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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성지순례 기행/튀르키예 그리스 바울의 발자취 기행

[그리스 여행 / 그리스 성지순례] 성스테판 수도원 방문 -메테오라, 하나님을 만나는 곳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19.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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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테오라는 높은 절벽위에 세워진 수도원이다.
높은 절벽위에 세워져 있어서 철절히 외부로 차단이 되었고
수도사들은 세상과 차단된 공간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고독으로 나아갔다.

버스에 올라탔다. 차창문의 커튼을 걷었다.
창안으로 들어오는 기이한 암석들과 절벽들의 모습이 탄성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꼴불꼬불한 길을 올라갔다. 얼마나 올라갔을까 중반부 쯤 버스에서 내렸다.
거대한 암석들에 둘러싸여 그 무게가 느껴질 정도로 압도되는 느낌이었다.
높이 솟은 암석 산 그리고 그 꼭대기에는 수도원이 세워있었다.
아니 말그대로 수도원은 공중에 매달려있는 것같았다. 모두가 그 수도원을 보면서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어떻게 저곳에 수도원을 세웠을까? 건축자제며 설계며 어떻게 했을까?

수도원은 사실 우리에겐 낯설다. 수도원은 사제들과 수녀들 그리고 수도사들이 외부와 차단하고 하나님을 만나기위한 장소이다. 이곳에서 공동체를 이루며 산다. 그래서 수도원은 규칙을 만든다. 그 규칙에 따라 일정시간엔 반드시 모여 기도하며 예배한다. 같이 살기위한 노동과 숙식들이 이루어진다. 수도원은 공간이 중요하다. 함께 모여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영적인 공간과 수도사들의 개인적인 삶을 위한 생활 공간 그리고 함께 모여 기도하고 식사하며 노동하는 공동생활 공간으로 이루어져있다.
철저한 금욕과 은둔의 삶, 규칙으로 이루어진 규정화된 삶이 수도의 삶일 것이다. 금욕과 은둔는 오로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도구이다. 금욕은 그리스어로 아나호레인(αναχωρειν)이다. 이는 가족관계나 인간관계 또는 인간적 욕구를 끊는 것을 말한다. 또 다른 하나는 은둔이라고 번역되는 그리스어 에레미아(ερημια)이다. 문명화된 삶의 방식을 벗어나서 홀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 <최형걸,수도원의 역사,23-24쪽.>

이렇게 금욕과 은둔의 삶을 강조하던 중세의 수도원은 일상생활로 내려온다. 도시 한복판에 수도원을 짓고 그곳에서 수도규칙들을 지키며 생활한다. 세속화된 것이다. 중세의 수도원은 훗날 대학이되고 교회가 된다. 세상의 권력자들은 이들 종교권력과 축적된 재산을 탐식하기 위해서 수도원을 노략했다. 때때로 세상과 결탁한 수도사들은 성직을 매매하며 이른마 종교의 암흑기를 형성하기도한다. 모든 역사들이 그렇듯 교회의 역사도 형성과 타락 그리고 개혁의 역사 이다.
금욕과 은둔의 장으로서 수도원의 형성과 축적된 재산과 친 권력적 성향은 타락으로 이어지고 끊임없는 자정과 개혁의 소리로 이어졌다. 이는 결국 종교개혁으로 이어지고 종교개혁은 경건주의 운동으로 부흥운동으로 이어졌다.

종교의 개혁은 사실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다. 예배가 예배다운 모습으로, 교회가 교회다운 모습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다. 수도원은 교회의 역사속에서 끊임없이 회복운동을 부르짖었다. 수도원이 되돌아가야할 원래의 모습은 무엇일까? 세상에 수도원이 존재했던 이유는 다른게 아니다. 금욕과 은둔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수도원의 존재의 이유이다.
당시 복음에 헌신한다는 것은 곧 수도자가 되겠다는 뜻이었다. 평생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바친다는 것은 곳 수도원으로 들어가겠다는 뜻이었다. 엄중한 서약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조금 다르다. 복음에 헌신한다는 것은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겠다는 뜻이다. 아니면 목회자가 되기로 작정하든지 말이다. 오늘날 수도원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다분히 이분법적이며 피안적이며 내세에 집중하는 삶이라고 치부해버린다. 결국 어디서도 금욕과 은둔의 장소는 찾기 힘들다. 하나님을 찾는 이들도 갈망하는 이들도 갈수록 적어진다.

