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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성지순례 기행

[튀르키예 여행/ 성지순례 여행]빌라델비아, 작은 능력으로 섬기다.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19. 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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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묵깔레 지역내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온천관광지 답게 이 호텔도 온천을 즐길수 있는 시설이 있었다. 그렇다고 한국의 온천 관광지와 같은 풍경을 그리면 곤란하다. 수영복을 입고 미지근한 물에 수영을 즐기는 정도로 생각하면 적당하다. 다음날 아침 일찍 눈을 떴다. 또 다시 이동이다. 나그네의 삶이 어떤 건지 실감한다. 버스에 오른다. 오늘은 2시간여 이동을 하여 '형제사랑'이라 불리우는 빌라델비아로 이동한다.
BC 2세기 아나톨리아 서부를 지배하던 페르가몬 아탈로스 왕조의 에우메네스 2세가 그의 동생 아탈로스 2세 필라델포스가 자신의 이름을 따서 지은 곳으로 알려져있다. 이곳은 현재 ‘알라셰히르’(Alahsehir)로 불린다. 옛 이름이 빌라델비아이다. 이 고대도시는 성벽과 아크로폴리스 극장, 신전 등의 흔적은 있지만, 많은 지진으로 인해 고대도시의 원형은 찾기 어렵다고 한다.

마을 중심부에 들어가면 빌라델비아 ‘성 요한 기념 교회’가 약 15m 높이의 거대한 네 개의 돌기둥으로만 남겨져 있다. 


기대하는 마음으로 빌라델비아로 가는 길에 창밖을 보니 도로 좌우로 넓은 포도밭이 펼쳐져있다. 땅이 비옥한 이곳은 특별히 포도농사를 짓기에 매우 좋은 토양을 지녔다. 포도의 상태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지역에서 판매하는 건포도를 맛보았는데 굉장히 달고 맛 있었다.
건포도 뿐아니라 포도주의 고장으로서 좋은 포도주가 제조되는 곳이었다. 포도주의 신인 디오니수스(Dionysus)가 수호신이다. 술의 문화가 자리잡은 곳은 대체로 인생을 향유하는 문화가 깔려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교회는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야 할까?
좁은 마을 도로를 지난다. 대형버스가 오르기엔 쉽지 않은 좁은 도로다. 결국 인근에 차를 대고 걸어갔다.
마을 중심부에 들어가면 빌라델비아 ‘성 요한 기념 교회’가 약 15m 높이의 거대한 네 개의 돌기둥으로만 남겨져 있다. 이곳에 요한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궁금하기도 하지만 달리 알아낼 방도는 없다. 그리고 이 요한이 사도 요한을 말하는 건지, 이 교회와 관련된 혹은 요한이라고 불리우는 어떤 성인중에 한 사람인지 더더욱 알수 없다. 다만 빌라델비아 지역내에 유일하게 교회터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기에 이 곳을 통해서 초대교회 모습을 묵상하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 교회는 마을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마을은 아주 조용했다.
왜 네개의 기둥만 남았을까?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계 3:12)'
이 말씀은 기둥만 남아있는 이 교회의 상징적인 의미이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계 3:12)' 


남아 있는 이 돌기둥들은 교회의 규모를 실감하게 한다. 계속 당부하지만 이 돌기둥들을 보면서 우리가 잘알고있는 요한 계시록의 편지에서 등장하는 빌라델비아 교회라고 여기면 안된다. 어쩌면 성경의 빌라델비아교회는 작은 규모의 가정교회 였을 것이다.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라는 말씀에서 작은 능력이란 말 그대로 교회의 규모를 말하는 것이다. 작은 모임이었다는 것이다.

빌라델비아 ‘요한 기념 교회’가 약 15m 높이의 육중한 네 개의 돌기둥으로만 남겨져 있다.


