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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성지순례 기행/튀르키예 그리스 바울의 발자취 기행

[그리스 여행 / 그리스 성지순례] 항구도시 까발라 -네압볼리, 복음의 발걸음 그 시작.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20.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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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함께 걸었네 - YES24

흥미로운 여행기를 토대로 성경의 배경과 교회사를 이해하고 인문 고전의 깊은 상상력까지 풍부하게 더할 수 있는 책이 나왔다. 역사신학을 전공한 함신주 목사가 코로나19로 세계 여행의 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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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발라는 로마 통치시기에는 네압폴리스로 불렸다. 처음 카발라에 도착했을때 작은 항구도시 라는 느낌을 지울수 없을 정도로 아기자기한 분위기가 풍겼다. 하지만 이곳은 그리스 북부 지방에서 두번째로 큰 항구도시로 알려져있다.

왜 이곳에 왔을까? 사도행전 16장 9절-12절이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우리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바울과 전도팀은 성령께서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을 느낀다. 그러자 지금의 터키 내륙 중부지역인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들어간다. 아마도 바울과 선교팀들은 비시디아 안디옥을 중심으로 교회들을 다녔을 것이다. 결국 무시아 앞에 이르러 터키 북쪽 비두니아로 가고자 하지만, 예수의 영이 허락락하지 않는다. 사실 이해하기 참 어려운 대목이기도 하다. 어째든 복음을 전하는 발걸음을 성령께서 막으시다니 말이다. 물론 막으셨다는 대목이 성령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막으시는 신비로운 역사라고 볼수도 있고, 질병이나 자연재해 같은 일로 막으실수도 있다. 정치나 권력자들에 의해서 그땅에 이룰수 없는 정황상의 어려움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일은 사도바울의 선교여행이 무작정 떠나는 여정이 아니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기도 하고 철저히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여정이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깨닫게 되는 대목이다. 바울은 순간순간 하나님의 은혜의 시간들을 추적해가는 과정속에서 하나님의 신비를 마주대했고, 아주 예민하게 성령의 인도를 받았다. 하지만 그 결과가 바로 성령의 막으심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막으심앞에 대항하지 않는다. 그저 순종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금하다. 성령께서는 왜 복음의 여정을 막으셨을까?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바울과 전도팀이 하나님나라와 복음을 위한 일에 헌신하고 달려가다가 뜻밖의 대상을 만난다. 바울의 대적자들도 아니다. 무신론자들도 아니다. 바로 성령이시다. 성령께서 막으시는 것이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사실 우리내 삶에도 바울과 같은 일들을 경험할때가 있다. 하나님나라를 위해 헌신하였지만, 그 일들을 미쳐 펼쳐보지도 못한체 열정을 접어야 하는 일이 생긴다. 우리의 모든 계획을 뒤로 미루거나 멈춰야 할때가 생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막으셨다고 믿는다. 그리고 기다린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은 선교적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곳으로 떠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충성스럽게 살아간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삶으로 입으로 전하면서 말이다. 직장이든 가정이든 학교든 그리스도인들은 있는 곳에서 예배의 삶을 살아가며 말씀대로 살아간다. 기도하며 하늘을 향해 부르짖는다.
우리가 부르짖어 기도하는 그 곳에 하늘의 하나님께서 임하신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과 땅에서 이루어진다. 이를 우리는 하나님나라 라고 한다.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삶은 하나님나라의 확장을 위한 선교적 삶인 것이다.
선교적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기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궤도의 수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일들을 통해서 우리가 무엇에 볼모로 잡혀있는지, 허망한데 굴복하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본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무엇에 더욱 집중을 해야하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를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선교적 사명을 지닌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하던지, 어디에 있던지 먼저 기도를 한다. 그때 하늘의 아버지는 우리의 기도에 친히 응답하신다.
하지만 이 응답이라는 것이 우리의 생각과 우리가 바라는 대로의 응답은 아니다. 물론 하나님아버지는 자녀가 바라는 대로 응답해 주시는 좋은 분이시다. 때로는 우리의 선교적 삶을 살아갈때, 방향의 수정을 위해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응답하시기도 하신다.
아예 응답하시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리고 막연히 기다려야 할때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응답의 방편이다. 기도 응답의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순종이다.
기도의 응답을 받았을때 이를 위해 우리를 부르신줄로 인정하며 거침없이 나아가야한다. 기도 응답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순종할 마음이 있는가 이다. 바울은 기꺼이 순종한다. 내가 생각한 방향이 아니라 할지라도, 미지의 땅으로 가는 길이라 할지라도 그는 순종한다. 그리고 확신한다.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말이다. 이 사건은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필요한 깨달음이다. 기도하고 있는가? 그리고 순종할 마음이 있는가.
결국 바울은 그리스 쪽으로 방향을 틀어 드로아로 내려간다. 그곳에서 바울은 한 마게도냐인이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환상을 본다. 바울은 즉시 마게도냐로 방향을 수정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부르신줄로 믿고 그길로 떠난다. 부르심앞에서 그는 지체하는 법이 없다. 곧장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거기서 빌립보에 이른다. 빌립보는 마게도냐의 첫 성이다.
까발라에 들어섰다. 첫 이미지는 작고 아기자기한 항구도시의 느낌이다. 버스에 내려서 도시를 가로질러 언덕을 올라간다. 교회가 보인다. 이곳이 바울 도착기념 교회다.