한국에도 수도원이 있다. 한국의 수도원은 오랜전통과 웅장한 느낌은 없지만, 소박하면서 외부와 단절되어 하나님을 찾는 공간으로는 충분하다. 전에 포천에 소재한 한 작은 수도원을 방문한적이 있다. 일주일을 그곳에서 지내며 하나님의 말씀을 침묵가운데 묵상하며 보냈다. 고요함과 적막함 속에 하나님과의 시간을 보내기위해 애를 썼던 기억이있다.
그런데 사실 말이 외부와 차단이지 핸드폰은 여전히 진동하고 이곳에서 나갈 궁리만 한다. 여전히 기도에 방해가 되는 요소들이 있다. 모름지기 수도원은 절벽같은 곳에 있어야 한다. 아니면 광야 한복판에 있어야 한다. 수도원은 철저히 외부와 차단되어 하나님을 만나기 충분한 그런 장소가 적합하다.

시끄러운 일상을 너머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도 이제는 듣기가 쉽지 않다. 세상의 소리가 너무 크다. 어떤 분들은 꼭 우리가 그런 곳으로 들어가야하느냐고 일상속에서 하나님을 찾을수도 들을수도 없느냐고 반문한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에서 역사하신다. 찾아오시고 두드리신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들을수 없는 건 사실이다. 너무 바쁘다. 너무 시끄럽다. 진중하게 어둠속에 앉아서 떄로는 폭풍속에 앉아서 잠잠하게 음성을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그럴수 없지않은가. 우리는 빨리 벗어나고 싶어한다. 잠잠한 것을 못견디며 가만히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평안하고 밝은 빛가운데 사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는 강박때문에 문제가 닥치면 빨리 해결하려고 하고, 고통이 찾아오면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친다. 어느순간 평안하다 싶으면 스스로 나는 잘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왜 내게 주셨는지, 이 고통의 의미도 묻지도 않은체 우리는 오로지 벗어나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다. 그러다보니 어둠속에 신비를 풍랑과 고난이 주는 신비를 알지도 모른체 신앙생활하고 살아간다.
우리는 너무 바쁘다. 하나님의 음성이 희귀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저마다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말을 하면 신비주의 이단으로 의심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면 정신과 진료를 권하는 시대가 되었다. 하나님의 음성은 이제 우리시대에 희귀하다.

물론 영성에는 자기 몰입이라는 위험성에 노출될수 있다.
유진피터슨은 그의 책 거룩한 그루터기 에서 이렇게 말한다.

"영성은 언제나 자기 몰입에 빠질 위험이 있다. 즉 영혼의 문제에 너무나 매료된 나머지 하나님을 내 경험의 부속품으로 취급할 위험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깨어있어야 한다. 영성신학은 다른 무엇보다 깨어있는 연습이다."

'깨어있는 연습' 우리가 인생이라는 풍랑속에서 해야할 작업은 한 가지다. 깨어있는 연습이다. 깨어있는 연습이란 무엇일까? 하나님께 우리의 촛점을 맞추는 것이다. 촉각을 곤두세우고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고, 왜 이 풍랑이 우리에게 왔는지 이 풍랑속에서 무엇을 해야하는 지를 분별하고 판단해 내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되새겨 본다.
서둘러 이 풍랑을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아니다. 어두움속에서 풍랑속에서 깨어있는 것이다.
이것을 소위 신앙 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깨어있는 연습을 위해 우리 선배들은 광야로 갔다. 광야훈련소 광야학교라고 부른다. 수도원으로 들어가고 높은 산으로 들어갔다. 고독의 훈련 이라고 부른다.
우리네 삶에서 어찌 되었는 깨어있는 연습을 해야한다. 시끄러운 세상속에서도, 적막하고 고요한 자리에서도 깨어있는 연습을 해야한다.


바위산 정상마다 수도원들이 있었다. 저기에 어떻게 저런 수도원들을 세웠을까?
시간과 여유가 아쉽다. 모든 수도원들을 다녀보고싶다. 그러나 늦은 오후 일정상 모든 수도원을 다녀올수는 없었다.

