 하나님에게 전향하는 것이고 이 전향은 두 가지 면으로 이해될 수 있다. 옛것으로부터 돌아서는 것과 새것을 향하여 두 가지 면으로 이해될 수 있다. 옛것으로부터 돌아서는 것과 새것을 향하여 돌아서는 것이다. 중생에 적용된 의미는 옛사람을 죽이는 것과 새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죽임'과 '살림'의 구별은 하나의 회개이며 전향의 두 면이다.

"하나님은 신자들을 그 행위로 인해 용납해 주시는 데, 그것은 오직 그가 그것들의 원천이요, 은혜롭게도 그의 관대함을 더하심으로 황송하옵게도 그 자신이 부여해 주신 선한 행실을 해야 용납을 보여주시기 때문이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회개를 먼저 논하고 그리스도의 삶을 논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육을 죽이는 삶' 이고, '제자도'라고 할 수 있다. '제자도'는 첫째 '자기를 부인하고' 둘째는'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이다. 그리고 첫째, 둘째가 관계되는 셋째 '내세의 삶을 명상하는 것'(meditatio futurae vitae)이다. 그러므로 칼빈의 성화론은 바로 내세의 삶을 현세의 삶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소망의 삶이다.

회개는 육을 죽이고(mortifiacatio carnis), 영을 살린다(vivicatio spiritus) 두 부분으로 성립된다. 이것이 중생이다. 그리고 회개의 모적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다.Inst., Ⅲ,3,3.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은 회개의 경주이며 평생을 두고 달리도록 하신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나타난 성화라고 할 수 있다.


"죄 용서가 주어진 이후, 그에 따라 오는 선행은 그들 자신의 공로와는 다른 방식으로 칭찬을 받는다. 그 안에 모든 불완전한 것이 그리스도의 완전하심에 의해 가려지는 고로, 모든 흠이나 점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의심받지 않도록 그의 정결하심에 의해 씻긴다. 그러므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어떤 것을 못하도록 방해하던 모든 범죄의 죄책이 씻겨나간 후, 그리고 우리의 선행조차 습관적 습관적으로 더럽히는 불완전함의 결점이 묻힌 후, 신자에 의해 행하여진 선행은 의로 인정받는다." Inst., Ⅲ,17,8. 


그러므로 우리는 칭의에 있어서 행위로 구원 얻는다고 할 수는 없지만, 칭의와 분리되지 않는 성화의 측면에서 믿음은 행위를 수반하므로 믿음은 선행을 필요로 한다. 즉 칭의의 결과에서도 우리는 행위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삶'이다. 

"우리의 가르침(칭의의 교리)은 죄사함의 가치가 너무 크고 귀하기 때문에 사람이 아무리 선한 것으로 갚으려 해도 갚은 수가 없고 그렇기 때문에 값없는 선물로 밖에는 그 은혜를 받을 길이 없다." Inst.,Ⅲ,16,4.


3) 칼빈의 성화론



"그렇다면 우리가 어째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일까?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케되는 데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를 믿음으로 붙잡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를 믿음으로 붙잡음과 동시에 반드시 거룩함도 함께 붙잡게 되는 법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기' 때문이다.(고전1:30)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은 사람은 반드시 동시에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이 은혜들은 영원히 뗄 수 없는 끈으로 서로 엮어져 있기 때문에, 주께서는 그의 지혜로 조명하시는 자들을 또한 구원하시고 구원하시는 자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며, 의롭다 하시는 자들을 또한 거룩하게 하시는 것이다." Inst.,Ⅲ,16,1. 

칼빈이 이야기한데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칭의)은 반드시 동시에 거룩하게 되는 것(성화)으로 보았다. 그는 칭의와 성화를 연속선상에서 하나로 보았다. 따로 떼어내서 분리하여 보려하지 않았다. 같은 관점으로 볼 때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칭의로 볼 때는 하나의 순간적인 사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성화로 볼 때는 계속해서 이루어 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칼빈이 말한 데로 칭의와 성화의 두 은혜는 서로 엮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의 성화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며 또한 거룩함을 이루어가는 행함으로 의롭게 됨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의와 거룩함뿐이므로 그것들을 주목하기로 하자. 우리는 그것들을 서로 구분하기도 하겠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것들을 서로 분리시킬 수 없도록 친히 자기 속에 지니고 계신다.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서 의에 이르기를 바라는가? 그러면 먼저 그리스도를 소유해야한다. 그러나 그를 소유하면 동시에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 왜냐하면 그는 여러 조각으로 나뉘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고전1:13)" Inst.,Ⅲ,16,1.

