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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성지순례 기행

[튀르키예 여행/ 성지순례 여행] 라오디게아 교회터 에서 만난 백합화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19.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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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시디아 안디옥 교회터를 내려오면 내내 감격스러웠다. 사도바울의 이방선교를 위한 결단의 장소 탁월한 복음설교로 유대인들의 마음을 흔들어놨던 장소를 직접 거닐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곳에서 드린 수요예배 인도자로 교회의 터 강대상에 서봤다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인지 모르겠다. 
감격스러운 마음을 정리하고 버스에 올랐다. 
파묵깔레로 향한다. 파묵깔레는 세계적인 온천 관광지이다. 그곳에 라오디게아 지역 교회터를 방문할 예정이다. 
버스로 약 한시간 20분여 이동을 하였다. 
라오디게아 지역의 교회를 둘러보기위해 내린 곳엔 이름모를 빨강색의 꽃들이 여기저기 피어 있었다.
너무 아름다웠다. 순례팀들은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서 사진을 찍고 있다. 개양귀비 꽃이다. 

라오디게아 교회 터에서 만난 백합화(개양귀비)

 
개양귀비 꽃은 성경에서 들에 핀 백합화( , lily)로 알려져있다. 백합화가 빨간색이었다는 사실에서도 혼란스러웠지만 백합화에서 백자 한문이 흰백(白)이 아니라 일백 백(百)자 라는 사실도 놀라웠다. 말하자면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그 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강한 향기가 나는 흰 꽃이 아니라 들판에 쫘악 깔려있는 흔하디 흔한 들 풀이 백합화 였다는 것이다. '주는 저산 밑에 백합 빛나는 새벽별' 이라고 할때 그 백합은 고결과 순결의 상징인 향기 진동하는 하얀꽃 아닐수도 있다는 말이 당혹스러웠던 것이다. 
흔하디 흔한 들꽃 광야에 아무곳에나 피어있어 귀중함과 소중함도 모를 그런 꽃이 백합이다. 그리고 이 백합의 상징이 우리 주님이시다. 
또한 백합은 복음서에 자주 등장하는 꽃이다. 우리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 가 보라' 이 본문 말씀은 마태복음 6장에 등장한다. 우리는 5장~7장에 걸친 긴 설교 특히 산에서 하신 설교라 하여 산상수훈이라고한다. 어떤이들은 산상수훈을 일컬어 왕으로 임하신 예수그리스도의 취임식이라고 불릴정도로 하나님나라의 백성된 우리들에게 중요한 말씀이다. 이따금씩 우리가 신앙의 여정으로 살아갈때 두려움이 몰아쳐오고 염려를 붙들고 살아갈수 밖에 없는 순간 우리는 단호하게 이 산상수훈을 펴서 읽어야 한다.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우리 주 예수께서 친히 가르쳐주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들의 백합화 이야기로 넘어가보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마 6:28~33)"

들의 백합화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백합화를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묵상할수 있을까? 본문의 주제는 '염려하지 말라' 이다.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먹고 사는 문제에 지나치게 집착하며 살지 말아라 인 것이다. 
우리가 먹고 사는 문제에 집착하는 이유는 다른게 아니다. 그 깊숙한 곳에 있는 '죽음'때문이다. 
죽음이 두려워 먹고 사는 문제에 집착한다. 살기위해 살아가고 살기위해 염려를 붙들고 살아간다. 
우리 주님은 우리 마음 깊숙한 곳에 도사리고 있는 죽음의 문제를 잘알고 계신다. 

부활신앙이란 무엇일까? 죽고 다시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먹고 사는 문제에 집착하지 않고 살기위해 염려를 붙들고 살지 않는 이유는 오직 하나 밖에 없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하심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으셨다. 그리고 부활하셨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 경험을 한다.
죽음의 권세가 우리를 절대로 무너뜨릴수 없다는 것을 믿는다.

순례팀들과 성지순례를 오기전에 앤드류 하얏트 감독의 "바울"이라는 영화를 봤다. 
감독적인 영화였지만 아직도 내 머리에 인상 깊었던 장면이 있다.
영화 중간쯤 의사 누가와 함께 감옥에 초대교회 성도들이 갇혀있다.
간수장이 내일이면 사형에 처할것이라고 사자밥이 될것이라고 전한다.
그러자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소리를 지르며 두려워한다. 
그러자 누가가 자신 주변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두려움이 가득한 성도들의 눈빛들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당할 환란과 고통은 짧으나, 기쁨은 영원할 것입니다." 하며
함께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성도들은 사자들이 있는 경기장으로 간다. 그들은 분명 죽었다. 그러나 부활신앙으로 다시 산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겐 이 믿음이 있었다. 부활할 것을 믿는 믿음. 
이 믿음이 우리에게 있으면 더이상 죽는 것이 두렵지않다.
이 세상을 하나님의 방식으로 정의와 공의를 실현하며 산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산다. 복음을 충성스럽게 살아간다. 왜냐하면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부활 신앙이다. 예수의 죽고 사심이 우리의 것이라는 믿음.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의 자녀라는 믿음. 이 믿음이 우리에게 있을때 우리는 먹고 사는 문제에 집착하지 않는다. 우리 주님도 산상수훈에서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 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결국 믿음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2~33)" 

우리는 먹고 사는 문제로 염려에 매이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나라를 위해 산다. 하나님나라의 방식을 따라 산다. 먼저 하나님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때 모든 것을 더해주실 것을 믿음으로 산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사는 삶의 방식이다. 

라오디게아 교회터에서 만난 백합화가 내 자신을 참 부끄럽게 한다. '믿음이 작은 자들아' 라고 하신 주님의 음성이
바람에 흔들리는 꽃 들 사이로 들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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