대 메테오른 수도원 (The Holy Monastery of Great Meteoron, Megalo Meteoro)
발람 수도원(The Holy Monastery of Varlaam)
성 니콜라스 아나파우사스 수도원(The Holy Monastery of St. Nicholas Anapausas)
루사노 수도원(The Holy Monastery of Rousanou)
성 트리니티 수도원(The Monastery of Holy Trinity)
아기오스 스테파노스 수도원(The Holy Monastery of St. Stephen)

메테오라 두꺼비 같이 묵직하게 앉은 바위에 밧줄이 매달려있다. 이 밧줄은 바위위의 수도원과 연결이 되어있다.
수도자들은 밧줄을 이용하여 수도원에 오르고 내렸다. 수도원으로 가는 길이 험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수도원으로 올라가기 위해 어쩌면 생명을 걸었다.
하나님을 찾기위한 생명줄, 기도의 줄이다.
또 걸려있는 어떤 밧줄은 음식이나 물품을 조달하는 데 사용되었다.
사방이 뚫여있고 어디로 나갈수 없는 절벽이라 음식들이 외부로부터 조달되지 않으면 굶어 죽을수 밖에 없었다.
또 다른 의미에서 생명줄이다. 살기위한 생명줄인것이다.


버스를 타고 산을 오른다. 침몰하는 타이타닉호를 연상하듯 하늘로 솟구친 거대한 배모양의 바위도 있다.
이 지역은 풍화작용과 여러차례의 지진으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메테오라 라는 말이 의미하듯 바위위에 있는 수도원들이 하늘에 매달려 있는 것같다고 생각했다. 이들 수도원은 대체로 1300년대 지어진 것으로 본다. 성 아타나시오스에 의해 대 메테오라 수도원이 처음 세워졌다. 성 아타나시오스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삼위일체를 확립한 그 유명한 교부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 후대에 살았던 존경받는 수도사였다.
절벽위의 수도원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이곳보다 더 좋은 곳이 있었을까? 하늘과 가까운데다가 세상과 차단된 고독의 장소이다. 그렇지만 이곳 수도원은 몇 차례 몸살을 겪는다. 오스만투르크의 침입과 더불어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게 되면서 신앙을 위해 수도자들은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고 전해진다. 물론 지금도 수도사들이 생활을 하며 경건의 훈련들을 하고 있다. 그래서 수도원의 방문 시간이 제한되어 있음을 기억해야한다.
메테오라로 오르는 길은 차로 오르는 길이 가장 편하다. 수도원을 찾는 젊은 이들은 이른아침부터 배낭하나 메고 걸어서 오른다. 이곳을 찾는 이들은 방문하려는 수도원의 방문시간들을 체크해야 할것이다.


우리 순례팀들은 방문시간 제한으로 인해 유일하게 방문이 가능한 성 스테판 수도원(Saint Stephaen's Holy Monastery)을 입장할 수 있었다. 스테판 수도원으로 가는 길에 잠시 빗줄기가 떨어졌다. 맑은 날씨만을 기대했지만, 사실 잠깐씩 몰려오는 먹구름은 그자체로 그림 같았다. 몰려오는 구름들은 자연색이 햇빛으로 인해 왜곡되지 않게하고 아주 선명하고 분명한 책채가 눈에 들어오게 한다. 신기하다. 우리의 인생에도 밝은 해만 떠오르면 좋겠다 싶은데 그러면 재미가 없다. 어느정도는 먹구름이 몰려오기도 하고 빗줄기가 내려야 인생의 색채가 분명하게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성 스테판 수도원, 예쁘고 아담한 수도원이지만 겉보기에는 귀여운 방어막으로 외부를 차단하는 작은 성 같았다. 신비그자체다.
작은 입구를 통해 들어갔다. 들억가자마자 한쪽 구석에 기념품 상점이 보인다. 수도원에 왠 기념품상점? 이라고 생각할수 있다. 어색하기도했지만, 수도사들의 노동중 하나가 옛날처럼 땅을 일구고 수도원 청소를 하는 일에서 기념품이나 관광객을 맞이하는 일이 될 수도 있을 것같다는 생각이 든다. 뭐든 하나님을 위한 것이면 되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면 되는 일이겠다 생각을 하니 그들의 모습이 어색하지 않았다.


