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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그리고 한 페이지 인생

일본 오사카성 역사탐방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23. 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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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의 마지막날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여행지에서 비를 맞는 것은 그자체로 특별하다. 

먼 타국의 땅에서 굳이 구름 한점 없는 날씨만 기대하기 보다 

잠시라도 구름 낀 하늘과 부슬부슬 내리는 비에 잠시 몸을 맡겨보는 것도 여행의 좋은 경험이 되리라 

생각된다. 

 

 

1택시를 잡았다. 오사카 성에 가기 위함이다. 

오사카에 왔으니 당연히 오사카성에 가봐야한다. 사실 별 기대가 없었다. 오사카성에 대한 정보도 없었을 뿐아니라굳이 가야하나? 사진으로 충분하다 느꼈다. 모리노미야역에서 내렸다. 

비가 내리는 아침 택시에서 내려 오사카성 근처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아침을 간단히 먹었다. 

 

공원에 산책하며 운동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오사카성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맞이해준것은 엄청난 크기의 해자였다. 

해자는 적의 접근 및 공성전에 대비하기 위하여 성의 둘레에 땅을 파놓고 물를 채워 놓은 것을 말한다. 해자의 크기만 봐도 오사카성이 얼마나 큰 성이었는지를 알수 있었다. 

 

 

오사카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쌓은 성(1583년)이다. 오사카성은 1585년에 5층 8단, 검은 옻칠을 한 판자와 금박 기와, 금 장식을 붙인 천수각을 완성했다. 이것으로 히데요시는 천하 권력자의 권위를 마음껏 과시했다.

오사카성은 일본 역사에 중요한 세 인물의 이야기를 빼놓고 설명할수 없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오다 노부나가 그리고 임진왜란으로 천하 통일의 야욕을 드러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요토미가문을 무너뜨리고 등장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 세 영웅의 이야기가 오사카성에 그대로 베어있다. 

특별히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후 그의 애첩이 낳은 아들인 히데요리를 중심으로 1603년 세키가하라 전투 그리고 1615년 오사카성 전투에서 도쿠가와에게 대패를 하고 도요토미가문은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이때 도요토미의 오사카성은 천수각과 함께 불타버린다. 

 

그후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도요토미의 오사카성 영역에 석벽을 쌓아올려 성을 다시 구축한다. 이에 도요토미의 천수각보다 더 큰 규모로 1626년 도쿠가와의 오사카성 천수각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 천수각도 1665년에 소실된다. 이후 세번 째 천수각은 오사카 시민들에 의해 1931년에 도요토미가 축성한 오사카성의 천수각을 본떠 세워졌다. 처음 오사카성을 마주대했을 때는 웅장하고 화려함에 놀라 혹시나 세계유산에 등재된 건축물인가 했는데, 1931년에 오사카시민들에 의해 다시 축조된 건축물로 역사적인 의미는 없다고 한다 

 .

 

오사카성에서 내 관심은 사실 다른게 아니었다.

오사카성에 2차 대전시 일본군 4사단 사령부의 구금소가 있었고 그곳에 매헌 윤봉길의사가 한달여 송치되어 구금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곳을 가보고 싶었다,. 

윤봉길의사는 1932년4월 29일 11시 40분 상해 홍커우공원에서 물통 폭탄을 투척, 시라카와 대장, 노무라 중장 사이에 떨어져 폭발하였다. 이 사건으로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와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지가 사망했다. 

중화민국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는 오른쪽 다리를 잃었고, 우에다 중장은 왼쪽 다리를 잃었으며, 노무라 중장은 오른쪽 눈을 실명하였다. 이 외에도 많은 주요 인사들이 부상을 입었다

그후 윤봉길의사는 11월 18일 오사카성의 구금소에 1개월간 지내다가 가나자와시로 옮겨진다. 1932년 12월 18일 9사단 위수 그금소에서 일박한 후 그 이튿날 12월19일 아침 7시 27분 산속으로 옮겨져 얼굴을 가리고 무릎을 꿇게하고 두손을 십자가 형틀에 묶은채 아침 7시 27분, 미간에 총알을 맞고 13분 후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일본육군 묘지 사무실에 있는 스레기더미 옆에다 암장했다. 

 

역사학자 이만열이 쓴 "오늘 내가 걷는 발자국"에서 이만열은 도쿄에서 교토로 오사카로 이어지는 독립운동 답사경험을 기록하고 있다. 

