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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성지순례 기행/튀르키예 그리스 바울의 발자취 기행

[그리스 여행 / 그리스 성지순례] 코린트 여행, 시지프스 산 방문, 코린트, 인간의 욕망 가운데서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19. 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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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터키를 떠나 그리스로 향한다. 이즈미르의 아드난 메 데레스 공항(Adnan Menderes Havalimani) 으로 이동한다. 수하물을 부치고 한 시간여 비행기를 타고 아테네 국제공항에 도착하는 일정이다. 아테네 국제공항은 생각보다 작았다. 에베소의 일정이 쉽지않았기에 눈꺼풀이 반쯤내려 앉았다. 입국 심사를 마치고 개인 수하물을 찾기 위해 짐찾는 곳으로 갔다. 짐이 반쯤 나오더니 한 참이나 나오지 않는다. 참을성 없기로 소문한 한국인들이기에 다들 무슨일인가 좌불안석들이었다. 기다린지 한 참만에 짐이 나왔다. 짐을 들고 버스로 향했다. 그리스와의 첫 만남은 생각보다 좋지는 않았다.
아테네에서 첫 날을 보냈다. 조식을 먹고 고린도로 향한다. 차창 밖으로 그리스 사람들이 다니는 것을 보았다. 거리는 온통 '그래비티'로 물들여져 있었다. 사회에 대한 불만을 낙서로 표현한 것일까?
그리스 사람들은 순하고 착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거리에 앉아서도 시장에서도 철학을 논할 정도록 지혜로운 사람들이라고 한다. 특별히 거리에서 차를 마시는 남성들을 많이 볼수가 있다. 한국남성들은 바쁘다. 한국에 카페문화가 활발하게 생기면서 어느덧 한국에서도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떠는 남성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적한 시간 카페를 점유하고 있는 것은 대부분이 여성들이다. 그리스는 거리에서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즐거운 수다를 즐기는 남성들이 여성들보다 많이 있었다.
이렇게 아테네의 도시들을 차창 밖으로 경험하면서 낯선곳으로 여행하는 기분을 만끽할 때 쯤 보기만해도 아찔한 고린도 운하에서 바람을 쏘인다.

시즈푸스산 아래에서 인간의 부조리를 깨닫다. 

