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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한 기대 (삶)/책과 삶

마틴 스콜세지의 사일런스를 보고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17.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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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21일 문화와선교연구원에서 주최하는 필름포럼에서 마틴 스콜세지가 제작한 "사일런스"를 보았다.

이미 필지가 적잖은 충격과 답답한 마음으로 읽었던 엔도 슈사쿠의 『침묵』의 내용을 그대로 영화로 옮겨놓은 것이다.

그래서 이 사일런스의 개봉을 기다렸고, 기대감을 가지고 관람하였다.

 

(출처: 사진은 네이버에서)

이미 침묵이란 소설을 접하신 분들은 알겟지만,

이 영화의 처음과 시작은 하나님의 침묵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한다.

고통의 순간에서 하나님은 왜 침묵하십니까?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이다.

그리고 배교를 선택한다.

이 영화를 본 필자의 고민을 몇가지 나누는 것으로 글을 진행하려고 한다.

그저 원작의 저자와 영화의 감독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질문을 던지고 질문으로 마무리 하려고한다.

1. 감독은 로드리게스와 예수그리스도와 끊임없이 동일화시키는 작업을 시도한다.

영화의 중반부에 기치지로의 배신으로 로드리게스는 일본 관료들에 의해 잡혀간다. 

잡혀가는 로드리게스를 예수로 현상금으로 사제를 팔아넘긴 기치지로를

가룟인 유다로 대비하는 듯한 묘사가 이어지고있다. 

그리고 구멍매달기로 고토당하는 이들을 살리기위한 '로드리게스의 고뇌'와

'예수 그리스도의 고뇌'가 동일시되고 있다.

어째든 로드리게스는 '구멍매달기 고문'을 당하는 이들을 살리기위해서

결국 배교의 길을 선택한다.

기꺼이 순교의 자리에 들어가는 일본인들을 보면서

저들은 너를 위해 죽는 것이다. 저들은 너를 위해 고문을 당하는 것이다.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라는 것을 인식시켜주고 있다.

감독은 무엇을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것이었을까? 우리는 예수가 아니다?

저들은 너를 위해 죽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곳에 계셨어도 로드리게스처럼

그들을 살리기위해서 배교했을 것이다. 혹은 성상을 밟고 지나갔을것이다?

왜 감독은 로드리게스와 예수를 동일화 시키고 있을까?


원작 "침묵" 에서도 로드리게스(로드리고 신부)는 그들을 살리기위해 배교를 선택한다.

"나도 그랬었지 저 캄캄하고 차디찬 밤 나도 지금의 자네와 마찬가지였어,                                                            

 하지만 그것이 사랑의 행위란 말인가?                                                                                                         

신부인 나는 그리스도를 배우면서 살아가라고 가르쳤어 

그러나 만약 그리스도께서 여기에 계신다면.....

확실히 그리스도는 그들을 위해 배교했을거야......p267[각주:1]

이렇게 해서 신부가 성황에 발을 올려 놓았을때 아침이 왔다.
(마치 베드로를 연상하게 하듯...소설은 끝이난다.) 멀리서 닭이 울었다...

 

그리스도는 그들을 (살리기)위해 배교했을 것이다....

과연 그럴까?....

진정한 죽음은 무엇일까? 그리고 진정한 살림이란 무엇일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리신 생명은 무엇일까?


예수께서 살리신 것은 육적 생명이 아니다.

결국 인간은 모두 죽는다. 예수께서 나사로를 살리셨지만,

분명한건, 나사로는 지금 여기에 없다.

그를 지금 이공간에서 찾는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이미 먼지가 되어있기때문이다. 

나사로는 살림을 받았지만 그는 분명 죽었다.

로드리게스와 감독이 집착한 것은 그저 사람의 생명이었다.

죽음에서 살리는 것이었다. 그러니 자신이 배교를 택하면서까지

그들을 살리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의미에서 로드리게스는 예수가 될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 그들을 살리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살리기 위한 생명은, 우리가 집착하는 '인생'이 아니다.