지금까지 우리는 선행으로 의롭다 함을 받음에 대해서 전혀 동의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는 지금까지 이신칭의가 주는 안전함과 안일함속에서 살아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칼빈은 우리에게 칭의와 성화가 결코 분리되지 않음을 말해준다. 칭의로 의롭다 함을 얻은 중생한자들은 마땅히 그 행위로 거룩함을 이루어 가야 할 것이다. 여기서 칼빈은 거룩함으로 이루어가는 행함이란 바로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함을 설명한다. 그러므로 이 역시 공로가 될 수 없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 3권 14장(칭의의 시작과 그이후의 과정)에서, 

네 종류의 인간을 들어 중생한 자와 자연인을 구별하려고 한다. 중생한 자는 아직 그리스도가 그안에 있지 않는 자로서 칭의를 필요하지 않는다. 반면 중생한 자는 오직 거룩함을 이루어 가는 성화로써 이후의 칭의를 더 필요로 한다. 이러한 이중칭의에 대한 이해는 자연인과 중생한 자의 구별로 가능해 진다. 그러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 즉 중생한 인간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만 가능해 진다. 성화의 시작은 바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인도로 시작되어야 한다. 

칼빈은 성화를 일그러진 우리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마디로 말해서 나는 회개를 중생으로 이해하는데 그 유일한 목적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일그러지고 거의 지워져 버린 하님의 형상을 우리 속에 회복시키는 것이다"Inst.,Ⅲ,3,9.

계속해서 그는 우리의 성화는 점진적이며 계속적인 단계를 통해서 이루어짐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사실 이런 회복은 한순간에 나 하루에, 혹은 일 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적인-그리고 때로는 아주 더디기도 한- 과정을 통해서 그의 택한 자들 안에서 육체의 부패성들을 제거하시고 그 죄책을 깨끗케 하시며 그들을 성전으로 거룩히 구별하시며 참된 순결에 이끌리는 모든 성향을 회복시켜 가시므로 하나님의 택한 자들은 평생토록 회개를 실천하며 또한 이러한 싸움이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종결될 것임을 아는 것이다."Inst.,Ⅲ,3,9.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성화의 목표는 바로 우리 속의 어그러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며 이 회복은 한순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닌 계속적이며 단계적으로 이루어진다. 칼빈에 의하면 완전성화에 대해서는 동조하지 않은 듯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가 죽을 육체를 벗을 때까지 어제나 죄가 그들에게 있다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그들의 육체 속에 의를 거슬러 싸우는 부패한 정욕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Inst.,Ⅲ,3,10.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 싸움이 끝날게 될 것임을 말하고 있다. 즉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에 비로소 우리의 싸움이 끝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성화는 또한 영화로 나아가게 한다. 즉 하나님나라에 대한 소망과 묵상이 그것이다.

칼빈에게 있어 내세의 삶에 대한 명상은 성화론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칼빈의 신학의 본질이 성화론이다. 성화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것은 내세의 삶에 대한 소망에서 이루어진다. 신자에게는 내세의 영광을 동경하는 기다림이 있다. 

이 기다림은 이 세상에서 신자를 활발하게 활동하게 한다. 이 세상에서 시작한 중생은 먼저 미래의 하늘의 삶에서, 죽음 후에 부활의 날에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칭의와 성화의 관계


이미 언급했지만, 예수그리스도의 화해 사역으로 우리에게 주는 은혜의 선물들이라는 점에서 칭의와 성화는 분리 될 수 없다. 예수그리스도는 화해의 사역과 함께 구원의 은혜들을 다함없이 선물로 준다. 성화와 칭의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는 중요한 이중의 은혜이다. 

"우리는 의롭다하심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곧 죄인이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으로 받아 들여져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와 화목되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깨끗이 씻음 받고 죄사함을 받으며 그리스도의 의를 마치 자기의 것처럼 옷 입으며 하늘의 심판대 앞에서 확신을 갖고 서는 것이다."Inst.,Ⅲ,17,8.

성령의 역사인 그리스도와 우리의 연합은 칭의와 성화 두 면으로 나타나 보인다. 칼빈은 이 두 가지 은혜를 의도적으로 '동시에'라고 언급함으로써 똑같은 권리가 있는 것으로 둔다. 

이렇듯 성화와 칭의는 그리스도의 은혜에 근거를 갖기 때문에 두 가지 은혜는 나누어 질수 없게 결합되어 있다. 반면에 칭의와 성화는 그리스도의 두 가지 은혜의 선물들로써 하나의 구원사역의 두 가지 면으로 서로 구별된다. 이 두 은혜들이 함께 속하는 성격과 구별되는 성격, 이두가지 면은 그 은혜들의 서로의 관계를 결정한다. 

이 두 가지 은혜는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붙잡게 될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데, 그리스도와 이와 같은 참여를 통해서 우리는 무엇보다 '이중은혜'를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행이 칭의의 공로가 될 수 없다는 것과 선행에 앞서서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받는 칭의는 여전히 중요하다. 그러나 '이중은혜'는 오늘날 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만을 위치면서 그에 합당한 성화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는 한국교회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기독교강요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존 칼빈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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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OHN CALVIN. 1: 칼빈 신학 개요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한국칼빈학회 (두란노아카데미,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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