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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성지순례 기행/튀르키예 그리스 바울의 발자취 기행

[그리스 여행 / 그리스 성지순례] 코린트 박물관, 코린트, 바울의 발자취를 거닐다.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19.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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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시지푸스 산을 바라봤다. 갑자기 날씨가 흐려지더니 이내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이제 자리를 옮겨 코린트 박물관을 둘러본다. 다행히 실내 박물관이다.
그곳은 많은 고대 유적들과 조각들이 잘 전시되어 있었다.

박물관은 고대 코린트의 일상과 삶이 어떠했는지를 메세지를 전해주고 있다.
고고학이라는 학문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은 타임머신 즉 과거로 여행을 떠나도록 하는데 있다.
박물관은 발굴된 유적들을 차곡차곡 주제와 연대기적 순서에 맞추어 진열해 놓은 장소이기도 하지만,
더 깊은 의미를 가진다. 과거를 살려내는 것이다.
살려낸 과거들은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메세지를 준다. 박물관에서 과거의 자취들을 거닐면서
그 보폭을 수정하기도하고, 방향을 다시 재조정하기도 한다.
과거는 후회와 반성을 권하기도하고, 미래의 삶을 내딛게 하기도 한다.

우리가 방문한 코린트 유적 박물관 역시 고대 코린트인들의 삶과 일상을 살려내고 있다.
그들이 사용했던 도기들, 질병으로부터 치유되고 건강을 염원하는 마음으로 제조한 부조물들
고대 코린트인들이 어떻게 살았을지 무엇을 고민하며 염두해 두며 살았는지를 고스란히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고 메세지를 전달해 주고있다.

박물관의 이곳저곳을 둘려보았다. 스핑크스로 보이는 데, 사람머리에 사자의 몸에 날개를 단 조각품도 있었다.
이는 사후세계의 동행자이거나 어려움을 당하지 않도록 돕는 보호자 일것이다.
박물관은 일상의 삶 뿐아니다. 죽음과 사후의 세계에 대한 메세지도 전해주고 있었다.
무덤의 발견은 당시 사후세계에 대한 이들의 생각이 어떠했는지를 알려준다.
죽음으로부터 위로와 안위를 얻으려는 인간들은 두려운 죽음의 세계로부터 안정과 평안을 가져다 줄
어떤 상징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한다.
마틴 하이데거의 말처럼 '인간은 이세상에 던져진 존재(In Die Welt Gewortfenes Wesen)'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는 또 다른 세상인 죽음으로 던져질수 있다. 죽음은 인간 자신의 의지에 의해 비롯된 것이 아니기에 수동적이다. 절대적으로 당한것이므로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운 것이다. 죽음앞에서 인간의 존재는 사실 허무 그자체이다. 그러므로 현대 철학에서 죽음은 부조리 그자체요 두려움 그자체이다. 극복과 투쟁의 대상이된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허무와 두려움만 양산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에 충실하도록 발걸음을 인도하기도 하며, 죽음 이후의 세계라는 믿음을 낳기도 한다. 죽음이 우리에게 존재하는 한 종교는 우리의 삶에서 절대 사라지지 않을 까닭이 이것이다. 인간은 저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서 죽음이라는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박물관에서 마주한 관구(柩), 사후세계의 어떤 존재들이 당시에나 지금이나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인간들의 노력이 어떠했는지를 직면하게 한다. 인간들은 두려움의 대상에 집착한다.
바울을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집착의 대상을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옮긴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앎이라.
(고린도 전서 15:56~58)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에 집중하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집착하지 않는다. 오히려 생명에 집착하고 삶에 집중한다.

어두운 공간을 지난다. 밝은 공간에 들어선다. 각종 용기들과 유리관에 전시된 도자기들이 보인다.
유리관에 전시된 작은 옹기들과 도자기들은 워낙 한국에서도 쉽게 볼 수있는 지라 그렇게까지 신기하거나 눈길이 가지는 않았다. 박물관에서 인상적으로 본것이 바로 로마의 유적들이다. 말하자면 이곳은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가 교차를 이루는 곳이다. 보기만해도 이목구비가 또렷한 잘생기고 건장한 남성들의 조각상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들은 모두 로마의 황제들이다. 네로황제의 얼굴을 보고 굉장히 당황했다. 조각품으로 만난 그의 얼굴은 굉장한 훈남이었다. 역시 사람은 외모로 평가해서는 안될일이다.

