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초대교회 성지순례 기행/튀르키예 그리스 바울의 발자취 기행

[그리스 여행 / 그리스 성지순례] 영화 300 배경 -테르모필레, 무명용사 기념비 앞에서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19. 11. 22.
728x90
반응형

http://m.yes24.com/Goods/Detail/93720745

 

바울과 함께 걸었네 - YES24

흥미로운 여행기를 토대로 성경의 배경과 교회사를 이해하고 인문 고전의 깊은 상상력까지 풍부하게 더할 수 있는 책이 나왔다. 역사신학을 전공한 함신주 목사가 코로나19로 세계 여행의 문이

m.yes24.com


사실 테르모필레의 300용사 기념비는 페르시아와의 승전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다.
패전을 기념하는 비이다. 스파르타의 용사들이 패전할 것을 알면서도, 대규모의 군대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테르모필레의 지형들을 역이용하여 훌륭하게 싸워낸 전투를 기념하는 것이다.
이로써 살라미스 해전을 승리로 이끌고 아테네로 향하는 페르시아의 발을 묶어놓아 시간을 벌여준
목숨을 건 혈전(血戰)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이 영웅들에게 찬사를 아끼지 않는 것이다.
역사가 헤로도토스도 그들의 이름들을 일일이 기억하며 기록해 놓았다.

"헬라스인들의 창은 이제 대부분 부러졌다. 그래서 그들은 칼로 페르시아인들을 도륙했다. 레오니다스는 이 혼전중에 용전분투하다가 전사했고 그와 함께 내가 이름을 알고있는 다른 저명한 스파르테인들도 기억에 길이 남을 인물들로 전사했다. 사실 나는 300명 전원의 이름을 알고있다."(역사 7권 224장)

근대시대 이전 역사는 대부분 영웅에게 집중했다.
그러나 근대로 넘어가면서 역사는 한 시대의 역사를 이끌어갔던 특정한 유명 인물이나 그 상황에 국한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역사에 집착했던 랑케(Leopold von Ranke)는 과거의 사실에 따른 문헌 사료 비평연구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이는 실증주의 역사관을 든든하게 지탱해주는 도구가 되었다.
그러나 문헌 사료비평연구는 19세기의 독일중심주의라든지 유럽과 서양중심의 역사관을 형성하게 된다. 그러나 E. H. 카(Edward H. Carr)를 중심으로 역사학은 발전을 이룬다. 그에게 역사는 '역사가와 사실의 지속적인 상호과정이다.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그 대화라는 상호과정을 통해서 역사는 얼마든지 재해석이 된다.
역사가는 해석이라고 하는 도구를 사용하여 과거의 이야기들을 현재로 가져오기도하며 적용하기도한다.
현대시대를 이해하기도 한다. 이로써 역사는 발전 곧 진보를 이룬다.

점차 역사연구는 그 시대의 이야기, 삶의 자리가 중요해진다.
기억으로 사용되는 소재는 곧 역사 연구의 도구가 된다.
구술사라든지 환경사, 여성사, 인권, 사회사등등 역사를 서술과 이야기 그리고 기억의 힘에 의존한다. 즉, 역사는 이제 기존의 영웅이나 황제, 남성들이 이야기뿐아니라 여성, 노예, 무명용사들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역사의 한 복판에서 무명용사들의 이야기는 영웅들의 이야기와는 또 다른 이야기와 감동을 준다.
과연 이것이 사회 과학적이며, 사실과 실증에 집착해야하는 역사 연구에 얼마나 동의가 될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시대를 풍미했던 한 영웅의 이야기로만 해석되고 도배되는 것은 옳지 않다.
공동체의 이야기, 일상의 이야기들로 채워져야 한다. 테르모필레에서 300용사 기념비에 몰입하고 있는 내게 아내가 어깨를 두드렸다.
이제 가야할때가 되었나보다 하고 마음을 추스리고 있는데, 이곳에서 멀찍히 무명(無名)용사의 기념비가 있다는 말을 해주었다. 무명용사들의 기념비, 궁금했다.
레오니다스의 역동적인 동상을 지나 변두리 쪽으로 가니 정말 무명용사의 기념비가 보였다.
역사는 늘 천하를 호령했던 시대의 인물들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한편, 이들의 기념비가 300용사의 것보다 초라해 보이기도 했다.