흥미롭게도 이 교회 마당에는 사도바울이 첫 발걸음을 그린 모자이크가 설치되어 있다. 모자이크 옆엔 사도행전 16장 9절-12절이 그리스어로 새겨져 있었는데 그림의 의미를 소개하려는 듯 보였다. 사도바울이 큰 성읖 앞에서 잠깐의 휴식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한 군인이 가운데에서 손가락으로 반대편을 가르치며 바울을 보고 있다. 아마도 바울에게 도와달라고 요청한 마게도냐인 같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품에 안고 오른 발은 배에 왼발은 육지에 딛고 있다. 그렇게 역동적인 느낌의 그림은 아니지만 바울의 표정은 아주 비장한 표정으로 정면을 강하게 주시하고 있다. 확신에 찬 그의 표정을 한눈에 볼수 있다.
그리고 그 모자이크 벽화앞에 커다란 돌 세개가 놓여있는데 사도바울이 네압볼리로 들어올때 밟았다고 여겨지는 돌들이었다.

물론 사도바울이 밟은 첫 돌이라는 의미라고 본다면 감히 어떻게 여기에 둘수 있을까? 기념과 상징으로서 충분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순례팀들이 다들 돌에 발을 얹고 사진을 찍고 있을 무렵, 나는 뒤를 돌아 교회 입구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봤다.
시끄러운 도시의 한 가운데 있는 그리스 정교회이지만, 내부는 조용했다. 기도자들과 개인 예배자들로 인해 사진찍는 것은 금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있는 사도바울이 왼쪽 발로 네압볼리를 밟고 있는 성화들이 여기저기 걸려있었다. 일반적으로 화려한 내부장식 보다는 전체가 하얀색 벽으로 되어있어 예배자들을 자연스럽게 정면에 있는 목조로된 제단으로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곳이 바울 도착 기념교회이다.



