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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한 기대 (삶)/책과 삶

단 샐리어스의 하나님의 임재로 나아감 거루한 예배(김운용 교수역)을 읽고 3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10.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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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삶의 현장에서 드리는 예배

9장 기록된 예배서의 텍스트를 넘어서

조셉 겔리뉴는 예배는 우리가 그안에서 살아가면서 계속해서 배워야할 나라와 같다. 언어를 배우고 문화를 배우고 관습을 배우듯이 말씀, 세례 성만찬등을 통해서 함께 모인 공동체를 어떻게 규정할수 있는지를 배우게 되었다. 특정공동체에서 예배에 참석하고 진행하는 것과 관련하여 민감성을 가지고 깊이 있는 연구가 진행되었다. 적어도 우리가 이론적으로 잘알고 있는 대로 규정을 따라 제정된 예배는 예배서의 지침을 따라 잘 준비된 예배문보다 훨씬 나은 것이다. 이러한 예배서이 텍스트는 비록 유연하게 변경할 여지가 거의 없다. 예배문, 즉 텍스트를 넘어서 가자는 말은 예배안의 상징과 상징으로서의 예배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 예배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서의 연구의 중심은 예배서의 예배텍스트에 대해 깊이 연구하면 할수록 텍스트를 넘도록 하는 강한 권고를 받는 다. 즉 오로지 예배 텍스트는 상징이 생생하게 가능하는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의 언어로서 작용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에 관한 언어와 하나님께 돌리는 언어는 형언할수 없는 깊이와 신비로서의 성경을가진다. 그런 삶의 형태는 우리가 사는 세상과 상징적 상호작용을 가진다.

그래서 기독교 예배는 공동체가 어떤 커뮤니케이션의 형태로 취할것인가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깊이 고려하게 되는 것은 세상이다.

10장 상황가운데서의 예배 ‘규범’

특별절기이든지 혹은 비절기 기간이든지 예배를 드리는 것은 문화적 커뮤니케이션 형태를 도입하는데 특히 하나님께 아뢰고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 즉 그리스도인은 몸담고 있는 세상에서 우리가 받은 것 이상의 어떤 언어 몸동작, 노래, 행동을 따로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옷을 입어야 하며 거주하고 있는 곳의 공기로 호흡해야 한다. 즉 우리가 드려지고 있는 예배에서 사용하고 있는 언어는 그 의미와 관점에 있어서도 문화적 언어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예배는 분명히 커뮤니케이션의 문화적 양태가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 생생해질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문화적 상황은 기독교 예배의식이 상징하는 의미를 보다 풍요롭게 할 수 있는 무언가를 분명히 가지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예배는 그것에 매여있지는 않다. 이것은 다양한 문화가운데 살던 사람들이 이런 패턴으로 복음화 되었다. 그러나 각각의 문화는 예배가운데서 분명 그들만의 커뮤니케이션 형태를 만든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우리는 어떻게 예배가 그자체를 위해 선지자적으로 자기 비판의능력을 새롭게 할수 있을 것인지를 논의한다.

 

11장 세상을 위한 예배와 윤리

그리스도인의 윤리와 도덕적 삶의 형성에 대한 질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할 것인가와 떨어져서는 적절하게 이해될수 없는 사안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와같이 공동체가 함게 올려드리는 찬양, 감사드림,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한 회상, 세상을 향한 탄식, 죄의 고백, 그리고 세상을 위한 중보등은 우리의 의도와 행동을 형성하는 기반의 한부분이 된다. 어떻게 기도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만찬과 세례를 행하는가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교회를 통한 믿음의 삶이 쇠퇴하기도 하고 부흥하기도 했던 역사적 성쇠기에 우리는 예배와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이세상 가운데 선의 실현이라는 차원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성을 간과 할수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된다. 오늘 우리 시대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찬양과 정의와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려는 우리의 사역의 간극이 너무나 크기에 아모스 선지자의 목소리가 반복해서 울려 퍼져야 할것같다.


