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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든지 죽든지 (신학)

알리스터 맥그래스 VS 리차드 도킨스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09.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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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스터 맥그래스 -“신앙은 과학적 증거 뛰어넘는 것”
리차드 도킨스 -“신에 대한 신앙은 유해한 망상일 뿐”

최근 한국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반그리스도교적 정서 속에 리차드 도킨스(Richard Dawkins)와 같은 과학적 무신론자들의 저서가 소개되면서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이 도전받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2008년 5월 20일 감신대에서는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 교수를 초청해 신학공개강좌를 개최했다. ‘리차드 도킨스의 망상적 하나님에 대한 신학적 응답: 과학과 종교의 대화’라는 주제로 열린 강연회에서 맥그래스는 도킨스의 종교비판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했다. <편집자 주>


과학적 성과 편승한 종교비판, 일반인 오판우려
리처드 도킨스의 ‘망상적 하나님’(번역판, ‘만들어진 신’)은 한국에서 출판된 후 벌써 32쇄를 인쇄했고 10만권을 돌파한지 오래다. 특별히 이 책이 한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그동안 쌓여왔던 반그리스도교 정서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이미 ‘이기적 유전자’ 등을 통해 세계적 명성을 얻은 도킨스는 ‘만들어진 신’을 통해 종교, 그의 정신적 유산이기도한 서구 그리스도교와 유신론적 세계관에 도전을 하고 있다.
철학자 마이클 루스(Michael Ruse)는 도킨스의 ‘악마의 사제’에 대한 서평에서, 도킨스의 관심이 ‘대중적인 청중을 위해 과학에 대해 쓰는 것으로부터 기독교를 전방위적으로 공격하는 것으로 급선회했다’고 지적했다. 도킨스는 초기에는 과학자로서 과학적 작업을 수행하다가 최근에는 ‘만들어진 신’에서 보듯이 종교의 문제를 다룸으로써 맥그래스의 말을 빌리면 ‘야만적인 반종교 논객’이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반종교적인 주장들은 그들이 이룬 자연과학적 성과에 편승해 그 주장의 진위와는 상관없이 일반인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데 문제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도킨스의 책이 사회에 반향을 일으킨 것도 그 이유에서이다.

도킨스의 주장, ‘망상적 하나님’
도킨스는 ‘만들어진 신’에서 “신에 대한 신앙은 망상이며 그것도 유해한 망상이다”라고 주장했다. 도킨스의 그리스도교 공격은 크게 2가지 방향으로 정리된다. 첫째, 역사적으로 그리스도교가 인류에 대해 많은 해악을 끼쳤다는 것이다. 십자군 전쟁을 비롯해 마녀사냥이나 종교분쟁 등이 단골메뉴로 등장한다. 물론 이런 식의 비판을 하는 사람은 도킨스만이 아니다. 파스칼은 “종교적 확신을 가졌을 때 사람이 가장 철저하고 자발적으로 악행을 저지른다”고 말했고, 노벨 물리학 수상자인 스티븐 와인버거는 “종교와 상관없이 선한 사람들은 선하게 살아가고 나쁜 사람들은 악을 행한다. 그런데 선한 사람들이 악을 행한다면 그것은 종교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도킨스는 보다 이보다 더 적극적으로 종교를 공격하는데, 그는 구약의 야웨 하나님을 ‘악한 괴물’이라고 하고, 테레사 수녀를 ‘위선적’이라고 깍아 내렸다.
도킨스의 그리스도교 공격에 대한 두 번째 이유는, 과학이 진리를 밝혀줌에 있어 그리스도교보다 더 우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이나 성직자들은 마치 자신들만이 진리를 소유한 듯이 대접을 받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주장은 과학적 유물론, 과학적 환원주의와 같은 여러 이름으로 불리지만, 단순히 말하면 진리는 결국 하나이고 그 진리에 이르는 길은 엄격한 이성적 판단과 증거가 있는 자연과학이지 두꺼운 존경과 경외의 벽에 둘러싸인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도킨스는 이러한 입장에서 효과적으로 종교를 비판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종교를 폐지하기 위한 적극적인 운동을 벌이고 있다.