예배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몇가지 문구들이 눈에 띈다.
"Lord Jesus Christ, Son of God have mercy on me."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 시여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
늘 기도할때마다 호흡을 담아 기도할때 쓰던 기도문이다. 들숨을 하며 '하나님의 아들 주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받아들인다. 날숨을 통해 '자비'를 구하며 내안에 있는 모든 죄와 어두움을 몰아낸다.
우리의 평생의 기도는 사실 이와 같아야 한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과 그 하나님께 겸손하게 내 모든 것을 드리는 기도 말이다. 복음서에서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했던 이들처럼 말이다.
사실 이 기도는 예수의 기도라고 하여 동방교회 전통이다. 수도사들이 호흡을 실어 주와 동행하고자 했던 기도이다. 철저히 침묵으로 이루어지는 기도다. 이를 헤시카즘(Hesychasm) 이라고 한다. 헤시키아(Hesychia)는 침묵, 고요를 뜻하는 것으로서 헤시카즘은 침묵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수단으로서 사용하는 수도방식인것이다. 예수의 기도는 침묵속에서 혼란스러움, 분심, 두 마음 품은 것들을 물리치고 고요와 평정심 가운데 들어가는 기도 방법인 것이다.

헨리나우웬은 그의 책 기도의 삶에서 이 '예수의기도' 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주 예수 그 리스도여, 저를 불쌍히 여겨주소서”라는 표현 속에 모든 기도가 강하게 압축되어 있다.
이 기도는 우리를 위해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나넘 의 아틀 예수님께 드리는 기도이다,
이 기도는 그분을 그리스도, 기름 부 음 받은 자, 메시아, 우리가기다려온 분으로 선포한다. 이 기도는 그분을 우리 주님. 몸과 마음과 영혼과 생각과 감정과 행동올 총망라한 우리 전 존재의 주님으로 부른다.
이 기도는 우리의 죄성을 인정함으로 그리고 그 분의 용서와 자비와 긍흘과 사랑과 선대를 겸손히 간구함으로 그분과의 가장깊은관계를고백한다" (헨리나우웬,기도의 삶,124쪽.)

즉 이 기도는 예수를 우리 전 존재의 주님으로 부른다.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분으로 부른다.
침묵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예수의 기도는 내적인 전투가 치열하다.
이 치열함속에서 결국 우리는 긍휼을 받아야 하는 자리로 들어간다.
살기위해 발버둥치는 존재가 아니라 그저 내 상태를 개방하고 맡겨드리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다.

사실 모든 기도는 위에서 내려보시는 분과 아래에서 위로 내려보는 존재의 만남이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시점이다.


예배당 안으로 들어갔다. 생각보다 좁은 장소이기에 줄을서야 했다.
들어가자 마자 눈에 들어온것은 화려한 그림들이었다.
그리스 정교회 교회답게 예배당 안쪽은 화려한 프레스코화 벽화로 둘러있다. 예배당으로 통하는 입구를 들어가서 정면을 바라보면 대체로 천정은 복음서의 내용들이 그리고 벽쪽은 순교자들의 순교장면과 성인들의 모습이 있다. 잔인한 고문 장면이라든지 순교장면들이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순교신앙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우리에게 그대로 전달해준다.

우리에게는 화려한 교회의 벽화가 어색하고 낯선 것이지만, 정교회의 프레스코화는 그자체로 신앙교육이었다. 눈으로보는 신앙교육말이다. 한쪽 편에는 과거 성인들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이러한 그림들은 소위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속으로 몰입할 수 있도록 돕는다. 더나아가 연합과 참여의 자리로 나아가도록 한다.
이를 정교회의 테오시스(Theosis) 신학과 연결이 된다. 인간이 하나님의 영역인 신의 성품에 연합 또는 참여하는 것이다. 이를 신화(deification) 또는 신비라고 말하고 싶다. 기독교의 신비는 곧 무한자와 유한자의 연합과 신비이다. 곧 무한자이신 하나님께서 유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이땅에 오신것 이것이 최고의 신비다. 예수께서 빵과 포도주에 임하신다. 신비다. 신앙은 곧 신비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인데, 이를 테면 하나님의 영역으로 참여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과 연합은 곧 신비다. 동방정교회는 이를 테오시스 즉 하나님께로 나아감 연합의 신비라고 하였다. 프레스코화가 우리를 그런 신비의 자리로 나아가게한다.
예배당 안쪽으로 들어가보자. 예배당 안쪽 중앙지점은 역시 돔의 형태로 되어있다.
천장에 돔으로 얹은 곳은 하늘이 임재하는 지점이다. 그래서 그곳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화가 그려져 있다.
천사들이 경배하는 모습이 그려져있다. 12사도들과 장로들이 보좌위의 어린양께 경배하고 있다.
이곳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한 천상의 예배장소이다.
예수의 시선은 아래에 있는 우리를 향해 있다. 우리는 하늘을 보고 있다.
이 공간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이요, 예수와 우리의 시선이 맞닿은 장소이다.
그래서 이곳 예배의 자리는 하나님의 현존의 장소이다.