방금전에도 언급했지만 첫 발걸음은 중요하다. 역사에서 가장 관심있고 중요하게 보는 것은 무엇이 먼저인가? 첫 시작은 누구인가이다. 그것을 위해서 사료를 찾는다. 역사는 곧 사료전쟁이다. 사료를 찾아내는 것 뿐아니라 잘 정돈하여 가치있게 사용하는 것이 역사학의 중요한 과제이다.
교회사도 마찬가지다. 무엇이 처음인가? 어디가 처음인가를 찾는 것은 중요하다. 이곳 까발라, 네압볼리는 그런 의미에서 교회사에서 중요한 곳이다. 바울의 첫 발걸음 뿐아니라 성령께서 친히 지정하여 선교의 문을 열어주신 곳이기 때문이다.
유럽의 첫 문을 연 바울의 네압볼리 방문은 그야말로 교회역사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사건이다. 그러면 한국 선교역사에서 최초로 복음의 문을 연 시점은 언제였을까? 궁금하다. 몇 전에 한국 교회사 탐방차 부산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선교회 파송 선교사들이 한국 땅을 처음 밟은 사건을 이렇게 기억한다.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아침,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제물포항에 선교의 첫 발을 디뎠다.'
그러나 부산에서는 그렇게 기억하지 않는다. 선교사들이 이 땅에 첫 발을 디딘 곳은 제물포가 아니라 부산이라고 말이다. 물론 선교사들의 첫 발을 내디딘 사건을 기억하는 것은 훌륭한 일이나 이미 1832년 귀츨라프나 1866년 토마스 선교사가 이 땅에 발을 내딛은 것이 한국선교의 첫 문을 두드린 사건일 것이다. 하지만 굳이 따진다면 이들은 선교를 위한 방문을 목적으로 한국 선교의 문을 두드린 방문 선교사들이다. 정식 선교회에서 파송한 내한 선교사는 아니다. 게다가 이미 1872년 존 로스와 존 맥킨타이어가 의주상인들과 서씨(徐氏) 형제를 만나 그들에게 세례를 주고 함께 성경 번역작업을 착수한다. 그리고 1884년 자생적 신앙공동체인 소래교회가 형성되었다.
그러므로 이미 성경과 자생적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어있는 상황에 1884년 4월 최초로 한국 개신교 선교사로 임명된 헤론선교사나 1884년 9월 처음 입항한 개신교 선교사로 알렌 선교사를 비롯한 1884년에서 1885년 즈음 입국한 내한한 선교사들을 다루며 무엇인 최초인가를 고민하는 것은 사실 큰 의미는 없는 일이라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물포와 부산은 두 명의 선교사를 기억하고 기념하고 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두 선교사 가정이다. 이들 가정은 1884년 12월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1월에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한다. 그리고 1885년 3월 나가사키를 출발하여 한국으로 향한다. 그해 4월 2일 부산에 기착(奇着) 한다. 이것이 한국선교의 첫 발걸음은 부산이다. 라고 보는 이유이다. 잠깐이지만 선교사들이 부산에 머물렀다는 증거를 통해 현재 광복동(부산소재)에는 한국 기독교의 역사의 출발점을 알리는 표지석을 세워 기념하고있다. 부산과 제물포 그리고 까발라 공통점은 항구도시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관문을 바다의 길을 열어 인도하셨다.

까발라, 사도바울 도착 기념교회는 유럽의 기독교 역사의 첫 출발점을 기리는 교회 답지 않게 아담하고 작았다. 게다가 인적조차 드물다. 홀로 방문한 바울기념교회 예배당 의자에 앉았다. 주변을 보니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와서 조용히 침묵으로 기도하는 이들도 보였다. 낯선 이방인이 들어오니 경계하는 듯 노인이 나를 주시하며 쳐다보았다. 나는 그저 경계를 풀어주는 의미로 미소를 띄며 인사를 했다. 어색하게나마 답례를 해주었다.
다시 교회 밖으로 나가 순례팀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시원한 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 둘 버스로 이동하였다. 순례 여정 내내 함께 섬긴 목사님과 함께 남겨졌다. 낯선 이방 순례객들이 머물다 간 그곳에 자연스럽게 남아 서로 사진을 찍어주었다.
물론 사도바울은 이곳에 큰의미를 두지 않았을 것이다.
이곳에서 쉬지않고 지나가 바로 빌립보지역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성지순례란 돌 하나도 역사가 되고 의미가 된다. 파란 하늘도 구름이 잔뜩 낀 먹구름도 묵상의 좋은 소재가 된다. 묵상은 어떤 대상과의 만남을 통해 내 자신을 역추적 해가는 과정이요. 어떤 장소에 서 보는 것 을 통해 내 자신을 새롭게 되돌아보는 것이다. 성지순례 기간동안 우리는 바울을 만났다. 사도 바울을 만났다. 사도는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거룩한 사명이자 직분을 입은 자이며, 바울은 우리와 성정이 같은 인간이다. 그를 만나 거울로 비추듯 내 삶을 고스란히 비추어본다. 부끄러움과 탄식과 어두움이 그대로 눈에 들어오지만, 변화의 가능성과 희망의 나지막한 빛을 붙잡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거닐었던 발자취, 그가 서있던 장소에 서 보았다. 장소에 서 봄으로 내 자신을 새롭게 되돌아본다. 사도바울이 그 장소에서 느꼈을 회한과 두려움, 경솔함과 가벼움, 기쁨과 믿음을 경험한다. 때로는 낙심마저 느낀다. 어느덧 감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해도 그 그루터기가 남아있는 것같이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는 남아있는 이들을 통해서 이루어 가실 것이라는 희미하지만 분명한 하나님의 능력을 마주하게 된다. 다시 내 삶의 장소에 살아 볼 담대함을 얻는다. 하나님나라의 확장이라는 사명으로 우리를 이끄는 하나님의 시간을 마주한다.
우리는 이제 이스탄불로 향한다. 동쪽으로 약 139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알렉산더 비취 호텔(Alexander Beach Hotel)에서 하루를 머문다. 이 호텔은 알렉산더 해변이 근처에 있어서 생긴 이름이다.
에게해를 볼 기회가 이제 없겠다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음날 이른 아침 호텔 근처 에개해 해변가를 거닐 목적으로 밖을 나왔다.
해변가를 향하는 길에 목사님을 만났다. 이미 해변을 다녀오신 모양이다.
인사를 했다.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 한 장을 보여주셨다.
핸드폰에는 특별할게 없어보이는 섬 사진이 있었다.