맥그래스의 주장, ‘도킨스의 망상’
맥그래스는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에는 과학적 분석이 드물다. 대신 대부분 오래된 무신론자의 저술로부터 빌려온 종교에 대한 광범위한 문화비평들과 연관된 유사 과학적 추정들로 가득 차 있다”고 비평했다.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보면 과거 계몽주의 시대의 산물이었던 19세기 의심의 대가들의 주장만을 되풀이 하고 있으며, 진리를 파악하는데 있어 종교의 속박에서 벗어나 이성의 판단에 그 최종적인 권위를 주려고 하고 있다. 따라서 계몽주의자들은 외부의 권위로 다가오는 종교에 대해 대체로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나 맥그래스는 19세기 계몽주의자들의 입장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는 도킨스의 주장과 그의 과학적 유물론은 오늘날 탈현대시대에 접어드는 이 시대에 계몽주의적 이성주의에 근거한 종교비판은 편협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맥그래스는 오히려 반문한다. “누가 정말 신에 관한 망상에 빠진 것일까?”

맥그래스의 반박
맥그래스는 도킨스의 저서들에 나타나는, 특별히 ‘만들어진 신’에서 최고조를 달하고 있는 4가지 중요주제들에 대해 반박하고 있다. 이 주제들은 과학과 종교의 대화를 가능하게 해 주는 주제이다. 도킨스도 종종 주장했지만, 과학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결정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이는 엄밀히 과학적인 판단이 아니라, 서구문화와 역사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종교에 대한 도덕적인 거부일 뿐이라고 맥그래스는 말하면서 그의 논의의 전제로 삼고 있다.

주제1. 과학은 신에 대한 신앙을 불가능하게 한다?
‘만들어진 신’의 의제의 기초에는 ‘과학이 신의 없음을 증명했다’는 널리 퍼진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신을 계속해서 믿는 사람들은 그저 반계몽주의적이고 미신적인 반동주의자들일 뿐이며, 진지하고 진보적이며 생각이 깊은 사람에겐 무신론만이 유일한 선택이라고 말한다.
도킨스의 견해에 따르면, 과학은 신을 문화의 변방으로 추방시키고, 과학은 신에 대한 믿음을 좌절시킨다고 말한다.
그러나 맥그래스는 이러한 관점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오히려 많은 과학자들이 신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하버드의 천문학자 오웬 진저리치(Owen Gingerich)는 그의 저서 ‘신의 우주’에서 “우주는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창조되었는데, 이러한 믿음은 과학체계를 방해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프랜시스 콜린스(Francis Collins)는 ‘신의 언어’에서 “자연의 경이와 질서는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의 개념을 따른 창조신을 가르킨다”고 주장했다. 여기에서 콜린스는 무신론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돌아선 자신의 회심도 묘사하고 있다. 이는 진정한 과학자는 무신론자라는 도킨스의 경직된 주장에 결코 맞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주제2. 믿음은 증거로부터의 후퇴이다?
종교는 믿음에 근거하기 때문에 자연과학에서 발견되는 확고하고 증거에 기초한 진리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후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1976년 도킨스는 ‘믿음’에 대해, ‘증거 없는, 심지어 증거에 반대하는 맹목적인 신뢰이다’. 1989년에는 “믿음은 이제 ‘일종의 정신병’같은 것이다”라고 정의했다.
맥그래스는 이러한 정의는 도킨스 자신의 정의이며, 이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 도킨스는 믿음은 유아기적이며, 하나님을 믿는 것은 산타클로스나 치아요정(Tooth Fairy)을 믿는 것과 같다고 주장한다. 나이가 들면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맥그래스는 자신이 ‘무신론의 황혼’을 저술하면서 많은 수의 사람들이 말년에, 즉 그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러면서 말년에 산타클로스나 치아요정을 믿게 되었다는 사람을 여태 만나지 못했다고 말한다. 도킨스의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하나님과 산타클로스의 존재의 유비가 요구되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또한 도킨스는 신에 대한 신앙은 이성적인 반영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침입한 매우 전염성이 강한 바이러스의 감염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사용한 ‘바이러스’는 강력한 이미지였기 때문에, 때마침 점증하던 에이즈 바이러스의 육체적 감염, 컴퓨터 바이러스에 의한 소프트웨어 감염에 대한 대중적 우려에 편승하여 호소력있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맥그래스는 “바이러스는 도킨스가 신에 대한 신앙에 관하여 전하려고 하는 비열하고 파괴적인 메시지”라고 말했다. 맥그래스는 신에 대한 신앙이 바이러스와 같다는 유비는 존재론적인 실재를 가정하는 것처럼 보이나 신에 대한 신앙은 마음의 바이러스이다. 이는 생물학적 바이러스와는 다른 것으로 도킨스가 고안해낸 논쟁적인 구성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모든 생각은 마음의 바이러스인가? 도킨스는 이성적이며 과학적이고 증거에 기초한 생각들과, 위조되고 비이성적인 생각들 사이의 절대적 차이를 말한다. 전자의 것이 아니라 후자의 것들이 정신적인 바이러스라고 말한다. 그러나 누가 ‘이성적인 것’과 ‘과학적인 것’을 결정하는가? 도킨스는 염소가운데 양을 구분하듯 자신이 이와 같은 생각을 쉽게 범주로 나눌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도킨스의 생각은 무엇이 이성적이고 진리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과학적 사고의 기본인 객관적이며 검증 가능한 대신에 자신의 ‘주관적인 판단’이라는 것으로 희생되고 만다.

