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간절한 기대 (삶)/책과 삶

단 셀리어스의 하나님의 임재로 나아감 거룩한 예배(김운용교수 역)를 읽고 1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10. 6. 30.
728x90
반응형

서론

 우선 본서를 읽는데 있어서 굉장히 힘들고 어려웠음을 먼저 밝힌다. 왜냐하면 예배학에 문외한인 서평자로서 예배학이 가지는 개념에 대한 이해부족과 생소한 단어들들의 등장은 마치 낯선 다른 세계를 여행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학이 가지는 중요성에 대해서는 본서를 통하여 깊이 절감하였고 그것은 어렵고 두꺼운 본서를 정독을 하면서 읽도록 마음을 복돋아 주었다. (해당 페이지 및 각주 생략)

서평자는 본서를 읽어 내려가면서 내내 한국교회의 예배의 현실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수 없었다. 특별히 전도사로서 학생들을 예배에 대한 교육을 지도함에 있어서 동일하게 느끼는 것은 예배에 대한 신학적인 통찰 없이 단지 예배 예절에 대해서만 지나치게 집중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된다. 그러다 보니 예배에는 생명력이 없고 딱딱하고 흥미없는 것으로 여겨질 뿐이다. 거룩함과 영광스러움이 임하는 그런 예배가 없는 예배가 지속되다 보니까 어느새 한국교회 안에 영성에 대한 깊은 목마름이 지속되고 있음을 보고 있다.

특별히 대형교회의 등장으로 예배가 참여가 아니라 참석으로 바뀌어 버린 모습을 보게된다. 예배가 예배공동체의 성령안에서 교제라기 보다 그저 예배에 참석하고 돌아가는 형태로 변해버린 힘을 잃어가는 ‘예배 공동체(liturgical assembly)'의 모습이 있다. 한국 교회의 예배가운데 성령의 기름부으심으로 인한 거룩함과 공동체안에서 기쁨으로 인한 생동감이 넘치기를 원한다. 원하기는 본서를 통해서 한국교회의 예배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열리고 갱신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란다.

본서의 구성은 본서의 저자인 돈 샐리어스가 서문에서 밝히는 대로 본서는 총 3부로 구성되어있다.

1부 ‘예전과 신학’은 함께 모인 성도들의 행동인 예배와 하나님과 세상에 대한 지식으로서의 신학사이에 존재하는 이련의 관계성에 대해서 탐구하게 된다. 1장과 2장은 인간적인 차원과 신학적인 차원의 특성을 함께 살펴보면서 인간의 고통과 하나님의 개입하심 영광송(doxology) 과 교리(doctrine)의 상호성에 대해 고찰하면서 시작한다. 3장과 4장은 각각 신학적인 차원에서 종말론과 바르트의 신학을 살펴봄으로써 예배에 대해서 고찰하고 있다. 2부 ‘기도로서 예배’ 에서는 예전적 기도(liturgical prayer)가 지니는 네가지 기본적형식에 대한 설명을 한다. 3부 ‘삶의 현장에서 드리는 예배’ 에서는 모든 기독교 예배가 행해지는 사회적.문화적 상황에 대해서 살펴보게 된다. 그래서 3부에서는 여러장에서 예배가운데 문화적 커뮤니케이션의 수단들이 어떻게 하면 예배와 문화를 예전적인 차원에서 평가하는 수단이 될 수 있고 되어야 하는지 설명하였다.

 
본론

1부 예전과 신학

1장 인간의 파토스와 하나님의 에토스

저자는 애니 달라들의 오늘날의 예배에 대한 현실을 따끔하게 충고해주는 의견으로 시작하고 있다. 미국의 작가이자 명상가인 애니 달라드는 기도와 예배에 대해서 많은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곤한다. 그의책 Holy the Firm (견고한 성소)에서 달라드는 대자연 안에 담고 있는 생명의 신배는 예배의 자리에 함께 모인 우리로 하여금 감탄하지 않을수 없게 만들기도 하고 소심하고 미신적인 행동을 하면서 두려움을 갖게 하기도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진정으로 자신을 죽이지 않고서도 사람들은 당당하게 하나님께 나아가 토해놓는 이런저런 말들로 가득한 예배”에 대해 언급하면서 사람들이 예배 가운데서 하나님과의 극히 피상적인 만남을 갖는 것에 만족할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달라드의 의견은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상식에 대한 문제점을 드러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드리는 예배가 진정한 예배라고 할수있는가? 저자는 예배의 최우선의 과제로서 먼저 하나님과 인간삶의 만남을 예배의 중요한 요소라고 지적했다.