무명용사 기념비


이 기념비가 세워진 이유와 기원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다.
비석에 새겨진 그리스어는 흐릿하고 해석하기 어려웠으나 하단에 년도가 기입된 것으로 보았을때,
최근에 세워진것이 분명하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따르면, 레오니다스가 일부 동맹군들을 떠나보내기 전에 전사한 이들이 있었다.
이들을 위해서 기념비를 세웠는데 다음과 같은 명문이 새겨있다고 전해주고 있다.

"이곳에서 전에 펠로폰네소스에서 온 4,000명이 3백만의 적군과 맞섰노라." (역사 7권 228장)

내앞에 현존하는 기념비가 헤로도토스가 소개하는 그 명문이 새겨진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가슴이 뭉클했다. 이들도 3백만의 페르시아 적군을 맞이하여 치열하게 싸운 이들이기 때문이다.
승리의 가능성이 없는 이 전쟁에 뛰어든 이 무모한 용사들은 분명 누군가의 아들들이었고, 누군가의 아버지요 남편이었을 것이다. 나라를 지켜내어야 한다는 일념 아래 가족들과 생이별을 해야했다.

이들은 카리모도로스 산 에서 부는 차가운 바람과 페르시아의 상상도 할수없는 난폭함이 두려움으로 하나가 되어
불안함과 굶주림 가운데 있었을 것이다.
이것저것 생각하니 무명용사 기념비에 고개가 저절로 숙여진다.
하마터면 레오니다스의 300용사의 기념비만 보고 갈뻔했다.
무명용사라는 말이 느껴지듯이 역사는 이들의 이야기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게다가 이들의 기념비는 300용사의 기념비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곳에 위치해 있다.
무명용사의 기념비 이름과 같이 말이다.
무명의 삶에는 설움이 있다. 어느 누구도 무명의 시절을 흠모하지도 않는다.

이들의 기념비는 300용사의 기념비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곳에 위치해 있다.  


성경에 보면 곳곳에 무명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다윗과 무명용사들의 이야기도 있다. 다윗에겐 분명 용사들이 많았다.
그러나 성경에 일일이 이름을 기록한 용사들과 그렇지 않은 무명의 용사들도 있었다.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예수님과 70인의 제자들도 어찌보면 무명의 제자들이다.

사실 오늘날 무명이라는 말은 열등감의 상징이다. 오늘날 인싸와 아싸라는 신조어가 유행이다.
인싸는 인사이더(Insider) 의 줄인 말이다. 친화력이 있는 사람들 말하자면 그룹내에 인지도가 있는 사람을 말한다.
반면에 아싸는 아웃사이더(outsider)의 줄인 말로서 그룹내에 들어오지 못하고 말하자면 무명이고 영향력이 없는 사람을 말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인싸가 되기를 원한다. 인싸가 되기위해 구비해야할 아이템을 인싸템이라고 한다.
인싸가 되려면 인싸템을 득템해야 한다. 그래서 최근 마켓팅 전략으로 사용되고 있다.
아싸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을 없을 것이다. 무명은 속된말로 아싸인것이다.
무명이라는 말, 아싸라는 단어에는 굉장한 사회적 열등감이 포함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름을 남기고 싶고 영향력을 끼치고 싶어하는 인간들의 심적욕망 때문이다. 어쩌면 인간의 존재방식 그 자체이다. 그래서 중요하게 여긴다. 물론 인간의 존재방식이라는 것이 어떤 이들에겐 명예를 얻고 인정을 받는 데서 증명되기도하고, 어떤이들에겐 후손을 낳고 기름으로서 얻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이 모든 것을 깊게 들여다보면 이름을 남기고 싶어하는 인간적 본능이요. 영향을 끼치고 싶은 인간의 존재방식인것이다. 그런데 무명의 삶은 그것에 반(反)하는 것이다.
무명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존재의 근원을 흔드는 것이다. 아무도 그렇게 살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일상(日常)을 살아간다는 것, 일상속에서 하나님나라를 굳건하게 세우는 일은 사실 유명과는 크게 관련이 없다. 일상이라는 것 자체가 주는 의미 때문일것이다. 일상은 반복적인 삶을 말한다. 지루한 삶이다. 평범한 하루이다.
그럼 일상의 반대가 무엇일까? 축제((祝祭)다.
축제는 특별한 날이다. 기념일 같은 것이다. 유명으로 나아가는 시간이요 인싸의 순간이다.
그러나 일상을 사랑하고 일상에서 맛보는 하나님나라를 위해 고군분투의 삶을 살아가기로 다짐하는 것은 철저히 아웃사이더의 삶을 자처하는 것이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해야하는 것이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요. 평범하고 미천해보이는 일들을 해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매일의 삶속에 하나님나라를 꿈꾸며 살아가고, 반복되는 시간들 속에 주와 동행하는 것, 인싸보다는 아싸가 어울리는 삶이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해야할 것은, 일상을 그렇게 살다보면, 결국 일상이 하나님의 임재로 특별해 지는 데 그것을 우리는 축제라고 한다. 우리의 일상을 쪼개어 예배를 드리고 그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 임하시면 그 시간은 하나님나라의 축제가 된다. 무명한자 같으나 유명한 자인 삶을 사는 것이다.