네로황제 두상

여기에 왜 황제들의 조각상이 있는 것일까? 코린트는 로마제국에 중요한 도시중 하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곳은 유명한 항구도시로서 무역의 중심이었으며, 동 서방의 교통로의 역할을 감당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역사가들에 따르면, 로마는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몇차례 전쟁을 하였는데, 로마의 장군 루키우스 문미우스(Lucius Mummius Achaicus)는 코린트를 함락시키는데 성공한다. 그는 B.C 146년경 로마의 집정관에 선출이 된다. 그리고 로마 군단을 이끌고 펠로폰네소스 반도 원정을 나선다. 이 전쟁에서 루키우스 문미우스는 아카이아 동맹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다. 그리고 코린트는 함락이 된다. 이 전쟁으로 함락된 코린트는 완전히 소멸이 된다. 성경에 등장하는 코린트는 BC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에 의해서 재건된 도시를 말하는 것이다. 로마 황제의 조각상들은 재건된 코린트의 재생과 회복의 역사가 어떠했는지를 말해주는 것같다.

로마 황제들의 조각상.

박물관을 나온다. 마침 부슬부슬 내리던 비도 멈추었다. 때마침 하나님께서 비를 피할곳을 주셨다.
야외박물관을 거닌다. 거대한 아폴론 신전이 보인다. BC560년경 전형적인 배흘림 기둥의 도리아양식으로 보이는 기둥 7개가 웅장한 면모를 드러내며 서있다. 배흘림 기둥은 아저씨 배처럼 볼룩하게 생겼다. 덕분에 안정감을 준다. 도리아 양식의 기둥은 아주깔끔하다. 군더더기 없고 화려함이나 정교함은 없지만, 세련미가 느껴진다. 아폴론신전은 음악과 예술 의술, 궁술 을 주관하는 신 아폴론의 모습을 대변하듯 깔끔하면서도 웅장하고 안정감을 전해준다.

아폴론 신전을 곁에 두고 길을 걷다보면 코린트의 아고라가 한눈에 보이는 곳이 등장한다.
이곳 어느 지점에 교회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누룩과같고 겨자씨 같이 존재한다.
그들이 곧 하나님나라이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고 죽은 것처럼 보이는 미물 같지만 그 생명력은 어느 무엇으로도 막을수 없다. 겨자씨는 새가 깃드는 나무가 되고 누룩은 부풀어 빵이된다.

신약학자 브루스 롱쥐네커 (Bruce Longenecker)는 코린트안에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정도 부와 지위를 누린 이들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고린도 전서 1:26절에 의하여 '권력있는 자'들이나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많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특별히 바울은 코린트의 온교회 교인들은 대접하고 섬긴 가이오와 스데바나 같은 이들은 넉넉한 부를 누렸을 것으로 추정하며 이들은 주의 백성들을 섬기는 일에 헌신했던 이들이었을 것이다.
많은 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코린트에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긴 어렵다. 대체로 이들은 가정에서 모여 예배를 드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지를 순례하면서 가장 궁금했던 것은 교회가 어떻게 존재했느냐는 것이다.
성지순례 기간동안 바울이 세운 교회라든지 사도들이 세운 교회를 단지 건물형태로 남아있는 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 사도바울과 사도들이 교회를 세운다는 것을 단지 건축을 하는 것으로 의미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바울과 사도들이 교회를 세운다는 것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을 세우는 것을 의미했다. 복음에 헌신된 일꾼을 세운다는 것, 그것이 바로 교회를 세우는 것이었으며, 사도들은 이것을 면류관이요 자랑이라고 여겼다. 사도바울은 하나님나라의 확장이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세우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로 하나님나라다. 건물이 아니다.

문득 한 지점에 멈추었다. 'BEMA' 라고 적혀있는 문구 앞이었다. 코린트 아고라를 둘러보며 목욕탕, 신화속에 등장하는 샘물들을 보면서 걷다가 벽돌 건물의 한 광장 이었다. 비마 (BEMA) 가 무엇일까? 비마란, 아고라 한복판에 연설이나 재판할 때 청중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돌로 만든 단을 말한다. 이 비마터가 왜 중요할까?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할때에 종종 회당을 이용하였다. 여의치않을때에는 아고라와 같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 복음을 전하였는데, 이 때 비마터에서 복음을 전하도록 기회를 주었다.
사도행전 18장은 바울이 코린트에서 복음을 전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바울이 아테네에서 복음을 전한다. 그리고 코린트로 향한다. 그곳에 이르러 브리스 길라와 아굴라를 만난다.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하나님나라와 복음을 강론한다. 그런데 이 곳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절한다. 대적하여 비방한다. 바울은 옷을 털며 이렇게 말한다.