이미 밝힌대로 이 작은 교회는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하나님의 말씀을 배반하지 않았다고 칭찬을 받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배반하지 않았다는 칭찬은 어떤 의미였을까?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술과 향락의 문화가 있는 곳에서 진리를 말하는 것은 쉽지 않다. 저마다 술자리에서 인생을 향유(享有)하기 때문이다. 죽음이나 진리나 그 자리에서는 모두 상대화된다. 술자리에서 인생을 향유하는 자리에서 진리가 어디있을까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곧 진리아닐까?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옳다고 여기는 곳이 인생을 향유하는 곳아닐까?

오늘날 술자리 뿐아니라 SNS와 같은 곳은 저마다의 생각과 느낌으로 인생을 향유하는 자리다. 네 생각이 옳다. 네 생각대로 하라. 네가 느끼는 느낌대로 살아라. 한다. 그것이 곧 진리다. 아니 진리이다 아니다 라는 규정자체도 향유의 문화속에서는 옳지 않다. 진리가 아니라 '이야기'다. 이런 분위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감이다.
향유라는 말은 사실 행복이라는 말과 닮았다. 작고 소소한 행복을 누리려는 사람들이 많다. 경제가 어렵고 현실을 탈피하고 싶은 시대일수록 행복을 동향하는 이들이 많다. 인생을 향유하는 시도들을 많이 한다. 이런 분위기 속에 자칫 가르치려하거나 진리라는 명목아래 삶의 방향을 바꾸려하는 시도는 '꼰대'라고 비판을 받는다.

인생을 향유하는 문화 안에서 교회는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먼저 관계의 부딪힘이나 어려움을 피해 교회 밖으로 나간다. 교회밖에 교인들을 오늘날 '가나안 성도'라고 한다. 교회에 '안나가'는 성도 라는 뜻이다. 향유하는 삶을 사는데 방해되는 모든 것들을 차단한다. 신앙은 지키되 공동체적인 것을 벗어나 철저히 개인주의화 되는 것이다.
그리고 개혁이라는 이름아래 문화안으로 들어가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청년들의 문화안으로 도심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교회가 사람들의 삶의 자리로 들어가는 것이다. 오히려 교회가 공동체화 되는 것이다. 사람들의 삶의 자리를 변화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나아간다. 변화시킨다.
또한 외부의 문화를 차단하는 방식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뭉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세상의 관심과 문화가 교회 내부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굳게 문을 닫는 상태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렇게 교회는 인생을 향유하는 문화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다양한 방식속에서 놓치지 말아야할 것이 있다.
먼저 예수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 '열린문'을 두었다는 것이다.
열린문은 구원의 문이다. 이 구원을 문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을 얻는다. 그런데 이문이 닫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열린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그 열린 문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
이 구원의 문을 열고 닫는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외에는 없다. 인생을 향유하는 문화가 내재하는 곳에는 절망과 한숨이 있다. 절망스럽기 때문에 향유를 선택하는 것이다. 깊은 한숨은 현실을 탈피하고 싶어 몸부림 친다. 외로움과 낙심이 인생의 깊은 곳을 요동치니 그저 인생을 멀찍히 관조하려 한다.
인생을 향유하는 문화의 뿌리 깊은 곳에는 분노가 있다. 그리고 분노는 결국 죽음의 문제와 연결짓는다.
교회는 인생의 문제를 그저 가볍게 생각하는 곳이 아니다. 구원의 문제를 고민하는 곳이다. 절망과 한숨의 인생에서 벗어나는 법을 아는 열린문이 존재하는 곳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현실의 문제의 답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곳이 교회다.