12장 신비, 고통, 예배공동체의 예술

삶과 고통, 죽음의 신비, 그리고 선을 마음에 그리는 신비에 참여하지 않은 상태에서 영과 진리로 드리는 진정한 예배는 있을수 없다. 그것은 기독교 예배 그자체는 그리스도 안에서 허락하신 하나님의 자기 주심으로부터 그것의 패턴과 내용 그리고 역동성을 취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예배의 형식과 내용, 그리고 역동성에 참여하기 위해 필요한 내용들이 있다. 먼저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신비에 놀라움과 경외감과 모든 만물의 고통과 상호 의존성을 인식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것은 성만찬과 부활의 신비 혹은 빠스카의 신비로 이어지게 된다. 이것을 통해 교회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드러나심과 숨어계심의 역설에 초점을 맞춘다. 또한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인간 삶도 감추어진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춘다. 공동체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모인 신앙공동체이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공동체는 우리의 인식과 상상력에 연관된 형식과 이미지를 사용한다.

이렇게 진정한 예배는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미래를 보여주면서 언제나 우리의 권력이나 오만의 장치로 통제될수 있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은 십자가와 빈무덤 그리고 창조와 최종적인 성취사이에 드리워진 하나님의 영광으로 여전히 남아있다. 그러나 그러한 긴장 가운데서도 그분의 해방하는 힘은 분명히 작용하고 있다. 예배라는 예술은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그것이 기도하는 모든 대상을 포함한다.

 

13장 아름다움과 거룩

예배안에서 드러난 아름다움은 언제부터 사라지게 되었는가? 분명 예배라는 예술은우리를형성하고 우리의 가장 깊은 열망과 소망, 그리고 두려움을 표현할수 있도록 해준다. 이러한 인간의 정신과 육체의 가장 깊은 차원에 도달하지 못하는 예배서 텍스트와 찬양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사람들의 성화를 위해 온전히 섬길수 없게 된다. 그래서 예배라는 예술은 결코 ‘꾸밈이 없어야’한다. “미적 예배”는 현실감이 부족하고 예배자들의 삶속에서 정의를 실천하도록 강조가 부족하다는 비판은 부분적으로 미적 문화적 관심사와 관련이 있다. 예배의 가장 근본적인 목적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자기 커뮤니케이션의 신비가운데 참여하는 것이라면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거룩한 것을 위해작용하게 된다.

예배는 피조세계와 관련이 있으며 인간의 예술적 측면을 가진다. 왜냐하면 창조질서는 하나님이 손수 만드신 작품으로서 그나름대로의 자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정한 에배가 도입하는 예술은 단지 외적인 장식이나 외식의 정교함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수단에 관심을 가진다. 예배에 사용되는 자료와 질 그리고 예배 행위의 적합성과 비례성 및 통합성등과 같이 우리가 지금까지 언급한 것에 대한 미저인 고려가 없다면 전체 예배는 그 상징 능력에 있어서 상당히 감소하게 될 것이다.


14장 그리스도의 강림과 종말

기독교 인들은 시간의 종말을 회상하면서 예배력의 시작을 알린다. 여기에서 회상함으로 시작한다는 말은 어떤 것이 이전에 지나갔다는 사실을 알려주는데 ‘증거’,‘이미지의 교차’, ‘약속’ 등이 그것이다. 이번 장에서는 예전에 있어서 드러나는 종말론적 의미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종말에 대한 기독교적 에배의 의미는 이미 우리 가운데 와 계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임재를 가리키며 우리가 님의 자기 주심의 차원에 대해 알고있는 것을 중심으로 예배가 드려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심판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자기 주심이라는 차원의 일부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자기 주심은 세례와 성만찬이라고 부르는 성례전의 중심에 놓여있다. 심판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심을 통해 선도되는 영원한 위기로 우리가운데 작용한다. 심판은 그리스도의 표적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현존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우리를 위해 존재한다.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리는 대림절은 단순히 그자체로만 서있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성육신, 죽음, 그리고 부활의 사건을 예언적으로 다시 읽는 것이다. 대림절은 일종의 이중적 나선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매년마다 새롭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기 소통의 완전하 신비를 현재로부터 시작하여 앞뒤로 살펴보게한다. 이것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약속의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셨기에 그리고 그분의 창조의 영이 우리에게 머무르시고, 조명하시고, 권능을 부여하고 계시기에 가능하다.