'너희 피가 너희머리로 들어갈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행 18:6)'
바울은 자리를 옮겨 회당옆 디도 유스도의 집으로 간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불리우는 좋은 사람이었다. 또 그곳에 복음의 진보가 있었는데,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집안과 더불어 복음을 믿게 된다.
뜻하지 않는 곳에서 복음의 진보를 경험한 사도바울은 어땠을까? 두려웠을까? 유대인들이 대적하고 비방한 사건에 대한 위안으로 찾아왔을까? 밤에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찾아오신다.

'밤에 주께서 환상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자가 없을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행 18:9~10)

하나님께서 두려워하지말라고 하신다.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하신다.
우리가 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나는 이 역사적인 장소를 다녀왔다. 예수께서 두려워하고 비방과 대적하는 소리에 조금이라도 위축될까봐 찾아오셔서 위로해주시는 그 곳말이다.

바울의 코린트 기념교회이다. 이곳에 세워진 교회가 디도 유스도의 집터 인지 확인할수는 없었다. 다만 교회옆에 커다란 모자이크가 있었는데, 그것을 보는 중에 감동이 되었다.
모자이크의 맨 왼쪽은 바울이 코린트의 유대인들에게 대적과 비방을 받는 그림이다. 그리고 가운데 그림은 꿈속에 환상중에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담대하게 전하라고 명하시는 장면이다. 오른쪽 그림은 거침없이 복음을 전하는 장면이다. 바울이 밟고 있는 저 강단이 바로 비마(BEMA)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단한가지이다. 예수께서 우리의 모든 수고를 알아주시기 때문이다. 두려워하지말고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고 하시는 위로 때문이다. 사도바울은 위축된 마음 두려운 심령을 위로해 주시며 다독여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때 사명자로 다시 회복되었다.

저 그림속의 비마터(BEMA)로 가보자.

사도바울이 비마터에 섰다.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이 되었을 때, 유대인들이 또다시 바울을 대적한다. 이곳 비마터에 바울을 세운다. 사람들은 사도바울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고 몰아세우기 시작한다. 긴급한 상황이다. 그러나 바울은 담대하다. 바울이 입을 열어 말을 하고자 했으나 총독 갈리오가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문제에 대해서 관여하지 않기를 원한다고 문제를 회피하려 한다. 그리고 폭도들과 바울을 법정에서 쫓아낸다. 그런데 성경은 모든이들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앞에서 때렸다고 증언한다. 회당장 소스데네는 바울의 복음을 듣고 회심한 회당장 그리스보의 후임자일 것이다.
어쨰든 사람들은 바울이 아닌 왜 회당장 소스데네를 때렸을까? 아마도 바울에게 강론의 기회를 준 그 회당장에게 화가 나서 그런 것일 것이라 추측해본다. 괜히 억울하게 당한 소스데네,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라면 평생 그리스인들을 저주하고 원망하며 살았을 텐데.... 놀랍게도 그의 기록은 고린도 전서 1장에 등장한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전 1:1~3)."
회당장 소스데네는 결국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인이 된다.
그리고 그 비마터위에 교회가 세워진다.

코린트 아고라광장 비마터 위에 자리잡은 곳은 다름아닌 교회였다. 강대상쪽으로 보이는 지점에 고린도후서 4:17의 말씀이 새겨진 비석이 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고후 4:17)

이 말씀을 제대로 묵상한 적이 없었다. 가만히 노트에 적어보고 코린트의 유적들을 돌아보며 묵상을 시도해본다. 신기하게도 이 짧은 하나님의 말씀은 묘한 의미를 던저준다. 환난의 경한 것과 영광의 중한 것이 대비를 이루고 있다.
환난은 잠시 받는 것이다. 말하자면 가벼운 것이며 끝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은 영원하다. 순교의 신앙은 이 사실을 깊이 이해하는데서 비롯된다. 우리의 삶에 허락된 환난은 영원한 영광에 비해 가벼운 것이며
그것은 잠시 받는 것이라는 것이다. 기꺼이 우리가 순교의 신앙을 따라 살수 있는 것은 영원한 것을 바라볼때 가능하다.

또한 본문은 더 깊은 차원으로 우리를 끌고 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이라는 경한 것이 결국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에 가져오게 한다는 것을 말한다. 환난이 영원한 영광을 가져다 준다. 복음을 전할때 받는 환난이 영광의 중한 것 즉 구원을 이루어내고 하나님나라를 이루어낸다. 그리스도인 들은 그러므로 환난을 즐거워한다. 때때로 그것이 우리의 인생의 항해 길에 순풍이 되어 우리가 바라는 영원한 항구인 하나님나라로 가게하기 때문이다.