그것은 '진짜 생명'이다. 로드리게스가 집착한 생명은 인간의 삶, 육체적 생명이라면,

예수께서 집착한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다.

엔도슈사쿠와 스콜세지감독 그리고 로드리게스는 그 점을 잊은 것같다.

인간의 생명의 본질말이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집착하셨던 생명이 무엇이었는지 말이다.


예수와 로드리게스를 대비하여 동일시했던 감독의 의지를 통해서 깨닫는 것은,

인간의 죽음과 고통에 대한 휴머니즘적 고뇌와 고민이 이 영화의 주요 주제인 것 같다.

 

2. 감독은 후미에를 밟고 지나가는 로드리게스의 행위를 배교라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배교는 아니다. 라고 여겼을까?

일본 기리시탄들에게 후미에를 밟고 지나가도록 하는 정책을 그저 형식에 불과한 것이라도 하는 장면은 마치

구한말 한국의 신사참배를 결의할때 신사는 국가적 의례 행위라고 여기도록 한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이 든다.

어째든 중반부 이노우에는 일본의 한 마을의 기리시탄들에게 후미에를 밟고 지나가도록 요청한다.

그러나 마을의 촌장과 기치지로를 비롯한 이들은 후미에를 밟는다.

그런데 십자가에 침을 뱉고 마리아를 모욕하라는 명령에 이들은 결국 하지 못한다.

이 장면에서 신앙의 형식과 본질에 대한 고민이 생긴다.

무엇이 배교일까? 신앙이란 무엇일까? 

후미에는 밟을수 있었지만 예수를 모욕하는 것은 왜 하지 못했을까?

그들의 보이지 않았던 신앙의 진심이 겉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면 이들은 후미에를 밟은 것처럼 그리고 기치지로처럼

십자가에 침도 뱉을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은 이러 이러한 것이다. 규정할수 있을까?

어떤 모습으로든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어떠한지를 드러내려고 할것이고,

더 강력하게 몰아붙일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을 넘어뜨리게 할것이다.

결국 이들은 해변에 십자가 형틀을 세우고 거친 파도에 익사시키는 참혹한 모습으로 죽어간다. 


그리고 로드리게스는 구멍매달리기 고문에 매달려 있는 이들을 위해서

후미에를 밟고 지나간다.

후미에를 밟고 지나가는 것, 이를 배교라고 볼수 있을까?

 

감독은 마치 질문하고 있는 것같다.

이 질문에 우리가 섣불이 대답할수 없는 것은 신앙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엔 배교가 분명하다. 그러나 신앙은 보이지 않는 것 아니겠는가.

기치지로가 매번 후미에를 밟지만 그의 몸안에는 여전히 성상을 지니고 있었던 것처럼,

겉모습과 형식으로 배교를 규정할수있을까?

누가 신앙을 판단할수 있을까? 감독은 질문하고 있는 것같다.

 

3. 감독은 왜 로드리게스의 배교 이후에 죽음과 마지막 장면을 덧붙였을까?

영화는 로드리게스의 관찰과 경험을 바탕으로 진행되어

말미에는 자신의 삶을 마치 상상하듯이 제 삼자의 관점으로 마치고 있다.

배교이후에 그는 페레이라신부와 함께 기독교의 허구에 대한 책들,

기독교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검사하는 관리로 살아간다.

그리고 매년 후미에(성상)를 밟는 의식을 한다.

결국 그는 죽어서 불교식으로 장례를 치룬다.

입관하여 발인하게 될때 그의 아내가 죽음 로드리게스의 손에

그가 늘 지니고 다녔던 십자가를 쥐어준다.

영화는 그 손에 있는 십자가를 마지막장면으로 택하고 끝난다.

감독은 왜 로드리게스의 배교 이후의 장면을 넣었을까?

사실 원작에는 없는 장면이기도 하다.

