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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성지순례 기행

[튀르키예 여행/ 성지순례 여행]라오디게아, 네가 부유하려거든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19. 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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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양귀비꽃 밭을 지나 라오디게아 교회터를 향해 갔다. 멀리서 본 유적지들은 한참 개발중이었다.
긴 트레인들을 동원하여 당시 건물들을 복원중인것 같았다. 지금까지 장엄한 자연의 신비를 보다가 트레인으로 고대 건물을 복원하는 모습을 보니 유적지로서 갖는 신비감이 떨어지는 듯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상적인 것이 있었다. 잘 닦여진 도로였다. 로마는 이 잘 정비된 도로를 통해서 이 지역을 다스렸을 것이다. 전쟁 물자를 공급하기도 하고 군대를 동원했을 것이다. 문명은 이렇게 시작된다.  복음의 확장도 이렇게 시작된다. 이 도로위에 문명과 복음이 함께 통과했다. 문화와 복음 무엇이 먼저이냐 무엇이 본질이냐를 따지는 일들이 우리 주변에 있다. 문화와 복음은 함께간다. 
인간이 닦아 놓은 역사라는 길위에 문화도 복음도 함께 간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인간의 역사를 이어가신다. 사도바울이 이 길위을 걸으며 복음이 필요한 '복음의 최전선'으로 향한다. 문화와 함께 간다. 그것을 불리하지 않았다, 따로 떨어뜨려 생각하지도 않았다. 바울의 설교와 가르침은 분명 역사라는 길위에서 문화와 함께하였다. 
그리고 문화를 변화시키기도 하였고, 문화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라오디게아는 지금은 몇 차례의 지진으로 인해 폐허가 된 도시이지만, 잘 닦여진 도로가 말해주듯 찬란한 문명이 빛을 내던 도시였다. 그리고 복음의 좋은 통로 였다.  

라오디게아는 소아시아에 속한 도시다. 안티오쿠스 2세(Antiochus 2 B.C 261-246)가 주전 261년 과 253년 사이에 이 도시를 재건한다. 디오스포리스(Didspolis)로 불리웠던 이 도시는 아내인 라오디케(Laodike)의 이름을따라 라오디게아(Laodicea)로 명명했다. 라오디게아는 부르기아(Phryghia)의 수도였다. 그리고 리커스(Lycus) 계곡에 위치한 지리적 요충지로서 부유한 사업도시로서 알려져있다. 남쪽으로는 히에라폴리스가 서쪽으로 골로새가 그리고 동쪽으로는 에베소가 위치해 있다. 큰 도시들 사이에서 상업도시로 자리매김 한것이다. 

순례팀이 방문했을 라오디게아 교회터는 한참 복구중이었다. 서두에 지진 이야기가 나왔지만, 주변이 온천지대이고 지진이 자주 나는 도시로서 몇 차례 지진으로 인해 도시는 폐허가 된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진으로 폐허가 된 도시를 재건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이 지역은 부유한 도시였다. 

심지어는 AD. 60~61년 네로 통치시대때 라오디게아가 지진이 일어났는데, 도시 재건을 황제의 지원을 받지 않고 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그 도시는 부유했다. 황제의 재정적 원조를 거절할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그들의 부유함은 예수그리스도의 꾸중을 듣는 매개(媒介)로 작용한다. 

"너는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 실상 너는, 네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 (계 3:17)

부유함에 가리워져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부유한 재산 뿐아니라 영적인 부유까지도 자랑했다. 아니 자신의 경제적 번영은 영적인 삶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믿었다. 
부유함이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라면 자신들은 훌륭한 영적인 생활을 통해 이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사람들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물질적 풍요로움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서 나온다는 그릇된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실상 네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 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 
이들은 대다수가 상인들이었다. 돈을 벌기위해 그들은 온갖 노력을 다했다. 돈과 물질이 나를 평안하게 만들어 줄것이라 여겨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었던 이들이었다. 세상의 상인들의 모습을 요한계시록 18장에 보면 나와있다. 