주제3. 종교는 우리의 세계관을 가난하게 만든다?
도킨스는 종교는 허약하고 희미한 세계관을 제공한다. ‘제도화된 종교가 제공하는 우주는 작은 중세의 우주이며, 매우 제한되어 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과학은 뚜렷하고 탁월하며, 크고 아름답고 경외를 일으키는 우주관을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종교에 대한 도킨스의 계속되는 불만 중의 하나는 종교가 미학적으로 결여되었다는 것이다. 종교의 우주관은 한계가 있고, 가난하고, 과학에 의해 알려진 아름다운 실체에 비해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우주는 신비하고 웅대하고 장엄한데 종교인이 전통적으로 받아들이는 우주관은 실제 우주와 비교하여 미약하고 보잘 것 없다고 말한다. 기존 종교에 의해 제시된 우주는 비좁고 작은 중세적인 우주이며 극도로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뉘른베르크 연대기’(1493)를 보면, 중세적 우주관은 사실 근대의 개념보다는 더 한계가 있고 제한되어 있다. 그러나 그 해석은 종교와는 관련이 없다. 왜냐하면 그 내용은 당시의 과학과 과학자들이 제공한 우주관에 기초했기 때문이다.
자연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즉각적인 경외감. 이는 즉각적으로 일어난다. 윌리암 워즈워드가 하늘의 무지개를 보며서 묘사했듯이, 이렇게 ‘가슴이 뛰는 것’은 그것이 암시하는 것에 대한 의식적이고 이론적인 생각 이전에 일어난다. 심리학적인 범주를 사용한다면, 이는 지각이라기 보다는 감각이다. 신을 믿는 것이 경외감을 줄인다는 것에 대해 맥그래스는 납득할 수 없으며, 도킨스의 주장은 증거에 의해 확증되지도 않았고, 완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고 반박한다.

주제4. 종교는 인간성을 손상시킨다?
종교는 악으로 이끈다. 이는 인간의 마음을 감염시키는 악성 바이러스와 같다. 이러한 이해는 도킨스 자신의 지적이며 도덕적인 판단일 뿐이다. 도킨스가 믿지 않는 신은, ‘만들어진 신’을 인용해보면, 사소하고 부정의하며 관대심이 없는 괴짜이며, 복수심이 강하고 잔인한 인간 청소자이다. 또한 여성혐오, 동성애공포, 인종주의, 유아살해, 대량학살, 자식살해, 악 조장, 과대망상, 가학피학성 등의 변덕스럽고 사악한 불량배이다. 맥그래스는 말한다. “우리는 이러한 신을 믿지 않으며 이런 신을 믿는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한다.”
맥그래스는 도킨스가 분노한 원인은 아마도 이슬람 근본주의자들, 특별히 지하드 형태의 폭력을 사용하는 사악함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이 종교의 필수적인 모습인가?” 물으면서, 나사렛 예수는 어느 누구에게도 폭력을 쓰지 않았다. 폭력을 당하는 대상이었지 폭력을 행사한 사람은 아니었다. 분노를 분노에 맞서는 대신 “다른 편 뺨을 대라” “해가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요청했다. 이는 바로 폭력의 뿌리를 제거하는 것이요, 변화에 관한 것이라고 맥그래스는 주장한다.
그러면서 오히려 20세기의 역사를 통해 ‘정치적 극단주의’가 어떻게 폭력을 조장했는지를 언급했다. 라틴아메리카의 우파 정치인들은 수백만명을 희생시켰다. 캄보디아에서 폴 포트는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수백만을, 레닌은 종교의 제거를 사회주의 혁명의 핵심으로 여기고 장기적인 폭력을 사용했다. 도킨스는 무신론이 사람들에게 나쁜 행동을 하도록 영향을 준다는 증거가 ‘조금도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실과 다르다. 1918-41년 기간 동안 무신론적 관념론을 강요하기 위해 소련정권은 조직적으로 대다수의 교회를 파괴하고 대다수 성직자를 제거했다. 그 통계는 엄청나다. 이러한 폭력과 억압은 무신론의 주장을 실현하고 종교를 제거하는데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비판에 대한 도킨스의 반응
도킨스는 자신에 대한 비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첫째, 신학서 등 다른 학술서를 상세히 분석하지 않고 종교를 비판하고 있다는 점. 둘째, 종교의 최선의 사례는 무시하면서 최악의 경우를 들어 공격한다는 점. 셋째, 자신의 언어선택이 과격하고 옹졸하다는 점. 넷째, 자신이 종교적 근본주의자나 별로 다를 바 없다는 점. 다섯째, 종교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종교는 여전히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점. 여섯째, 사람들은 여전히 종교가 주는 위로와 용기를 필요로 한다는 점 등이다.
그러나 도킨스는 이러한 자신에 대한 비판에 대해 성실하게 답변하지 않고 오히려 그 비판들을 도리어 웃음거리로 만들어 희화화하고 있다.