로드리게스의 배교에 대해 변호하려는 의지도 느껴졌을뿐아니라,  

후미에를 밟고 지나가는 의식이 진정한 배교일까?

신앙의 본질은 무엇일까? 라는 질문을 던지게 하기 위한 의도였을까?

여기에서 엔도수사쿠의 침묵 저작 동기를 살펴보지 않을수 없다.


"후미에(성상)를 밟지 않았던 사람은 결국 고문을 받고 죽어갔다. 그들은 '강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 편, 본의는 물론 아니면서도 후미에를 밝았던 '약한 사람들'도 있었다.

누구를 막론하고 후미에를 밟고 싶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나는 기리시단(그리스도교) 시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곧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순교자가 될 수 없었던 사람들, 즉 자신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신앙을 버렸던 사람들에 대한 기록은

그 어느 교회에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념을 관철했던 강자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었지만 배교자,

말하자면 '썩은 사과'에 대해서는 당시의 교회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마치 학교가 낙제생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는 것과 같았다."[각주:2]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배교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던것같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 변호하고 싶었던 것같다.

이시대에 무엇이 신앙이며 순교이며, 배교인지를 고민하게 하기 위해

마지막 부분은 그의 상상력을 넣은 것이 아닌가 싶다.


4. 마치 마지막 부분에 로드리게스는 하나님의 침묵에 대한 답을 찾은것 같다.

기치지로가 그 앞에서 고해를 하고 받아줄때 로드리게스의 독백이 이어진다.

어둠속에 있을때 하나님의 침묵속에 음성을 들었다고 말이다.

침묵의 소리...

고통당하는 이들을 향한 하나님을 향한 탄식, 그리고 침묵

어쩌면 이 원작과 영화의 전반부에 흐르는 침묵과 배교는..

배신의 모티브를 중심으로 흐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의 침묵은 마치 인간편에서 즉 고통당하는 인간편에서는 일종의 배신이다.

그리고 인간의 배교는 하나님의 편에서는 배신이다.

배신의 모티브가 흐르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침묵속에 그분의 음성이 인간의 배신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나즈막한 믿음이

흐르고 있다. 두 양면성이 이 영화에 치열하게 존재하고 있어서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함과 고민이 함께 공존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고민과 공존이 로드리게스가 후미에를 밟고 지나갈때, 들려온 '밟으라'는 음성은 그동안의

불편함과 고민을 한순간에 정화(카타르시스)시키는 역할을 하지만, 그 고뇌는 가중된다.


5. 그리고 배교를 통해서 깊은 인간의 나약함을 보여주지만, 그것은 철저히 죽음에 대한 것이다.

배교의 결과는 참혹한 죽음이다.

우스개로 그저 칼한방에 죽는 게 가장 편하게 죽는 것같다. 그런 순교라면 하겠다는 생각도 든다.

배교의 결과로 참혹한 고문과 죽음이기에 쉽게

배교에 대해서 말하기 어렵다. 그 어떤 인간이 죽음과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 쉽게 이야기할수 있을까?

영화를 보면서 배교와 참혹한 죽음을 통해

인간에겐 죽음의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느끼게 해준다.

죽음앞에서 인간은 그의 신앙을 다시 정검하게 된다.

에수께서 부활하셨다는 믿음, 우리의 거할곳을 예비해 두셨다는 믿음

이것이 이 사일런스를 보는 내내 어떻게 대답을 내려줄지 되돌아보며 보면 좋을 것같다.

그리고 더 불어 순교도 없고 배교도 없는

오늘날, 신앙과 배교는 어떤 의미일까?

오늘날 순교는 무엇일까..

고민하게 된다.  







  1. 출처: http://shinjoo.tistory.com/entry/엔도-수사쿠의-침묵을-읽고 [신주의 서재] [본문으로]
  2. http://www.christiantoday.co.kr/articles/297656/20170222/김지철-목사-사일런스-이-영화가-불편하다.htm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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