다시 버스를 탄다. 고대 코린트(Ancient Corinth) 박물관으로 향한다. 코린트로 다 달았을 무렵 멀리보이는 산이 있었다, 시지푸스 산이다. 이곳에 고대 고린도 도시인 코린트 아크로폴리스(Acro Corinth)가 있다.   
시지푸스(Sisypos)는 아이올로스와 에나레테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코린트의 왕이된다. 시지푸스는 그리스 신화의 인물중에 가장 교활한 인물로 평가를 받는다. 그가 코린트의 왕으로 제위 시절, 어느날 제우스가 강(江)의 신 아소포스(Asopos)의 딸 아이기나(Aigina)를 유괴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시지푸스는 아소포스에게 코린트의 아크로폴리스에 샘물이 솟아나게 해주면 알려주겠다고 한다. 이에 아소포스가 페일레네 샘을 만들어주어 요구를 들어준다. 시시포스는 그에게 독수리 한 마리가 아이기나를 유괴하여 오이노네 섬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고 말해주었다.
화가 난 아소포스는 당장 오이노네섬으로 쳐들어갔지만, 제우스에게 벼락을 맞고 강의 물줄기가 된다. 그래서 아소포스강의 바닥에는 시커먼 석탄이 나오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한편 제우스는 시지푸스의 고자질에 분노한다. 죽음의 신 타나토스(Thanatos)를 보내 그를 저승으로 데려가도록 한다. 그런데 시지푸스는 타나토스를 속여 토굴에 감금해 버린다.
죽음의 신 타나토스가 감금되어 사라지자 갑자기 세상에 죽음이 사라진다. 죽음이 사라진다는 것은 세상에 좋은 일일까? 당황한 신들은 전쟁(戰爭)의 신 아레스(Ares) 를 보내 타나토스를 풀어주고 결국 시지푸스는 붙잡히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의 신중에 가장 교활하기로 유명한 시지푸스 였다. 그는 저승에서 하데스(Hades)를 만나 꾀를 내어 다시 지상으로 오게 된다.
이 일로 시지푸스는 무거운 돌을 굴려 올리는 일을 반복하는 형벌을 받게 된다. 무거운 바위를 힘껏 굴려올리면 바위는 다시 아래로 굴러내려간다. 다시 바위를 굴려 올린다. 바위는 또 아래로 굴려내려간다. 그는 영원히 똑같은 일을 반복해야했다. 가장 고된 노역을 받은 셈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차라리 죽는것이 낫겠다 싶은 형벌이다. 그런데 시지푸스의 노역과 형벌은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알베르 카뮈(Albert Camus,1913~1960) 에 의해 새롭게 해석 된다. 인간의 부조리에 맞서는 삶으로 말이다.
“시지프는 돌이 순식간에 저 아래 세계로 굴러떨어지는 것을 바라본다. 그 아래로부터 정상을 향해 이제 다시 돌을 밀어올려야 하는 것이다. 그는 또다시 들판으로 내려간다. 시지프가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바로 저 산꼭대기에서 되돌아 내려올 때, 그 잠시의 휴지의 순간이다. 그토록 돌덩이에 바싹 닿은 채로 고통스러워하는 얼굴은 이미 돌 그 자체다! 나는 이 사람이 무겁지만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아무리 해도 끝장을 볼 수 없을 고뇌를 향해 다시 걸어 내려오는 것을 본다. 마치 호흡과도 같은 이 시간, 또한 불행처럼 어김없이 되찾아 오는 이 시간은 바로 의식의 시간이다. 그가 산꼭대기를 떠나 제신의 소굴을 향해 조금씩 더 깊숙이 내려가는 그 순간순간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보다 우월하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 강하다.”
카뮈가 발견한 시지푸스의 삶은, 분명 끊임없이 돌아가는 인생의 굴레속에 사는 삶이다. 부조리다. 그러나 그는 인생의 부조리속에서 의미를 찾는다. 긍정적인 의미다. 끊임없이 굴러내리는 바위를 끌어올리며 실존적인 삶의 의미를 찾는다.
카뮈에 의하면 시지푸스는 행복한 사람이다. 굴러내리는 바위는 살아내어야 할 삶의 도전을 주고 삶의 의미를 주기 때문이다.
시지푸스 산을 바라본다. 신들이 시지푸스를 바라보듯이 말이다. 그러나 시지푸스는 돌을 다시 굴려 올리면서 신(神)들과 삶의 부조리를 향해 경멸과 비웃음으로 대답한다.
과연 인간은 삶의 의미를 저 산에서 찾을수 있을까? 시지푸스의 신화, 카뮈도 잘 해석했는지 모르겠다. 인간은 삶의 의미를 무거운 바위에서 뿐아니라 작은 돌맹이에게서도, 심지어 의미없다 여겨지는 종이조각 같은 것에서도 찾는다. 왜냐하면 죽음이라는 두려운 존재가 늘 우리의 주변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가장 큰 부조리는 죽음이다.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인간은 발버둥친다. 시지푸스는 돌이 굴러내려오는 것을 보면 다시 들어올려야했다. 이것이 그의 삶의 의미이다. 가장 큰 부조리인 죽음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미말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시지푸스 산을 보면서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보며 삶의 의미를 찾지 않는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시121:1~2)
 
우리의 삶의 모든 의미는 오직 여호와를 만날때 가능하다. 인간의 가장 큰 부조리는 죽음이다. 누군가는 이 죽음이라는 실존을 마땋드리고 긴장과 노오력을 통해서 극복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투쟁과 긴장이 필요하다 말한다. 그러나 죽음의 부조리는 그것으로 극복이 가능한 존재가 아니다. 죽음은 진정한 생명으로만 극북해야한다. 그 생명을 얻으려면 생명 그자체 혹은 생명을 주관하는 이에게 가야얻을수 있다. 그러니 시편의 저자는 산을 향하여 눈을 들며 자신의 부조리를 한탄해 낸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의 부조리를 산에서 찾지 않는다 아니 찾을수가 없었다.
그는 진정한 생명이신 하나님께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시지푸스의 바위가 삶의 의미를 주는게 아니라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다.
시지푸스 산 아래에서, 인간의 욕망을 깨닫다.

우리는 시지푸스 산을  오르지 못했다. 멀리서 바라볼 뿐이었다.

우리는 시지푸스 산을 오르지 못했다. 멀리서 바라볼 뿐이었다. 흐린 날씨의 산의 장관은 말할 것도 없이 멋졌다. 그곳에는 고대 아크로폴리스가 존재한다. 가보지 않았지만 환락과 퇴폐의 역사가 남겨진 곳이다.

