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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을 따라 (교회와 공동체)/창동염광교회 50년사

염광교회 50년사 / 부흥과 성장 이야기 5. "민족복음화 세계선교"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22.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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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복음화 세계선교

하나님께서 교회에 부흥과 성장을 주신 것은 다름아니라 민족을 섬기고,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함이다. 1978년의 창립6주년 기념예배 설교에서 최기석목사는 성도들과 그 고민을 나누었다. 그런의미에서 1978년 염광교회의 창립6주년은 민죽복음화와 세계선교라고 하는 넓은 지경으로 부르심에 응답하고 발돋움하는 시기라고 할수있다. 이때 최기석 목사는 성경과 역사를 통해 얻은 해답은 창동염광교회가 ‘민족구원과 세계복음화’를 위해 ‘고난받는 교회’, ‘십자가를 지는 교회’되어야 한다는 것임을 밝혔다.

이제 개척한 지 여섯 돐이 지난 오늘, 우리 교회는 최소한의 건물이 확보되었다. 가족 수효도 외롭지 않을 만큼 늘어났다. 재정도 과히 궁색하지 않을 만큼 늘어났다. 그럼 우리는 이것으로 만족할 것인가? 앞으로 우리 교회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 일이 무엇인가? …… 이제는 우리 교회가 걸어 나가야 할 방향(方向)과 좌표(座標)를 바르게 설정하는 것이 금후에 우리가 해야 할 급선무라고 생각한다.

-최기석 목사, 1978년 4월 30일(주일) 창립6주년 기념예배 설교 중-


최기석목사는 좀더 구체적으로 접근한다. 민족복음화와 세계선교를 위해 고난받는 방법으로 다섯 가지 행동 지침을 제시하였는데
, 그 하나가 최소한 하루 10분 이상씩 민족복음화와 세계선교를 위해 기도하자는 것이었다.
이 지침은 1979년 첫 주일인 17일부터 520(주일)까지 주보에 주간기도회의 세 가지 통성기도제목 중 하나로 제시되었다. 주간기도회 세 가지 통성기도제목은 자신의 성령충만을 위해서 교회 성장을 위해서 민족복음화 세계선교를 위해서였다.

19791127일 당회에서 1980년도 교회 운영의 주제를 선교하는 교회로 정하고 선교위원회를 설치하였다.
그 후 1980년에는
선교를 위한 구체적 사업계획을 세웠다. 그것은 새신자 훈련, 산업선교, 개척교회 보조의 확대 등이 있었다. 198259(주일) 창립 10주년 기념예배 설교에서 최기석 담임목사는 민족복음화와 세계선교의 큰 꿈과 방향을 제시하였고, 선교위원회는 이에 부응하고자 하였다.
1982
1122일 연말당회에서는, “개척교회(미자립교회)보조를 금년도(1982년도) 4개 교회에서 10개 교회로 확대보조키로 하고”, “해외선교는 현재 돕고 있는 현지 3개 교회(필리핀 2, 인도네시아 1)와 아세아 연합신학원 유학생인 아프리카 말라위 출신의 반다(Banda)목사를 계속 보조하고 현지 신학생 1-2명을 추가로 돕기로하였다. 19844월에는 최병성김신자 집사 평신도 부부를 아르헨티나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김신자 집사 아르헨티나 파송기념 (1984. 4.)
 
하나님과 역사와 사회를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오늘 우리는 그 대답을 강요받고 있다. 물론 우리에게는 민족 복음화와 세계선교라는 절대의 꿈과 비젼이 있다. 이것은 우리 교회가 시작될 때부터 기도하고 외쳐 왔던 것이다.

1992년 『염광』지 봄호(창간호) 에서 최기석목사의 기념사중.



1. 민족복음화
"1981년 5월에 2개교회를 추가 지원하였으며 또 같은해 12월에는 5개 교회를 추가 지원하였다."
창동염광교회는 1981년이전부터 이미 농어촌교회를 지원해왔다. 미자립교회 4개를 선정하여 월 40,000원씩 지불하기로 1982년 1월24일 당회에서 결의하였다. 당시 지원한 4개교회의 명단은 아래와 같다.