"목사님 이 섬이 무슨 섬인지 아십니까?"
"아니요 뭔가 특별하게 보이는 섬은 아닌 것같 은데요?"
"저도 몰랐는데, 구글(google) 지도를 통해서 살펴보니 이섬이 바로 사모드라게(Samothraki) 더군요."
"아! 바울이 잠깐 머물렀던 그 섬이군요?"

이미 살펴보았자만, 사도행전 16장에보면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막으심을 경험한 바울과 전도팀은 곧바로 무시아로 간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비두니아로 가는 것을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는다. 결국 드로아로 내려가 그곳에서 밤에 환상을 본다. 마게도냐 사람이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라고 청하는 환상이다. 그래서 그는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사모드라게로 직행한다. 이튿날 네압볼리로 간다.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그곳이 마게도냐의 첫 성이다.
멀리 있는 사모드라게 섬을 보고 있으니, 감동이 밀려온다. 여기는 정말 살아있는 성서의 땅이구나. 평범하게 보이는 섬 도 사도바울의 복음의 열정이 그대로 살아있는 그리고 지금도 숨 쉬고 있는 곳이다. 이곳은 그야말로 복음을 향한 심장이 강하게 뛰고 있는 곳이다. 바울의 이 열정이 빌립보로 데살로니가로 고린도로 흘러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곳까지 온것이라 믿는다. 자 이제 마지막 여정이다. 오늘은 그리스와 터키 국경을 넘는다. 국경을 넘는 것은 설레는 일이면서도 불안함이 느껴지는 일이다.

청년시절 태국으로 몇 달간 여행을 다녀온 기억이 있다. 군 제대 후 쉼을 목적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그곳에 하나님의 역사를 눈으로 보고 태국이라는 땅에도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이 있음을 보고온 말 그대로 선교여행이었다. 태국에 도착할 무렵 내가 지내기로한 곳에서 2시간 정도 거리에 핫야이(Hot Yai) 라는 곳에서 과격한 무슬림들과 경찰들 간에 무력충돌이 있었다. 국경지대는 민감하고 예민한 곳이다. 서로간의 문화가 충돌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국경지대 안에서 수상한 움직임이라도 포착되면 형사 입건될 것이다. 낯선이들을 예의 주시하는 곳 거대한 정보망으로 감찰하는 곳이 국경지대이다.

성경에 보면 출애굽한 이스라엘백성들이 장막을 친곳 바다와 믹돌 사이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도 그런 곳이다. 출애굽기 14장 1절~2절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돌이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하라.“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 는 홍해 바다와 믹돌 사이라고 알려져 있다. 믹돌은 당시 애굽의 경고한 망대와 요새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국경수비대이다. 감시하고 통제한다. 불미스러운일들은 그대로 상부에 보고한다. 감시와 보고체계가 철저한 곳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들을 바다와 믹돌사이에 두셨다. 그리고 애굽군대는 이스라엘백성들이 꼼짝없이 잡혔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이들은 철병거를 위시하여 덤벼들었다.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이 그땅에서 멀리 떠나 광야에 갇힌바 되었다 하리라. (출 14:3)