분명 하나님의 나라는 아싸같은 이들이 모여있다. 그러나 그곳은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기 때문에 인싸가 된다.
무명의 용사들의 삶을 묵상해 보면 늘 은혜가 된다. 내가 그런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부르심 같기 때문이다. 하나님나라의 역사는 인간들의 역사와는 다르다. 그 나라와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자들이 역사의 주인공이다. 사도바울의 고백이다.

"우리는 무슨 일에서나 하나님의 일꾼답게 처신합니다. 우리는 많이 참으면서, 환난과 궁핍과 곤경과 매 맞음과 옥에 갇힘과 난동과 수고와 잠을 자지 못함과 굶주림을 겪습니다. 또 우리는 순결과 지식과 인내와 친절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일을 합니다.
우리는 오른손과 왼손에 의의 무기를 들고, 영광을 받거나, 수치를 당하거나, 비난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그렇게 합니다. 우리는 속이는 사람 같으나 진실하고, 이름 없는 사람 같으나 유명하고, 죽는 사람 같으나, 보십시오, 살아 있습니다. 징벌을 받는 사람 같으나 죽임을 당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고, 근심하는 사람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고후6:4~10)

다음여정이 있지만, 무명용사의 기념장소에서 잠시 머물렀다.
"우리는 이름없는 사람같으나 유명합니다." (고후6:9)
뜬금없는 생각이 올라왔다. 혹시 사도바울이 이 곳을 지나갔을까?
사도행전 18장24절부터 21장26절까지는 3차전도여행이 기록되어있다.
특별히 3차 전도여행은 2차 전도여행 시기에 세워진 교회들을 되돌아보는 여정으로 계획 되었다.
그 여정중에 사도행전 20장 1절~5절은 아주 짧게 기록되어있지만 시간으로 따지면 굉장히 긴 여정이다.
마게도냐지방에서 헬라(그리스)로 내려가 세 달 동안 제자들을 격려한뒤 배를 타고 수리아(시리아)로 돌아가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자신을 해치려고 공모한다는 소식을 접한 바울과 전도팀은 마게도냐를 거쳐서 돌아가기로 작정하였고 그때 그와 동행했던 사람들의 명단이 기록되어있다.