코린트의 그리스도인들은 그 사실을 알았다. 코린트 교회는 분명 외부에는 박해와 환난 그리고 세상적 가치관들이 엄습하고 침투해왔을 것이다. 내부로는 분열, 불순한 것들이 혼재해 있었다. 사도바울은 코린트에 보내는 편지를 몇 차례를 거쳐 보낼정도로 사랑했다. 심지어 눈물의 편지도 보내고 강한 어조의 권면의 편지도 보냈다.
코린트교회를 향한 바울의 권면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모아진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사랑이야말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 아무것도 전하지 않기로 작정한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외에는 아무것도 알지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중략)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하려 함이라. (고전 2:2~5)

십자가... 그것은 무엇일까? 환난의 경한 것이다. 그런데 그 십자가는 영광이다. 왜냐하면 구원을 이루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환난의 경한것이 지극히 큰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는 것이 십자가이다. 그리스도인들을 기꺼이 십자가 지는 삶을 선택하였다. 코린트 비마터위에 세워진 교회에 세워진 비석 그리고 그 새겨진 말씀은 우리의 나른하고 게으른 신앙에 자극을 준다. 인스턴트 음식에 넣은 조미료가 주는 자극이 아니라 우리의 깊은 양심을 자극하는 말씀이다.

고난 받기 싫어하고 어려운 일이라하면 피하고 싶고 편히 신앙 생활하고 싶어하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지금 너는 무엇을 위해 살고있는가 묻는 것같다. 왜 우리가 하나님나라의 영광을 맛보지 못하고 있는가?
잠시 받는 환난을 멀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으로 인해 받는 고난을 피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가 왜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지 못하는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것을 아주 무겁게 여길뿐아니라 그 환난을 받지도 않고 영광을 취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명 가짜 영광일 것이다.


비마터를 내려온다. 아주 무겁게 내려온다. 하늘마저 구름으로 가득하다. 옛 코린트의 아고라터를 다시 걸어간다. 멀리 바울의 비마터를 바라본다. 우리가 지금 무엇을 잊고 살았는지 무엇을 되찾아야 하는지 해답을 얻었지만, 하늘이 무서워 아래를 보고 걷는 편을 선택한다. 바울의 발자취를 따라 가겠다 하여 이길로 들어왔다. 그런데 바울은 환난의 지극히 경한 것을 기꺼이 감내해 내어 영원한 영광을 맛보았다. 우리에게 이 길로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것같다. 영광을 다른데서 찾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시지푸스 산과 같은 세상, 아폴론 신전과 코린트의 아고라 광장과 같은 세상속에 교회는 존재한다. 그리스도인은 그 곳에 존재한다. 이런 세상속에 들어가는 것 피할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돌파해야한다. 교회는 비마터 위에 서야한다. 잠깐 받은 환난 복음으로 인한 고난 받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그게 그리스도인이다. 우리를 부르신 이유이다. 두려워하지말라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다독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이 바울처럼, 사도들처럼,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처럼 영원한 영광을 맛보며 살도록 하실 것이다.

고대 코린트 박물관을 나와 버스를 타러 주차장으로 가다가 기념품 상점에 들려보았다. 기념품 상점안에는 성화로 가득했다. 성화나 이콘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너무 인위적으로 보이기 때문이기도하고 뭔가 신비스롭게 만들어진 그림들이 눈을 자극 시키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의 형상이 그려진 성화를 하나 집었다. 생각보다 값이 쌌다. 곁에 함께 계신 목사님께서 사주시겠단다. 감사했다. 미안하기도했다. 미안한 마음에 상점 주인과 가격 흥정을 하여 아주 저렴하게 구입했다.
귀한 성화를 이런 방식으로 싸게 사도되나 싶었다.
성화에 그려진 예수님의 모습은 눈은 하나로 모여있다. 무언가를 강하게 주시하는 것같다. 입과 귀는 작게 그려져있다. 수도생활에 있어서 말은 작게 듣기도 작게 하라는 뜻인것같다. 순교자적인 삶은 다른게 아니다. 절제다. 나를 죽이는 삶. 나를 죽임으로 내안에 예수로 채우고 예수님만 살게하는 삶 이것이 진짜 순교의 의미일것이다. 기꺼이 순교의 삶을 살아갈수 있는 것은 영원한 영광에 이르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 삶을 향해 나아가자.

코린트를 떠나 이제 다시 아테네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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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함께 걸었네 - YES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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