이스라엘 백성들은 앞에 놓여진 홍해바다와 뒤쫓아오는 애굽의 철병거들을 보며, 하나님의 출애굽의 위대한 역사는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곳 바다와 믹돌 사이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장소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곳으로 이끄셨다. 우리가 두려워하지 말아야할 이유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하나님께서 인도하심에 맡기고 순종하는 삶말이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유일한 행동은 가만히 있어 주가 하나님됨을 아는 것이다.
우리는 말씀대로 살면 망할 것처럼 생각한다. 말씀대로 살면 포기하고 루저로 살아야 할것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말씀대로 사는 삶을 포기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보여줘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큰 유익이라는 것을 말이다. 말씀대로 사는 우리에게 마침내 살길을 여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홍해의 문을 여셨고 오히려 애굽의 군대들은 멸망을 당한다. 이일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셨다. 이 국경지대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전쟁터요 하나님께서 택하신 승리의 장소이다. 성경에 보면 국경지대와 같은 곳이 또 있다. 바로 갈보리이다. 죽음의 권세요 어둠의 권세가 사망의 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노려보고 있다. 이곳에 죄와 사망의 권세와 생명의 주관자 사이에 역사적 담판이 기다리고 있다. 죄와 사망의 권세는 마치 바다와 믹돌사이에 놓여진 예수 그리스도를 잡으려고 했다. 갈보리에 세워진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계획은 실패로 끝난 것 같았다. 그러나 그곳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전쟁터요 승리의 장소이다. 부활하신 예수를 통해 사망과 어둠의 권세는 힘을 잃었다. 십자가로 승리하셨다.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셨다. 골로새서 2:13~15절이다.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우리의 삶도 사실 아주 예민하고 민감한 국경지대에서 사는 것 같다. 보호와 감시의 세상속에 살고 있다. 바다가 가로막혀있어 절망과 낙심의 한숨만 가득하다. 세상의 권세자들과 죽음의 권세는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고 있다. 경제의 차가운 바람은 마치 칼 바람처럼 느껴져 우리의 몸을 잔뜩 움츠리게 만든다. 협력해서 살아가야 할 곳이 어느덧 살기위해 몸부림치는 치열한 생존의 장소가 되었다. 생사의 경계선, 두려움과 불안의 경계선, 좌우와 이념간의 경계선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를 바다와 믹돌이라하는 국경지대에 두신 것일까? 갈보리 십자가의 죽음과 삶의 경계선에 두신 것일까?
이곳은 하나님께서 승리를 위해 택하신 장소이다. 흔들리는 터전에서 견고함을 유지하며 믿음으로 풍랑속에서 주를 보는 소망속에서 우리는 깨닫는다. ‘이곳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전쟁터구나.’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큰 능력이라고 믿고 살아가야 한다. 그때 풍랑 한복판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 속에 살 길을 내시고, 구원의 문을 여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다.

약 40분여 시간이 걸려 국경지대에 들어갔다. 이미 도로에는 무역물품들을 가득 실은 거대한 트럭들이 줄을 길게 서고 있다. 관광객 출입국에 들어갔다. 버스에서 내려 여권을 들고 여권심사 부스에 줄을 섰다. 날카로운 눈으로 신원을 조회한다. 다시 버스에 올랐다. 군인들이 우리가 탄 버스에 실린 짐들을 꺼냈고 몇 개의 여행 가방을 꺼내 지퍼 문을 열고 안을 살핀다. 그것으로 부족했는지 군인 한명이 버스에 올랐다. 일일이 얼굴을 확인한다. 터키와 그리스가 이렇게 사이가 좋지 않았나 싶었다. 갑자기 장로님 한 분에게 이렇게 묻는다.

“Are you Jackie Chan(영화배우: 성룡)? “

처음엔 독특한 영어 발음으로 인해 못 알아 들었다. 장로님은 아니라고 말했지만, 계속 얼굴을 살피더니 왠지 ‘재키 찬(성룡)’인 것 같다는 확신을 가진 듯 미소를 건내며 버스를 내렸다. 터키에서 몇 달 지내 본 적있는 어떤 이가 말하길 터키인들이 제일 잘생겼다고 생각하는 아시아인이 ‘성룡’이라고 한다. 국경지대를 빠져나간 기쁨과 동시에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한 참을 웃고서 터키 지역으로 들어간다. 그리스에서는 여기저기 교회를 보다가 넓은 벌판에 모스크가 눈에 들어오니 두 나라간 분위기는 확실히 다르다 생각을 했다. 이제 이스탄불로 향한다. 곧 있으면 가족들의 품으로 가고 삶의 자리로 되돌아간다. 이스탄불에 있는 한 식당으로 갔다.
터키식 빵과 콩으로 만든 고소한 스프가 나오고 향식료가 들어간 구운 소고기완자가 나왔다. 역시나 다들 제대로 식사를 못하신다. 식사를 하고 있는데, 몇 명의 터키 남성들이 식당으로 물건을 가져와서 팔기 시작한다. 물론 그것을 사는 이들은 없었다. 이런 한국인들의 태도에 터키인들은 결국 할아버지가 6.25 참전 용사라는 것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말하자면 동정심을 유발케하여 물건을 팔고자 하는 마음인 것이다. 하여간 그들의 눈엔 악의는 없어보일지라도, 선조를 빌미로 물건을 팔아보려는 그들의 순수함은 알아줘야한다.