"소동이 그친 뒤에,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오게 해서, 그들을 격려한 뒤에, 작별 인사를 하고, 마케도니아로 떠나갔다.
바울은 그 곳의 여러 지방을 거쳐가면서, 여러 가지 말로 제자들을 격려하고, 그리스에 이르렀다.
거기서 그는 석 달을 지냈다. 바울은 배로 시리아로 가려고 하는데, 유대 사람들이 그를 해치려는 음모를 꾸몄으므로, 그는 마케도니아를 거쳐서 돌아가기로 작정하였다.
그 때에 그와 동행한 사람은 부로의 아들로서, 베뢰아 사람 소바더데살로니가 사람 가운데서 아리스다고세군도더베 사람 가이오디모데, 그리고 아시아 사람 두기고드로비모였다.
이들이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행20:1~5,새번역)
믿음의 형제들과 바울은 마게도니아로 올라가는 여정을 함께 한다.
해안가의 도로를 통해 베뢰아로 향하는 여정속에서 테르모필레를 지나갔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그는 신앙의 동지들과 함께 그 길을 걸었다. 험한 산을 넘어야 하는 긴 외로움과 고통의 나날들,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올라오고, 무명의 삶에 대한 설움과 두려움이 몸서리 칠때, 이 복음의 용사들은 테르모필레에 세워진 기념비(헤로도토스가 언급한 그 비석)를 보았을 것이다. 감히 상상해보건데 그는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하나님나라의 여정과 발걸음에 자극을 주었을까? 분명한것은 그가 걸었던 하나님나라를 위한 걸음,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니 무명한자 같을지라도 유명한자라는 확신으로 기쁨이 충만했을 것이다.

"우리는 이름없는 사람같으나 유명합니다.(고후6:9)" 나도 그 마음으로 걸음을 뗀다.
하나님나라는 일상을 성실하게 살아가는 자들의 것이다. 성실은 심령의 가난함을 가지고 외롭더라도 고되더라도 우리의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한 방향으로 끝까지 걸어가는 신앙태도이다.
그러니 하나님나라는 그들의 것이다. 하나님나라는 그들을 결코 이름없는 자 라고 말하지 않는다. 유명한 자다.

다시 버스를 탄다. 두 시간여 이동을 한다. 가는 동안 걱정했던 비는 짧았다.
구름낀 날씨는 점차 물러가고 파란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전 내내 걱정했던 날씨는 가을 하늘 처럼 청명했다.
메테호라의 초입에 도착했다. 우리를 반겨주는 것은 묵직하게 서있는 바위들이었다.
파란색의 하늘이 높이 서 있는 바위들과 더불어 땅에 있는 인간들을 압도하려는 듯이 거대하게 느껴졌다.

일단 메테호라의 수도원에 오르기에 앞서 식당으로 들어갔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속담은 현실적이다.
일단 먹어야 여행도 즐겁다. 일단 배가 불러야 묵상도 깊어진다.

순례팀들에게 그리스 음식은 대체로 만족이었다. 터키의 음식은 향식료냄새로 곤욕을 치룬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리스의 음식은 한국인들의 입맛에 상당히 잘 맞는 듯하다.
우리가 찾은 식당의 이름은 바코스(Vakhos)였다. 그리스어로 처음에 읽기를 바카스로 읽었다.
순간 우리나라의 피로회복 자양강장제가 생각이 났다. 거기서 유래된 것이구나 생각을 했다.
심지어 음식은 역시 지친 영혼에 활력을 준다는 의미로 해석까지 했다.
그런데 가만보니 박코스(Bacchus)라는 신의 이름을 딴 식당이었다. 박코스 그는 디오니소스와 마찬가지로 포도주의 신이요 농사의 신으로 알려져있다. 어떤 자료는 박코스는 디오니소스의 로마식 표현이라고 해석하는 자료도 있다.
여튼 먹는 것앞에서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곳은 주로 양고기를 잘하는 집으로 유명하다.
순례팀들은 대부분 터키에서의 경험때문인지 양고기보다는 닭고기를 선택했다.
그런데 양고기 몇조각을 맛본 몇몇 분들은 아예 자신의 닭고기 접시와 양고기를 시킨 이의 접시를 맞바꾸는 일까지 일어났다. 그만큼 양고기 요리가 맛있었다.

풍성하게 점심을 배불리 먹고 일찍 밖으로 나왔다. 역시 개들이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있었다. 날씨는 우려했던 것과 달리 화창했다. 날씨가 화창하니 멀리있는 바위들의 색감이 또렷하여 웅장한 맛을 더해주었다. 마치 한장의 멋진 사진 같았다. 카메라를 들어 한 컷 찍어본다. 늘 그렇듯 사진으로 찍어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기란 쉽지 않다.

박코스 식당에서 바라본 하늘과 메테호라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