종교와 과학, 협력과 대화통해 진리 찾는 여정의 길동무돼야
도킨스의 자연과학적 무신론은 그 자체가 하나의 믿음체계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면에서 자기 모순적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즉 이들의 자연과학적 무신론은 그 자체가 하나의 신학적 주장이요, 믿음체계라는 것이다. “환원주의는 과학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믿음이며 과학과 가장 비과학적 부류의 독단론과 부적절하게 경합한 산물”이라는 존 호트의 지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도킨스의 과학적 무신론이 자신이 그렇게도 혐오하며 파괴하고자 하는 종교의 또 다른 형태에 불과하고 자신은 그 분파의 교주로 활동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도킨스와 같은 과학주의자들이 과학의 진보가 이루어지면 과학이 종교를 대체할 것이라는 주장도 경험적으로 맞지 않다. 도킨스와 같은 극렬한 종교비판가들의 왕성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종교는 사라지지 않았고 도리어 왕성하게 재생산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자연과학으로만 이 세상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실험실 안에서 자연을 대상화하고 조직하고 통제하고 실험하는 자연과학은 한계를 갖고 있다는 비판을 경청해야 할 것이다.
맥그래스는 “과학과 종교의 관계는 역사적으로 조건 지어지며, 당대의 사회적, 지적 조건의 영향을 받는다. 사실 오늘날 이 양 진영 속에서는 어떻게 하면 두 학문이 서로를 잘 이해할 수 있을지 심지어 서로 도울 수 있을지에 대한 관심이 커져가고 있다”고 말했다.
종교와 자연과학은 상생과 대화를 통해 서로를 더 풍성하게 하고 진리를 찾는 여정에 좋은 길동무가 될 수 있다. 종교를 적대시하기 보다는 대화를 통한 진리를 향한 동반자로 삼는 것이 더 풍성한 결과를 낳을 것이다. 종교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자연과학이 쇠퇴할 기미도 안 보인다. 그렇다면 이 두 학문이 서로 대화하면서 협력하는 것이 서로를 위해 필요할 것이다.

** 알리스터 맥그래스와 도킨스에 대한 간략한 소개 **

알리스터 맥그래스 -“신앙은 과학적 증거 뛰어넘는 것”
영국 옥스퍼드 대학 석좌교수. 분자생물학을 전공해 22세 때 박사학위를 받았고, 2년 뒤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제임스 패커의 수제자로 21세기 최고의 복음주의 신학자란 평을 듣고 있다. 그는 ‘복음주의와 기독교의 미래’라는 저서에서 “세계 기독교의 미래는 복음주의의 계속적인 성장과 성숙에 달려있다”는 주장을 폈다. 2000년부터는 ‘과학적 신학’이라는 영역을 개척했고, 최근 ‘과학적 진화론적 무신론’과 적극적인 논쟁을 벌이면서 기독교변증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최근에는 ‘도킨스의 신’ ‘도킨스의 망상’이라는 제목의 책을 펴내 무신론이 얼마나 허구에 찬 망상인지 그 한계를 밝히고 있다.

리차드 도킨스 -“신에 대한 신앙은 유해한 망상일 뿐”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로 노벨상을 받은 니코 틴버겐의 제자로 주목을 받아왔다. 생물학을 전공한 도킨스는 첫 저서인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 1976)에서 생물개체는 이기적인 유전자를 운반하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도발적인 주장을 펼쳐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진화론적 입장에서 기독교를 반박하는 ‘눈 먼 시계공’에서 생물의 복잡성이 하나님에 의해 설계된 것이라는 창조론자들의 주장을 반박했고,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에서는 논리와 과격한 언어를 동원해 하나님은 실재하지 않는 망상이라고 주장했다. 도킨스는 과학적 무신론의 대표적 학자로 부상했다.
 
정택은 전문기자 yesgo@kmc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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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기독교타임즈 523호 (2008년 5월 31일자) 기획면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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