이제 이스탄불 국제공항으로 간다. 그동안 식당에서 차려주는 밥 먹고, 그간 행복했다. 물론 짐을 싸고, 풀고를 반복하는 생활, 매일 아침마다 안전에 대한 두려움이 드는 생활이 반복되었다. 나그네의 삶이 무엇인지 절실하게 느꼈다. 물론 다른점은 호텔이라하는 서비스 공간에서 받은 혜택, 말하자면 나름 고급스러운 삶이 나그네의 삶이라고 말하긴 다소 민망하다. 하지만 나름 나그네의 고충과 고민들이 무엇인지는 절실하게 깨달았다. 나그네의 삶은 오직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시는 은혜로 살아가는 삶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가라면가고 멈추라면 멈추는 게 우리에게 좋다. 안정과 두려움 그 경계에 놓여 있는 삶이라 그 분명한 기준과 목적만이 나그네의 삶의 질을 평가하는데 그 기준이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이제 집으로 돌아간다.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곧 나그네의 삶을 종식하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원래의 나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집으로 가는 길은 불안보다는 안정으로 향하는 길이다. 이런 것을 보면 우리의 영원한 본향으로 가는 길도 어쩌면 마찬가지다.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가는 길은 우리의 인생의 나그네 삶을 종결(終結)짓는 것이다. 말그대로 세상을 벗하며 살았다가 하나님께로 떠날 때인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로 떠나는 이 때를 두려워하며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때가 곧 임할 것처럼 사는 사람들이다. 아니 이미 임하였다고 믿고 사는 사람들이다. 아직 오지 않은 그때를 끝없는 긴장속에 사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마치 죽고 다시 사는 이들처럼 산다. 오늘이라는 하루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자비 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루를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며, 가장 가치있는 복음 증거적 삶에 투신한다. 이를 종말론적 삶 또는 종말론적 가치 라고 말하고 싶다. 마치 하루를 마지막인 것처럼 사는 삶을 아주 가치있는 것에 쓰는 것이다.
성지순례를 다녀오면서 느낀 것은 아주 무거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벼운 것도 아니다. 사도바울의 복음 전도적 삶이 무엇에 근거한 것이었으며 무엇을 보았으며 무엇을 전했는 가 이다.
사도바울은 그는 지금 당장이라도 하나님나라가 임할 것처럼 살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지 않고서는 견딜수 없는 부담감속에 살았다. 종말론적 삶을 살았다. 사도바울의 하나님나라의 선포는 지극히 종말론적이었다. 그리고 삶과 끊임없이 연결시켰다.
종말론적 삶은 곧 무엇을 하느냐보다 무엇을 보느냐가 우선되어야 하고 무엇을 보느냐 보다 어떤 존재가 되느냐가 우선되느냐 이다. 성지순례를 통해 무엇보다 바울은 무엇보다 먼저 예배자였고, 복음 전도자였다. 그는 하나님의 세계를 바라보았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았다. 결국에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리라는 그 능력의 확장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걸었고, 배에 오르고, 발을 내딛었다.
2주간 밟은 성지인 터키와 그리스가 그 증거가 되었다. 장소는 증거를 남긴다. 그리고 그 장소는 기억한다. 터키의 땅들 바다들, 그리스의 아테네, 코린토, 올림포스 산, 필리피 모든 산과 땅들이 사도바울의 복음의 발자취를 기억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인인 우리도 마찬가지다. 사실 바울과 우리가 다른 점은 다른게 아니다. 그는 정확히 복음앞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알았다. 그리고 그 복음을 그의 삶에서 누릴수 있었고, 삶으로 옮겼다.
우리는 복음앞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묻는 질문을 회피한다. 가볍게 여긴다. 그리고 복음을 누리지 못하고 갇혀있고 두려워하고 불안해 한다. 그러다보니 삶에서 복음이 아닌 다른것에 집착하며 살아간다. 사도바울과 내가 다른 것은 복음앞에서 삶을 충실히 살고 있는 가이다. 성지순례를 다녀오며 사도바울의 삶을 반추하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복음앞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가.. 그리고 얼마나 그 복음을 누리고 삶으로 살아내는 가. 어쩌면 평생에 묻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의 평생의 숙제이다. 종말론적인 삶, 이를 신학자들은 종말론적 윤리라고 이야기한다. 얼마나 복음앞에서 종말론적 가치를 가지고 삶으로 살아내는가.
아쉽지만 사도바울의 마지막 종착지였던 로마까지는 가보지 못했다.
사도바울의 유언적 메시지는 디모데후서에서 발견된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짧은 세 구절은 우리에게 충분히 전해준다. ”나는 이미 부어드리는 제물로 피를 흘릴 때가 되었고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마련되어 있으므로 의로운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이며 나에게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딤후 4:6~8 새번역)