이는, 모든 민족이 그 도시의 음행에서 빚어진 분노의 포도주를 마시고, 세상의 왕들이 그 도시와 더불어 음행하고, 세상의 상인들이 그 도시의 사치 바람에 치부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하늘에서 또 다른 음성이 울려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내 백성아, 그 도시에서 떠나거라. 너희는 그 도시의 죄에 가담하지 말고, 그 도시가 당하는 재난을 당하지 않도록 하여라. 그 도시의 죄는 하늘에까지 닿았고, 하나님은 그 도시의 불의한 행위를 기억하신다. (계18:3~5, 표준새번역판) 

신앙은 겉모습으로 판단할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부요하다고 해서 신앙의 상태가 좋다고 할수없다. 가난하다고 하나님과 관계가 뭔가 잘못되었다고 판단할수 없다. 우리는 흔히 물질의 풍성의 유무를 통해 하나님과 관계를 따져보는 이것을 기복신앙이라고 한다. 신앙을 물질의 상태로 판단하거나 하나님과 관계를 물질로 뭔가 해보려는 것 이것이 기복신앙이다. 라오디게아가 그런 도시였던 것이다. 우리 주님은 단호하게 그런 생각들을 경계하신다. 실상을 보여주신다. 
그리고 진정 부유함을 회복하려면 불에 정련한 금을 사고, 흰옷을 사서 입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바르라고 명하신다.  

"그러므로 나는 네게 권한다. 네가 부유하게 되려거든 불에 정련한 금을 내게서 사고, 네 벌거벗은 수치를 가려서 드러내지 않으려거든 흰 옷을 사서 입고, 네 눈이 밝아지려거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라."(계 3:18)

먼저 불에 정련한 금을 사라고 한다. 불에 정련한 금은 불순물을 제거한 순금을 말하는 것이다. 순금은 불에 정련(연단)을 해야한다. 불에 연단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진짜 믿음이 나오는 순간이다. 이를 테면 환란일수도 있겠다. 순금이란 순수한 신앙을 말하는 것이다. 죄라는 불순한 것들을 불로 연단하고 정련하여 순결하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
진정한 부요함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순결함이다. 
그리고 흰옷을 사서 입으라 말씀한다. 흰옷은 순결함을 상징한다. 당시 물질적 부유함은 계시록 18장에 경고한데로 죄에 가담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데서 왔다. 그것은 우상숭배를 말하는 것이다. 돈을 우상삼고, 물질을 우상삼는 것이다. 하나님보다 그것을 더 사랑하는 데서 우상숭배는 시작한다. 이것이 소위 벌거벗은 수치라고 말하는 것이다. 흰옷을 그것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다. 진정한 부요함은 하나님만 섬기는 삶이다. 
마지막으로 시력을 회복하기 위해 안약을 사라고 말씀하신다. 안약은 시력의 회복을 말하는 것이다. 어쩌면 분별을 말하는 것일지 모르겠다. 돈과 물질만능주의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갖춰야 할것은 분별력이다. 우상숭배의 삶에서 온전한 신앙을 지키려면 바로보는 것이 필요하다. 세상을 바로보는 능력의 회복 그것이 바로 안약을 바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부요함은 바로 영적 시력의 회복이다.
  

라오디게아 교회터는 활발하게 발굴작업중이다.


현재 라오디게아 교회터는 활발하게 발굴작업중이다. 최근에 발굴한 교회는 놀랍게도 그 규모가 상당히 큰데다가 바닥의 모자이크 까지 보존을 잘해놨다. 라오디게아 초대 교회로 사용되던 눔바의 집으로 추정되는 곳까지 발굴이 가능할 것같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눔바라는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집을 교회로 내놓았다는 것은 흥미롭다.
매주 손님을 맞이해야 하는 일을 누가 기뻐하겠는가? 필자도 목사라 가정 심방을 다닐때마다 깨끗하게 정돈된 성도들의 집을 보면 괜히 수고와 정성에 마음이 쓰일때가 있다. 옛 권사들은 심방때 목회자를 모시고 예배드리는 것을 예수님 모시는 것처럼 정성을 다했다. 그런데 예수님을 모시는 마음으로 섬기는 것은 비단 목회자들 뿐아니라 모든 이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작은 예수 들이다. 눔바는 그렇게 자신의 집을 내어놓았다. 그의 섬김과 사랑 덕분에 라오디게아 교회는 견고해졌을 것이다.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굳이 눔바와 그여자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라고 전한다.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 이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하고 또 라오디게아로부터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골 4:15~16)