아프로디테(Aphrodite)여신의 여사제들이 국가 공인 창부의 역할을 하였다. 아프로디테 여신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름다움과 사랑을 주관하는 신이다.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의 유명한 그림 비너스의 탄생에서 아프로디테라 불리우는 비너스는 바다에서 탄생한다.
호메로스(Homeros)일리아스(Ilias)에 따르면 아프로디테는 제우스와 디오네 사이에서 태어난다. 그러나 헤시오도스(Hesiodos)신들의 계보(Theogony)에 따르면 비너스의 탄생을 신화적으로 그려낸다. 크로노스가 아버지 우라오스의 악행에 대항한다. 결국 크로노스가 휘두르는 낫에 우라노스의 성기가 잘리고 바다에 떨어진다. 그때 그의 정액과 바닷물이 섞이며 거품이 생기는데 아프로디테는 그 거품에서 태어났다.
사랑과 아름다움을 관장하는 신으로 아프로디테는 미모가 뛰어났다. 제우스는 신들이 아프로디테를 놓고 생길 사랑 싸움을 방지하기 위해 그녀를 못생긴 절름발이 신 헤파이스토스에게 시집보낸다. 그러나 그녀는 사랑의 신답게 끊임없이 질투와 성적욕망으로 올림포스에 많은 스캔들을 남겼다. 온갖 불륜, 인간과 신을 가릴 것없이 구애(求愛) 하였다.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으로 질투의 화신이었다. 그러다보니 아프로디테 신전을 섬기는 여사제들은 향락과 음란의 상징이 되었다.
코린트의 항구에서 배가 입항하여 들어오면, 여사제들은 선원들을 맞이하여 데리고 산을 오른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동안 여사제들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전해듣는다. 그래서 고린도 여인들은 철학과 문학과 정치에 해박한 여인들이라는 별명이 있었다고 한다. 반면 코린트의 남자들은 게으르고 무능했다. 여인들에게 넋이 팔려 지내는 일들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곳에 천 여명이나 되는 여사제들이 있었고 고린토는 이 여사제들을 통해서 명성을 얻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곳은 향락의 도시였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코린트를 향해 엄중히 경고했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줄을 알지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수 없느니라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몸인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바마다 몸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줄을 알지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6:15~20)
바울은 퇴폐와 향락의 성 코린토에서 고전(苦戰)하고 있는 교회를 잘 알고 있었다. 안으로는 분열과 다툼이 존재하였고 밖으로는 세상적 문화가 틈을 노리고 있었다. 바울은 코린트교회를 향해 엄충한 경고와 더불어 눈물로 편지를 보내는 데 이것이 바로 "코린트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그는 하나하나 교회안에 드러난 문제들을 향해 다시 바로잡는다. 엄중하게 경고한다. 성적 욕망과 쾌락에 휩싸인 코린트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가르친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바울은 사랑을 전한다. 진짜 사랑말이다. 코린트에 저변에 깔린 욕망과 쾌락으로서 사랑은 진짜 사랑이 아니다.
쾌락은 더 큰 쾌락을 추구한다. 그것이 채워지지 않으면 인간들은 더 자극적인 것을 추구한다. 진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늘로부터 오는 사랑을 구한다. 그 사랑으로 충만하고 충분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다. 십자가에 나타난 예수그리스도의 사랑, 그 아들을 내주기까지 우리를들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 교회를 세우시며 서로 믿고, 인내하고 버티게 해주시는 성령 하나님의 사랑 이 세가지의 사랑이 우리안에 온전한 사랑으로 자리 잡는다. 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안에 역사할 때 능력이 된다. 세상을 이길 힘이 된다. 버티고 인내하게 된다. 우리안에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도록 하나님의 사랑으로 꽉 채워지기 때문이다.
너희 모든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전 16:14)
시지푸스 산을 보면서 많은 생각에 잠긴다. 인간의 부조리를 극복해보고자 허무한데 삶의 의미를 주는 것 그리고 채울수 없는 인간의 욕망을 채워보고자 바둥거리며 사는 삶이 어떠한 것인지를 깨닫는다. 사실 이런 것들은 결국 온전하고 진정한 것을 만나보지 못한 데에서 발생되는 것이다.
온전한 것이 올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대하여 볼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고전 13:10, 12~13)
어쩌면 한국교회가 이토록 세습과 성적인 욕망으로 얼룩진것은 온전한 사랑을 잊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아직 그 온전한 것을 만나지 못했거나. 그러니 돌맹이 같은 것에 삶의 의미를 두고 채울수 없는 성적인 욕망에 마음을 쏟는 것이다. 우리는 시지푸스의 산에 살고 있는 것같다. 그곳에서 시지푸스와 아프로디테를 본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안다. 그것은 모두 허무한데 복종하는 삶임을 말이다.
우리는 시지푸스 산에 사는 것 같을 지라도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삶의 의미를 그리고 온전한 사랑이신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드려야 한다. 그게 그리스도인들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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