이 짧은 세 구절의 말씀은 바울의 현재(6절) 그리고 과거(7절) 미래(8절)을 담고 있다. 그는 자신이 제물된 삶을 살았다. 제물된 삶 하나님께서 온전히 드려진 삶 다시 말해서 예배자의 삶을 살았다. 복음앞에서 그는 예배자였다. 대학시절 한 선교사님을 만났다. 오지의 땅에서 아무도 믿는 이들이 없는 낯선 이방땅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며 복음을 위해 사는 청년 선교사님이었다.

그분에게 물었다
‘선교사님 이렇게 척박한 곳에서 어떻게 선교를 하세요?’

그분이 대답한다.
‘선교는 곧 예배가 없는 곳에 예배가 있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이땅 구석구석 밟으며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가 없는 이곳에서 예배를 드리며 살아갑니다. 저는 그게 선교라고 생각해요”

잔잔하게 도전이 되고 감동이 되었다. 맞다! 선교는 다른게 아니다 예배가 없는 곳에 예배가 있게 하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제물 됨을 실천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산 제물이다.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실 거룩한 산 제물말이다. 우리는 예배가 없는 곳에 예배가 있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가 돌아가야할 직장과 가정 그리고 학교에서 예배자로 살아야한다. 하나님나라의 확장은 다른 것이 아니다. 예배가 없는 곳에 예배가 있게 하는 것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말씀에 복종하는 이들이 있는 곳에서 예배드리는 일들이 많아지는 것 이것이 하나님나라의 확장이다.

그리고 바울은 선한 싸움을 싸웠다.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 바울이 말한 선한 싸움은 무엇일까? 흥미롭게도 바울은 이 선한 싸움에 관하여, 달려갈 길 즉 경주에 대비(對比)하였다. 달리기를 하는 것처럼 선한 싸움을 하였다고 분석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어디를 봐도 사도바울이 이 선한싸움에 대한 결과를 말하지 않는다. 결과에 집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 선한 싸움에서 내가 우승하였다!‘ 라고 하거나 ’선한 싸움에 아깝게 패배하였다.‘ 라고 승패의 결과에 집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 이 부분에 관심이 많다. 그러나 사도바울의 집중은 오직 내가 이 선한 싸움을 싸웠다는 것에 있다. 이 싸움은 본질적으로 선하고 싸울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에 집중한다. 그리고 이 싸움을 마친 모든이들에게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음을 시사하여 선한 싸움을 치열하게 싸우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격려와 위로가 되었다. 주께서 다시 오시기를 사모하는 모든 이들에게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는 사실은 바울에게 뿐아니라 지금 여기, 예배드리는 삶을 사는 모든이들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된다.
성지순례를 마친 우리는 사도바울의 삶과 소망을 그대로 이어받아 우리의 삶의 처소로 되돌아가 그곳에서 철저히 예배드리는 삶을 붙들며 선한 싸움을 치열하게 싸울 것을 결단한다.
사도바울이 네압볼리에서 그 치열한 복음의 발걸음이 시작되었듯 나도 이곳 이스탄불 그리고 곧 밟게될 한국땅에서 복음의 발걸음이 다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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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함께 걸었네 - YES24

흥미로운 여행기를 토대로 성경의 배경과 교회사를 이해하고 인문 고전의 깊은 상상력까지 풍부하게 더할 수 있는 책이 나왔다. 역사신학을 전공한 함신주 목사가 코로나19로 세계 여행의 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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