 

마치며....

본서를 읽고 서평하려는 서평자의 관점은 공동체적인 예배에 있었다. 또한 본서를 읽고 깨닫는 바와 몇가지 예배에 대한 오늘날의 관점에 대해서 서평자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고자 한다.

먼저 오늘날 현대교회가 가지고 있는 큰 문제라 함은 극히 개인주의 적이고 이기적인 예배라고 생각한다. 오늘날에 등장하는 화려한 예배뒤에 드러나있는 코이노이아가 없는 예배의 모습의 씁슬함이 아닌가 생각된다. 다시말해서 그저 면목상의 예배 즉 교제가 없이 공적인 예배만을 드리고 집에가는 모습이 오늘날의 교회안에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다. 특히 대형교회의 모습속에서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의 예배가 지향해야할 목표는 성령안에서 일어나는 공동체적인 예배의 기쁨과 감격을 성도들로 하여금 어떻게 하면 맛볼수 있을까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어야 한다고 본다.

본 서의 저자가 시작부터 마지막장 까지 유지하고 있는 견해는 공동체적인 예배의 신비로움과 위대함이다. 그것은 초대 기독교 공동체가 유지하고 있는 아름다우며 신비스러운 모습이다.

그리고 이러한 예배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자기 비움이라는 위대한 진리가 내포되어 있는데 그것은 예배를 드리는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여지없이 드러나도록 우리를 부르신다. 또한 이러한 부르심은 종말론적인 기대로 나아가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약속을 기억하는 것이며 확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와 감사와 찬양을 통해서 우리의 언어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세를 유지해야 할 것이다.

두 번째로 서평자는 현대의 교회안에 있는 영성에 대한 목마름은 예배가 희생제사의 의미로 바뀌게 되었다는 견해를 가진다. 과연 현대의 예배안에 있는 영성에 대한 성도들의 목마름은 단지 희생제사의 의미로 전락될 수밖에 없을 것인가? 에대해서 본서의 저자는 예배안에 드러나는 상징 특별히 하나님의 임재와 관련된 대림절의 예배의 모습을 보여준다.

예배는 이미 저자가 밝힌 대로 하나님과 우리안에 어울어지는 춤과 같다고 하였다. 위대한 하나님의 자기 비움은 그자체가 신비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성육신과 부활절의 신비안에서 드러나는데 바로 성만찬을 통해서 우리는 그 신비안에 동참하게 된다.

세 번째로 세상을 향한 예배의 모습을 어떻게 담아낼수 있는가에 대한 부분이다. 오늘날의 예배의 문제점은 세상과의 소통의 단절에서 오는 문제다. 성도들은 어느세 세상과는 단절되는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유지하며 살아오고 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과연 기독교 공동체의 모습인가? 저자는 우리가 선지자적인 사명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 외쳐야 함을 알려주고 있다.

“세상의 고통을 위해 중보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행위 그 자체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회적 정치적 힘이 작용하는 이 세상에서 함께 연대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기도하는 사람들과 함께 전념하여 중보하는 것이 기도의 행위이다. 이와 같이 예배가운데 드리는 중보기도는 세상을 향한 연민을 훈련하는 장이된다.”

예배 가운데 우리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연민의 마음과 연합하여 이 세상과 연대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기도해야한다. 세상을 향해 윤리적인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 예배를 통한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그러므로 중보자의 위치에서 세상을 향해 외쳐야 할 것이다.

이상으로 본서의 요약 및 서평을 마치고자한다. 솔직히 책의 중간중간 매끄럽지 못한 문법의 연결로 글을 읽는데 참으로 어려웠으며, 낯선 단어의 사용으로 인해 예배학이라는 학문이 내게서 너무 멀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예배의 모습에 대해서 좀더 깊은 관점을 알려주었는데 그것은 공동체적인 예배에 대한 부분이었다. 귀한 책을 읽도록 인도해 주신 주님께 감사드린다.

거룩한예배임재와영광에로나아감
카테고리 종교 > 기독교(개신교) > 기도/설교/전도 > 예배
지은이 단 샐리어즈 (WPA,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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