1. 경기도 포천군 소홀면 이가팔리 동촌교회
2. 경기도 포천군 청산면 덕둔리 새청교회
3. 경북 영주시 상줄동 상줄교회
4. 충남 아산군 온양읍 온양침례교회

1990년에는 46개의 교회 및 기관을 보조하였고 현재까지 해마다 농어촌과 미자립 교회, 기관을 지원하여 민족복음화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

군복음화와 교회 개척 "백호염광교회"

1969년 한경직목사의 민족복음화 운동에서 시작된 전군신자화 운동은 6.25 동란이후 한국교회의 민족복음화의 염원을 담아 추진된 것이다. 또한 1980년대부터 시작된 학원복음화사역은 한국교회의 복음의 기틀을 세워주는 것이었다. 최기석목사가 군목출신이었기 때문에 창동염광교회는 군복음화에 남다른 관심이 많았다.

최기석목사가 군목출신이었기 때문에 군복음화에 남다른 관심이 많았다. 


“백호염광교회 개척”
1993년 9월6일 강원도 양구군 남편 청4리 군목 윤순기 목사의 인도로 백호염광교회 기공예배를 드렸다.



"광야교회" 개척
창동염광교회에서 전도사로 청빙받아 1982년 1월부터 부임한 김석한 전도사는 부목사를 거치며 성실히 사역하던중 경기도 의정부시에 광야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다. 1997년 9월7일 최기석목사를 비롯한 선교위워장 홍희천장로등이 참가하여 입당예배를 드렸다.

1997년 광야교회개척 입당예배



"원주염광교회" 개척
여전도회 연합회는 1994년부터 개척교회 설립을 위한 자금을 적립해왔다. 이에 원주시 단계동에 대지 272평을 구입하고 성전 75평을 건립하여 1997년 최기석목사및 당회원, 다수의 여전도회 회원들과 성도들이 모인가운데 개척입당예배를 드렸으며 부목사로 시무하던 손수진 목사를 담임목사로 청빙하였다.

1997년 원주염광교회 창립예배



2. 세계선교
창동염광교회는 1992년 4월 이집트 이준교 선교사, 필리핀 그레이스 교회와 호프 교회, 인도네시아 한숭인 선교사를 포함해 4개국 6개 교회를 지원하였다.
창동염광교회 선교위원회는 싱가포르에서 활동한 권성찬 선교사와 인도네시아 김영숙 선교사를 단독으로 지원하였고, 그 외의 많은 선교사들을 협력 선교로 지원하였다.
권성찬 선교사는 1993-1994년에 GBT(Global Bible Translators) 선교사로 성경번역 활동을 하다가 그 후 아프가니스탄으로 선교지를 정하였고 1996년 5월 29일에는 아프가니스탄 선교에 대한 보고를 하였다. 2001년에 7년 동안의 사역을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귀국하였고 GBT 공동대표로 취임하였다.

아프카니스탄 권성찬 선교사 가정 (1993. 1. 25)


김영숙 선교사는 GP 선교회(Global Partrners) 소속으로, 창동염광교회에서 1995년 12월 7일 파송예배가 있었고 1996년 인도네시아로 파송되어 언어교육을 받았다. 1997년 12월 31일 바탐에 들어간 후, 1998년 이래 바솜에서 신학교 사역에 임하였다.

김영숙 선교사 파송 예배 (1995. 12. 7)

 

러시아 오룔염광교회는 최기석 담임목사가 먼저 러시아 선교지를 방문한, 199669일 러시아 오룔염광교회 개척예배에 최기석 담임목사를 비롯해 교인 20명이 참석하였다. 1999923일 입당예배를 드렸다. 창동염광교회는 1998년부터 2001년까지 $111,302의 지원금을 보냈다. 오룔염광교회의 헌당예배가 200269일 권혁성 부목사, 선교위원회 위원들과 염광여성중창단 등 3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드려졌다.

 
러시아 오룔염광교회 헌당예배 후 (2002. 6. 9)

 

1996348일에 최기석 담임목사와 선교위원장 홍희천 장로, 송홍섭 장로, 달리다굼 선교회 신병철 총무 외 11명이 태국 메홍선 지역을 방문하였고 유성열 집사가 창동염광교회 이름으로 교회 건립을 위해 헌금하였다.1997915일 메홍선 선교지 쏘모이 선교센터 헌당예배에 교인 26명이 참석하였다.

태국 메홍선 소모이 선교센터 앞 (단기선교훈련팀) (199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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