교회가 놓치지 말아야 할 또 한가지는 '삶'이다. 작은 능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배반하지 않는 몸부림 말이다. 빌라델비아 교회에는 독특한 삶이 있었다. 작은 능력으로 살아가는 삶 말이다. 이런 문화속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삶이다. 인내하며 사는 삶,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 이것이 세상과 구별되는 삶이다. 인생을 향유하는 문화에서 감동을 주는 것은 삶이다. 작은 능력이 있지만 그 속에서 영향을 미치며 살아가는 삶 말이다. 아마 이 작은 공동체는 그들이 가진 작은 힘을 가지고 능력있게 살았을 것이다. 이 작은 공동체는 소아시아 내 300여 교회에 성찬식에 쓸 포도주를 무료로 공급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삶이다. 향유의 문화속에 교회가 굳건하게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것은 삶이다. 삶은 곧 공감과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우리에게 큰 공감과 감동을 주어 변화시켰던 것처럼 말이다.

싱그러운 포도열매를 조각해 낸 비문이다. 

교회 이곳저곳을 둘러보는데 한쪽 구석에 재미있는 비문이 있다. 포도다. 싱그러운 포도 열매를 조각해 낸 비문이다. 포도주는 포도의 여러알갱이를 짜내어 숙성시켜 만드는 것이다. 한 잔의 포도주는 그렇게 나온다. 그리고 그 포도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성도들 한 사람 한사람이 말씀으로 인내하며 섬기며 몸부림 치며 세상에 존재한다. 마치 포도알갱이를 짜내는 것처럼 말이다. 짜낸 포도즙은 그대로 세상으로 향한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생명을 살리는 능력이 되어 흘러간다. 받아 마시는 자들마다 능력이 된다. 교회는 세상에 그렇게 존재한다.

밖으로 나왔다. 교회 근처에 빵집이 있다. 커다란 빵이 한개씩 주어졌다. 따뜻했다. 쌀쌀한 아침이라 저마다 막 나온 따끈한 빵을 가슴에 안고 뜯어먹기 시작했다. 분명 포도주를 묵상했는데, 먹는 것은 빵 조각이었다. 빵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한다. 뜯겨져 우리의 주린 배를 채운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능력이다.
아...따뜻한 빵조각을 들고 작은 능력을 묵상하니, 떠오르는 것이 또 누룩이다. 빵을 만드는 가장 필요한 소재는 누룩이다. 밀가루에 누룩을 넣으면 그것은 부풀어 빵이된다. 예수께서는 보잘 것없는 미물인 누룩이 밀가루 속에 있을때 부풀어 오르는 속성을 보시고 하나님나라로 비유하셨다. 그래 하나님나라다. 누룩과 같은 우리가 성전의 기둥이며 하나님나라다. 결국 삶이다.

고소한 빵은 먹는 이들을 행복하게 한다. 겉은 딱딱하고 속은 부드러운 빵이다. 아주 잘 익었다. 스프라든지 잼이라든지 꿀이라든지, 버터라든지 아무 것도 없는 그냥 빵이었다. 게다가 이미 아침식사를 든든하게 먹고 나온 뒤였다. 그런데 그 맛이 얼마나 고소하고 맛있었는지 모른다. 굶주린이들 처럼 허겁지겁 빵을 떼어먹었다.

네 개의 거대한 기둥만 남은 빌라델비아 교회를 뒤로 했다. 다음 지역으로 가기 위해서 이다.
멀찍이 서 있는 기둥 들을 보면서 우리가 믿는 신앙의 중요성과 삶의 중요성을 묵상해 본다.
형제사랑을 실천하는 교회 작은 능력을 실천했던 상징인 포도주와 빵을 떠올려본다.
그리고 성찬이 주는 의미를 가슴에 담아본다.
포도주와 빵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 처럼 뜯겨지고 나누어져 전해진다. 그곳에 생명을 전한다. 세상을 살린다.
결국 살리는 것은 삶이다.
지금도 육중하게 남아있는 교회의 네 기둥들이 생각난다. 그 기둥들 사이로 기둥과 같이 하나님나라의 확장을 위해 열정을 다했던 사도들, 그리고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 몸부림 쳤던 기둥과 같은 일꾼들이 생각난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계 3: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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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함께 걸었네 - YES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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