“그러한 예배 모임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기대하지 못했던 형태로 우리 자신의 인간 삶과의 만남과 연결된다......이것은 회복되고 능력을 덧입은 바된 우리의 인간성을 향한 하나님의 제안이다. 인간의 파토스(pathos)는 하나님의 에토스(ethos)로 이끌어가는데 이것은 진정한 예배가 되게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예배가 되게하는 요소인 파토스란 무엇일까? 저자에 의하면 파토스는 이세상 가운데 내재하는 인간의 고통의 문제와 관련한 의미로 사용하였다. 문화적 패턴에 따라서 많은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감정과 열정은 실제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것으로 나아가게 하는 통로를 제공해준다. 또한 하나님의 에토스라는 용어를 통해 기독교의 예배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기주심의 장이며, 은혜와 영광이 인간적 형태로 표현되는 만남의 장으로 작용하게 된다는 사실을 나타내려고 했다.

“기독교 예배는 인간의 파토스는 연약하여 공격을 받아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말씀과 성만찬을 통해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스스로 낮아지시고 연약해지심의 에토스와 만나게 될 때 변형을 경험하게 되고 능력을 공급받게 된다.”

즉 인간의 죄와 두려움 고통들이 가지는 삐뚤어진 피조물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위엄을 높이고 있다. 예배의 모습은 이러한 이중적인 구조아래서 시작한다. 저자의 이런 접근은 서평자에게 신선한 의미를 주었다.

 “이것은 거룩한 성만찬에도 포함되는 것이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주는 나의 몸이요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나의 보혈이다.’ 이렇게 말씀하실 때 거기에는 인간 삶에 농축되어 있는 상처와 고통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주일날에 우리가 예배가운데로 나아올때에 ‘주님이 다시 오실때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파토스를 가지고 우리는 함께 모이는 것이다.

이어서 저자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함께 모인 성도의 모임은 함께 살아가면서 쉼없이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구하고 세상 가운데서 믿음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몸부림치는 열정으로부터 나온다. 따라서 성도의 모임 그자체는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사회적인 특성을 강화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무엇을 행하셨는지를 기억하는 행위는 존귀와 영광을 부여하며 모인 사람들의 파토스를 더깊게 만들어 준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저자는 예배를 인간의 모든 약함과 고통을 아시는 거룩한 분을 인정하는 예술이라고 밝힌다. “예배를 위해 함께 모이는 바로 그 행위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in) 함께 모이고, 그분의 초청을 따라 함께 모여, 함께 느리면서도 도무지 포기 할수 없는 춤을 추는 것과 같다.”

춤은 행위와 관련되어 있다. 예배는 인간의 파토스가 하나님을 만나는 상호 교통이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방식이라고 할수있으며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편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내어 주심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2장 기독 교리와 영광의 찬송

예배를 드리는 우리의 임무는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삶의 각 영역에서 영광을 돌리는 삶을 형성해가는 방식을 찾는 것이다. 십자가 신학은 결코 영광의 신학과 모순되지 않는다. 우리의 예배가 모든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그리스도의 스토리에 맞추어 조율되었을 때 그렇게 될수 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예배 정신 가운데서 말씀하시고 행하셨으며, 지금도 그리하시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기를 구하는 모든 그리스도인 공동체 가운데 행해지는 설교와 성례전을 위한 기초가 된다.

다시말해서 에배는 언제 어디서나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자기주심에 대해 우리의 응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가지 형식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먼저 예배에서 활용디는 모든 예술은 하나님의 영광을 이해할수 있는 차원으로 나타낼수 있어야 한다. 저자는 이어서 계속설명하기를 예배는 감추어진 하나님의 영광이 찬양의 형태로 드러나는 것인데.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 것처럼 찬양과 말씀 그리고 행동 과 비가시적인 것들을 통해서 드러난다. 둘째로 감사에 관한 것이다. 삶의 선물을 허락하심과 베푸신 복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단지 신비한 내적 경험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 공포, 신비에 대해 교회가 점차적으로 조율해 나가는 과정이다.

셋째로 영광가운데 참여하는 세가지가 있다. 예배에 참여하는 이러한 세단계는 목회자로서, 음악가로서 또는 예배자로서 감당하는 우리의 사역의 일부분이 된다.

제2 바티칸 공의회의 예배에 대한 전레헌장을 밝히고 있는 대로 첫 번째 단게는 예배에 있어 “완전하고 능동적이며 분명한 의식을 가진 참여”이다. 두 번째 단계는 교회로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참여하는 것이다. 세 번째 단계는 모든 단계로서 가장 깊은 신비를 담고 있는 단계로서 예배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로 그 삶가운데 참여하는 것이다.

 

3장 예배의 종말론적인 특성

이 3장은 예배가 가지는 종말론적인 특성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19세기 신학자들의 종말론적인 특성의 견해를 가지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신학적 견해를 가지고 교회력, 세례, 성만찬, 기독교장례 예식들의 주요한 패턴들을 살펴보면서 종말론의 프락시스가 어떻게 신선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하는 지에 관심을 갖게되었다.