 

"암장지가 사무실 옆에 있었던 것은 시신이 도굴당하지 않도록 함이었다. 어떤이는 윤의사가 사형당한 시각 7시27분은 시라가와가 폭살당한 시간에 맞춰졌고 안중근의 사형시각 10시도 이토의 운명시각과 맞추었다고 했다.

우리 일행은 그곳에서 헌화 헌주하고 경건한 예를 올렸다 (중략) 우리는 윤의사를 이런 쓰레기더미 옆에 암장한 일제에 분노하는 한편 일제의 문명국 수준을 다시 평가하게 되었다. 아무리 그들 요인을 폭살한 주인공이라 하더라도 윤의사는 상대국의 의인이다. 그렇다면 그 의인의 죽음의 길에는 최소한의 예의를 갖춰야 한다. 무릎을 꿇게해서 형을 집행토록 해서는 안되는 것이며 사형후 가족에게 반드시 알려야하며 시신을 제대로 수습하여 묘를 만들어주는 것은 근대국가가 갖는 최소한의 예의다. 그러나 윤의사는 1932년 12월에 돌아가신후 1946년 3월 유해봉환때까지 그런 최소한의 대우도 받지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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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14년이란 세월 동안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그의 무덤을 밟고 갔다는 얘기였다. 또 유해가 발굴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 탓에 손뼈가 소나무 뿌리에 얽혀서 손뼈 7개만은 수습을 하지 못해 안타깝게도 현재까지 암장지에 남아있다고 한다. 

 

오사카성에 윤봉길의사가 구금된 곳으로 추정된 일본 제 4사단 사령부가 있어서 그곳을 잠시 지나가듯 방문하였고, 잠시라도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마음을 다해 그분들의 희생을 묵상하였다. 지금은 근대 벽돌식 철근 구조물로 되어있어 오사카 시립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사람은 사라지고 남은 건물, 저 건물도 사실 건물의 용도로서는 사명을 다해 죽은 건물이겠거니 생각되지만, 저 자체로 저렇게 남아주어 가슴아픈 역사든, 자랑스러운 역사든 그 역사앞에 고개를 숙이고 잠시 현재를 묵상하며 미래로 걸어가는 것이다. 

 

 

오사카성의 답사를 마치고 내려가는 길에 한 신사(神社)가 보였다. 풍국신사 라고 적혀있다. 이곳이 풍신수길 즉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신사였다. 들어가보지는 않았지만, 전국시대의 문을 열고 임진왜란을 통해 야욕을 드러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인들의 존경심이 풍국 이라는 말에서 엿볼수 있었다. 오사카성 탐방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윤봉길의사를 잠시나마 만날수 있었고, 일본이 좋아하는 세 영웅도 만나볼수있었다. 

 

잠시 한일관계를 생각해본다. 

한일간의 관계가 좋아야한다는 것은 진심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여전히 해결해야할 과제는 너무 많다. 최근 IAEA에  일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배출 계획에 대한 안전성 검토를 했고 적합성 판단을 내렸다. 이에 우리나라의 윤석열 정부는 과학적이며 합리적인 방류라 여겨 방류 허용에 대한 의견을 전달한것으로 보인다. 과연 우리나라 정부 우리나라 대통령이 맞나 심각한 의심이 든다. 한 나라의 수장으로서 여전히 청산하고 해결해야할 역사적 과제들이 산적해있는데 그것들을 뒤로하고, 국민들의 여론은 무시한 채 이런 중대한 문제를 결정할수 있을까?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국자적 차원의 이익은 뒤로하더라도 국민의 불안성이 높아가는 현실점에서 국민을 설득하고 합리적인 토론으로 여론을 다져가도 쉽지않은데, 국익과 여론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그렇게 하면 한일간의 관계가 돈독해지고 보다더 튼튼한 결속으로 이어질것이라고 생각되는지 궁금하다. 

역사는 또 다른의미로 매듭짓기이다. 역사를 안다는 것 그것을 읽는 능력이 생겼다는 것은 지난 풀리지 않은 문제들을 역사를 통해서 풀어가고 매듭짓지 못했던 과오들에 매듭을 지어 가는 것이다. 한일관계가 미래로 가길 원한다면, 잘 매듭을 지어야 한다. 독도문제라 든지, 일본의 징용이나 위안부문제는 지금도 싸움중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지금 현 정부는 몰역사적이라고 볼수 밖에 없다. 참으로 아쉽다. 

좋은 지도자를 원한다. 북한문제와 한일문제를 합리적이면서 균형적인 감각으로 이끌 그런 지도자. 역사의 바탕위에 서서 지나치거나 모자람없이 잘 풀어내고 매듭짓는 그런 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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