새로 발굴된 교회는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어보였다. 고대 바실리카 건축양식으로 지어졌다. 교회 바깥 입구쪽에 커다란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는데 343년부터 381년까지 있었던 라오디게아 공의회(Council of Laodicea AD.343-381) 에서 결의된 60가지 교회법령(Canon) 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이곳이 그 공의회의 장소인지는 모르겠으나 라오디게아는 고대교회 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곳임은 분명했다. 313년 기독교 공인이후에 콘스탄티누스는 종교회의를 주재하여 기독교 진리들을 하나씩 정리해나갔다. 321년 니케아 공의회 이후로 삼위일체가 확립되고 343년부터 381년 까지 교회 법령들을 결의하는 라오디게아 공의회를 열었다.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다. 이런 가치들을 발견하는 것은 설레임 그자체다.  
 

60개조 법령을 읽는 중에 흥미로운 부분이 몇 가지를 발견할 수 있었는데, 16조를 보면 복음서와 서신서들을 안식일에 읽을 것을 명한다. 
16. 복음서, 사도들의 서신서 그리고 다른 성경들은 안식일에 읽는다. (16. the Gospel, the Epistle and the other Scriptures are to be read on the Sabbath.)
다시말해서 복음서와 서신서들이 신약의 정경으로 확립이 되어 안식일에 읽혀지도록 한것이다. 

29조를 보면 주일을 지킬것을 명한다.  
29. 그리스도인은 안식일에 일을 쉬지 말고, 주의 날에 쉬라 (A Chrisitan Shall not stop work on the sabbath, but on the Lord's Day.) 
초대교회 당시 안식일과 더불어 주의 날을 지켰을 것이다. 그러나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는 전통을 멈추고 주의 날에 쉬도록 한다.  교회는 공식적으로 주일을 안식일로 지키기시작하였다. 복음서와 서신서들을 정경으로 확립하여 읽혀지기 시작하였다. 점차 교회는 유대적요소를 배제하기 시작했다. 

라오디게아 공의회에서 결의된 60조항 @함신주


라오디게아교회 터의 문으로 들어 가보면 정면에 후진(後陳,Apse) 즉 반원으로 된 내부공간이 보인다. 이곳에 성찬을 할수있도록 제단을 설치했을 것이다. 그리고 후진을 중심으로 좌쪽으로 교회 밖에 세례단이 놓여있다.
초대교회에 세례단은 굉장히 중요한 요소였다. 신앙고백이기 때문이다. 세례는 외적(外的) 신앙고백이다. 외적이라는 말은 내적(內的)과 반대되는 말이다. 신앙은 볼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에 입교한이들은 세례교육을 통해 철저히 신앙교육을 받았다. 그 후 공식적으로 교인들앞에서 신앙고백을 하여 모든이들이 보는 앞에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래서 세례는 외적 신앙고백이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고백한 이들은 세례를 받고 교회로 들어와 성찬에 참여할수 있었다.
당시 박해가 있었던 시기에 아무나 세례를 주어 교회로 들여보낼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의미에서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박해를 감내하겠다는 의미이다.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어 예배당으로 들어가는 시점은 이미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시점일것이다. 
특이하게도 세례터는 십자가 형태로 되어있을 뿐아니라 상향으로 계단이 하향으로 계단이 놓여있었다. 아마도 상향 계단으로 내려와 가운데서 세례를 받고는 다시 하향 계단을 이용해 밖으로 나갔을 것이다.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는 다는 것은 죽고 사는 길이다. 물이 주는 의미자체가 깨끗함, 씻김 이라는 의미도 있겠지만 물은 곧 죽는 것이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롬 6:3~4)

그렇게 예수와 함께 연합을 경험한 자들은 세례터 밖으로 나가 좌측의 문으로 예배당으로 들어가 성찬에 참여하였을 것이다. 성찬대를 바라보면서 감격이 몰려온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깊은 연합의 차원을 경험한 것이다. 