예수의 성화 주변은 복음서의 저자들이 그려져있다. 복음서의 저자들을 중심으로 천정에는 복음서의 이야기들이 그려져있다.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들어가야할 부분들이 정확하게 들어가있다. 성화만을 그리는 수도사가 있다고 하니 나름의 방법이 있을 것이다. 지금 이곳의 벽화들은 수정되고 보완중에 있다. 사진 촬영이나 접근이 부분적으로 제한되어 있다.

그려진 그림들을 보니 흥미롭다. 제단 정면 천장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날 밤, 성만찬 그리고 겟세마네에서의 기도 장면이 그려져있다. 가룟인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장면까지 아주 소상하게 잘 표현하였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이 보인다. 예수님의 십자가 달리시기 전날 밤과 십자가를 지신 후의 그림 사이에 장황하게 그려놓은 장면이 있었는데, 이 그림이 참 독특하다.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서 부활하시어 죽은이들을 일으키시는 장면이다.
빛난 옷을 입고 가운데 서신 이가 부활하신 예수시다. 그리고 좌우로 돌 관에서 예수의 손을 붙들고 뛰쳐나온다.
부활의 능력이다. 예수의 발아래에는 천사가 땅 아래있는 이들에게 무엇인가 속삭이는 장면과 함께 몸에 수의를 감은 이들이 일어나고 있다. 해석하건데 이는 옥에 있는 영들에게 부활의 소식을 선포하시는 장면 혹은 죽은이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장면일 것이다. 베드로전서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께서 죽은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시는 장면을 기록해 놓았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벧전 3:18~19)

"이를 위하여 죽은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하려함이라."(벧전4:6)

그리고 기억에 남는 그림이 제단에서 반대편에 위치한 스데반의 순교 장면이다.
스데반은 가운데 무릎을 꿇고 있다. 그의 손은 하늘을 향하여 있다.
그의 시선은 보좌위에 계신 하나님과 그 우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다.
성밖에서 사람들은 스데반을 향해 돌을 던지고 있다. 그림을 유심히 살펴본 이유는 스데반의 순교장면과 더불어 사울의 모습이 궁금해서이다. 스데반은 정면에 그리고 사람들의 옷가지를 들고 앉아있는 이가 있는데 그가 사울이다.(행7:58) 그는 사형을 집행하는 이들의 옷을 맡았고, 스데반의 죽음을 보며 마땅히 여겼다.(행 8:1)
느낌 탓일까 사울의 표정은 마땅히 여기는 표정은 아니었다. 다소곳하게 앉아있다.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처럼 말이다. 한 적한 곳에 혼자 앉아있다. 예수의 택한 그릇으로서 일평생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나라의 확장에 쓰임받게될 그 위대한 서막을 알리려는 듯이 뭔가 홀로 앉아있다.

화려한 프레스코화를 보고있으니 고개도 아프다. 천정만 보다가 외국인들 발을 밟기도 하며 연신 목을 굽혀 낮은 목소리로 'Sorry' 내뱉었다. 안되겠다 싶어 좁은 문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갔다.
문은 예배당의 중요한 요소이다. 세상에서 살다가 예배당 문을 통해 하나님나라의 현존으로 들어온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나라의 능력과 회복을 경험하여 그 문으로 나간다. 예배 후 축도가 마치면 문이 열리는 순간,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상이 보인다. 그 문을 나서며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갈 그 결단을 한다.

수도원 밖으로 나왔다. 멀리 세상이 보인다. 장관이다. 멀리 보이는 세상은 아름답다.
하나님을 만나면, 그리고 그분과 동행하면 세상은 두려운 곳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의 나라이다. 의는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는 것이다. 평강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하는 상태이다. 희락은 기쁨이다. 곧 구원의 기쁨, 죽음에서 해방된 기쁨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하나님나라로 변화시킬 사명을 가지며 아름다운 곳으로 회복시킬 사명을 가진다.
사실 하나님을 만나는 궁극적인 목적이기도하다. 치유의 목적은 곧 하나님나라이다.

메테오라는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다. 침묵으로 우리의 내면과 치열한 전투를 경험하는 곳이요. 결국에는 하나님의 방법이 나의 방법을 이기고 승리하여 그의 삶으로 대 전환이 일어나는 장소이다.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치유와 회복을 꿈꾸며 마침내 하나님나라로 회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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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함께 걸었네 - YES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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