주일의 종말론적 중요성은 초대교회가 주일을 지키는 행동과 가르침 가운데 잘 알려지고 있다. 세가지 연관된 사항이 이것을 분명하게 해준다. 첫째 주일은 빈무덤을 발견한 여인들의 증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한주가 시작한 첫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래서 그날은 ‘부활의 날’이라고 칭해진다.

두 번째 주일은 ‘여덟번째 날’로 알려진 날이다. 이것은 한주의 날짜를 헤아리는 데 있어서도 전혀 새로운 시작의 첫날이라는 의미와 다가오는 새로운 시대에 이미 참여하여씀을 알려주는 의미를 가진다.이것에 대한 첫 번째 증언으 ‘바나바의 편지’로 알려진 1세기 혹은 2세기 초기의 문헌에 나타난다. 여기에서 우리는 주일이 바로 예수님의 승천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주일과 주일사이의 8째 되는 날의 개념이 주일에서 주일로 옮겨지면서 죽음, 부활, 승천의 리듬 가운데서 모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세례는 기독교예배가 종말론이라는 사실을 가장 인상적이면서도 중심적으로 알려주는 방식이 있다. 세례의 가장중심적인 이미지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고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례는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되는 생명의 현재적 존재양식에 대해서 증언해준다. 그러므로 세레 공동체로서 교회는 그자체가 표징이며 희망에 대해 살아 있는 증언을 하는 공동체이다. 또한 세례를 통해 드러나는 이미지는 죄로부터 깨끗이 씻김을 받는 것과 관련이 있다. 죄사함을 받는 것과 성령님으로부터 새생명을 부여받는 것이 결국에는 종말론적 실재라는 사실이다.

성만찬은 세례의 신학을 공동체의 삶과 개인의 믿음생활 경험에서 수행한다고 할 수 있다. 함께 모여 성만찬을 나누면서 공동체는 모든 계급과 사회적 지위를 넘어서 모든 차별이 사라지게 된다. 또한 성만찬은 그리스도안에서 성취하신 모든 것을 생생하게 회상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만찬과 세례는 단지 회상이라는 의미를 넘어 하나님이 친히 약해지신 신적 연약성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이다. 왜냐면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있고 만지수 있게 친히 인간의 몸을 입으심으로 당신을 깨뜨리신 고난과 죽음이라는 상징성이 성만찬의 중심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장례는 그리스도인들이 고인을 장사하고 추모하기 위해서 함께 모일 때 두가지 기본적인 사항을 행하게 된다. 죽음의 실재와 가족을 잃은 슬픔이 하나님의 임재와 교회의 공동체와 만날 수 있도록 해야한다. 그리고 부활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안에 서있는 교회와 맺으신 하나님의 세례 언약 가운데서 경축하게 된다.

장례식의 전통적인 기능은 고인의 시신을 적절한 절차를 따라 편안하게 모시어 장사를 지내고 남은 유가족들을 위로하며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이 모든 과저은 부활의 소망을 선포하며 이루어진다.

4장 바르트와의 대화

성례전과 예배에 대한 바르트의 신학적 통찰에 대해 동의할수 없는 부분이 많이 있디만 이 장에서 기다랗게 바르트와의 신학적 대화를 시도한 이유는 기독교에배가 가지는 신학적 주요성을 복원할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함이고 또한 그의 신학이 가지는 예전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신학은 기도를 통해 존재하고 완정된다는 암묵적이며 계시적인 그림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을 보게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정한 기도는 암묵적이고 계시적이라고 말할수 있을까? 하나님께 간구하는 피조물, 즉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들의 상황 때문에 암묵적이며, 기도 그 자체는 하나님에 대한 놀라운 인식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에서 계시적이다. 그러므로 바르트의 신학은 기도가운데서 시작하고 끝이난다. 진정한 예배가 없이는 윤리가 생성될 수도 없으며 하나님의 뜻 앞에서 순종하는 공동체가 되지 않고서는 진실한 예배도 있을수 없다.

그의 교회교의학 Ⅳ/3/2에서 “기도가운데서 공동체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그것은 공동체를 부르시고, 세우시고, 견고케 하시며, 위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의 말씀이다.....”

칼뱅과 루터와 바르트는 주님의 기도 저체를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생명 가운데로 참여하도록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대로 이해한다. 즉 바로 여기에서 그리고 장래에 주어질 영원한 생명으로 참여하도록 해준다. 이러한 기도에 대한 예배 고찰은 2부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거룩한예배임재와영광에로나아감
카테고리 종교 > 기독교(개신교) > 기도/설교/전도 > 예배
지은이 단 샐리어즈 (WPA, 2010년)
상세보기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