라오디게아 교회터 좌측 밖에 놓여있는 세례터 @함신주

   
다시 예배당으로 들어가본다. 마치 내가 예수를 주고 고백하여 세례를 받고 막 교인이 된 것처럼 말이다. 예배당 중심부에 설교단이 놓여있다. 신기하게도 설교단이 교회 한 가운데 놓여있다. 설교단이 가운데 놓여있음으로 인해 아마도 회중은 좌우로 앉거나 서로 마주보는 구조일지도 모르겠다. 설교단의 좌우로 계단이 있다.
계단으로 올라가는 설교자는 그자체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임무를 가진다. 그리고 청중은 높은 설교단에 서있는 설교자를 고개를 들고 바라봄으로 겸손하게 말씀을 받는 자들이 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존경과 사랑으로 설교자를 바라본다. 물론 개신교의 예배의 대부분은 설교다. 설교의 비중이 높다. 다른 종교에 비해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미련하고 약한 인간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통로로 삼으시며 그 말씀으로 영혼이 소생되고 회복되는 도구로 삼으신 것은 신비중에 신비다.
말씀은 4가지 종류로 되어있다. 읽는 말씀으로 성경, 들려지는 말씀으로 설교, 보이는 말씀으로 성찬, 말씀 그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들리는 말씀으로 설교를 삼으신 것은 하나님의 오묘한 신비라고 할수 있다. 
설교자는 계단으로 강대상에 올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그리고 설교가 끝나면 계단을 통해 다시 내려온다.
오늘날 올라가야할 때와 내려올때를 헷갈리는 인생들이 많다. 목회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삶의 지혜는 다름아니라 올라가야 할때와 내려가야할 때를 아는 지혜이다. 사실 목회자 뿐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저 오르려고만 한다.

얼마전에 본 기생충이라는 영화가 생각이 난다. 그 영화의 주 모티브로 삼는 소재는 두가지 였는데 하나는 냄새요, 다른 하나는 계단이다. 냄새로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들 그리고 계급의 계단을 오르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영화는 우리에게 이것을 말해준다. ‘사람들은 올라가면 내려가야할 때를 모른다. 내려가기 싫어 처절하게 붙들고 놓지 않는다.’

설교자는 말그대로 전달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설교하러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면 언젠간 반드시 현실로 내려와야한다. 구원이 필요한 존재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기위해 몸부림치는 모습으로 말이다. 강대상에서 수 많은 인간적인 욕구들이 오르락 내리락하는, 설교자의 설교 시간은 어쩌면 영적 전쟁터이다.

설교자는 계단으로 강대상에 올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뒤에 다시 내려온다. @함신주

 

"라오디게아 교회의 심부름꾼에게 이렇게 써 보내어라. '아멘이신 분이시요, 신실하시고 참되신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처음이신 분이 말씀하신다나는 네 행위를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겠다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내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너는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 실상 너는, 네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는 네게 권한다
. 네가 부유하게 되려거든 불에 정련한 금을 내게서 사고, 네 벌거벗은 수치를 가려서 드러내지 않으려거든 흰 옷을 사서 입고, 네 눈이 밝아지려거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라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너는 열심을 내어 노력하고, 회개하여라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이기는 사람은, 내가 이긴 뒤에 내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보좌에 앉은 것과 같이, 나와 함께 내 보좌에 앉게 하여 주겠다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계 3:14~22, 표준새번역판)

개양귀비꽃 밭을 지나 라오디게아 교회터를 향해 갔다.@ 함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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