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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성지순례 기행/튀르키예 그리스 바울의 발자취 기행

[그리스 여행 / 그리스 성지순례] 그리스여행 준비 , 날씨 영화 300, -테르모필레, 그리스도인의 야성을 찾다.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19.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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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일찍 일어났다. 적응이 안되는 그리스의 날씨 때문에 감기에 걸렸다. 
그리스의 여기저기에서 스산한 바람이 불어왔다. 
아내가 준비해준 겉 옷으로 옷가지를 여미고 목에 둘러주는 스카프를 의지해 버텨보았지만, 
감기는 그냥 지나가지 않았다.  
아내는 준비성이 철저하다. 반면에 나는 준비성과는 거리가 멀다.
내가 여행에 준비성이 부족하다는 것은 아내와 여행을 갈때마다 느끼는 것이다.  
워낙 어디서든 먹고 자는 성격이라 챙길게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막상 여행지에 오면 손이 많이 가는 스타일이다.  
아내가 한국에서 가져온 감기약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어제 파르테논의 야경을 보며, 밤 바람을 쏘인 탓인지 몸살기운 마저 느껴졌다.

몸을 다시 추스리고 여행을 준비한다.  오늘은 듣기만해도 설레는 곳이다. 그리스의 메테오라(Meteora)로 간다. 

아침부터 비소식이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 많은 관광객들이 메테오라의 장관을 보지 못하고 구름만 잔뜩 낀 수도원만 보고 온다는 소문을 들었다. 하늘을 보니 심상치않다. 아무래도 우산을 챙겨가야 할것 같다. 

여행을 많이 다녀본 것은 아니다. 해외여행이라고는 지역 문화 탐방 내지는 비전트립이라는 목적으로
중국과 태국 또는 라오스 정도 방문한 것이 전부이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니 대학시절 중국에 갔을때가 생각이 난다. 
기억의 소재는 다양하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느끼기만 해도 새록새록 기억이 떠오른다.
대학시절 교회의 청년들과 함께 중국과 북한 접경지역을 방문한적이 있다.
일정 마지막날이었다. 북한 접경지역 문화 탐방으로서 가장 의미있는 곳이 어디일까?
고민하던중에 그때 선택한 곳이 백두산이었다. 백두산을 방문한다는 것만큼 설레는 일이 어디있을까?
당일 아침 날씨가 좋았다. 인생은 타이밍이라는 말은 도박에만 해당되는 말인줄 알았다.
원래는 점심먹고 오후 일정이었으나 가이드가 재촉하였다.
지금이 가야할 타이밍이고, 지금 가야 천지(天地)를 볼수 있다는 것이다. 
가이드의 강권에 못이겨 백두산으로 올랐다. 하늘은 맑았다.
드디어 백두산을 오르는 구나!
오르는 동안 백두산의 아름다움은 지금도 잊을수가 없다. 
산의 최고의 절경은 정상에서 경험할수 있다. 그러나 산의 즐거움은 정상을 향한 발걸음속에서 발견할수 있다. 
산 정상에 올랐다. 그런데 백두산은 고약하고 심술궂은 친구인 먹구름을 불러내어 천지의 모습을 꼭꼭 숨겨버렸다. 
비가오기 시작하였다. 이내 바람이 불었다. 강하게 내리는 비와 바람은 마치 폭군과 같다. 몰아세우고 쫓아낸다.  
몸을 가누지 못해 어찌할바를 몰라 결국 하산을 결단을 하였다. 아쉬움이 가득하였다.
다음에 다시오겠다고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듯 무겁게 산을 내려왔다. 

테르모필레에서 본 산맥

대학시절 백두산을 처음 만났던 그 아쉬움이 그대로 메테오라로 향하고 있다. 날씨가 좋아야할텐데..... 
한 참을 날씨 걱정을 하던중, 멀리 차창밖으로 백두산 만큼은 절경은 아니지만, 구름에 가리워진 신비로운 명산들을 만날수 있었다. 생각보다 깊고 높은 산들이다. 사람들이 산을 찾는 이유는 산이 자신을 품어주고 있다고 믿기 때문일것이다. 
그래서 어떤이들은 속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산으로 들어간다. 산이 품어주고 세속으로부터 숨겨주고 있다고 믿는다. 
고국의 독립과 혁명을 위해 망명의 여정을 걷는 이들도 산으로 들어갔다. 도적이나 실향민들, 하루 끼니를 떼워야하는 가난한 백성들도 모두 산으로 들어갔다. 산이 품어주기 때문이다. 산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해진다. 
사도바울이 그리스지역으로 들어온 것은 2차 전도여행때 이다.
이곳에서의 일정은 사실 사도바울의 전도여행 여정 그대로는 아니다.
오히려 사도바울의 전도여행을 역추적해 가는 과정이다. 
코린트에서 아테네로 테살로니키에서 필립피로 아래쪽 지역에서 위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중이다.

사도바울의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2차 전도여행시점에 마가 요한을 전도팀에 합류해야 할지를 두고 바나바와 심히 다툰다.
바나바는 마가요한을 데리고 구브로로 바울은 실라와 함께 육로로 올라간다.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로 한 마게도냐인이 건너와서 도우라는 환상을 보게된다.
일정을 바꾸어 그곳으로 향하여 복음을 전하게 되는데 그 첫성이 빌립보성이다. 
바울과 전도팀은 빌립보성에서 데살로니가로 간다. 데살로니가에서 유대인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베뢰아로 이동한다. 베뢰아에서 아덴으로 간다. 아레오파고스에서 복음을 전한후 고린도로 향한다. 

바울이 이동했던 지역들은 대체로 해안선을 따라 형성된 도시들이다. 지금은 지형이 많이 바뀌었다. 
바울시대에 해안가 또는 바다였던 곳은, 퇴적층이 형성되어 지금은 평야 또는 들판이 되었다.
해안선은 많이 밀려나있다. 그리스의 해안가는 내륙쪽으로 큰 산맥들이 마치 등뼈 처럼 굵직하게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산맥들은 그리스의 문화와 기후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아무래도 해안가와 산맥을 따라 도시가 형성되었기에 도로도 잘 닦였을 것이다. 
사도바울도 에베소와 같은 항구도시나 테살로니키와 같은 해안가를 따라 형성된 도시들을 방문하였다.
분명 도보(道步)로 이동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산맥이 나오면 그 산을 넘어야했다. 때때로 산으로 들어가야했다.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는, 강물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 사람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하였습니다. 수고와 고역에 시달리고, 여러 번 밤을 지새우고, 주리고,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고, 헐벗었습니다. (고후 11ㅣ26~27 표준새번역)
멀리서 보는 산은 그 자체로 너른 품이다. 그러나 들어가보면 그곳은 위험천만한 곳이다.
복음의 여정을 감내한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산은 그자체로 외로움의 장소요 주림과 목마름의 현실이다.
내가 차로 달리는 이길, 순식간에 2시간이면 가는 길을 몇 날 몇일이고 걸어야했다.
우리가 누리는 이 복음의 정수는 누군가의 희생과 고통으로 허락된 것이다. 
멀리서 보기에 그저 나즈막한 산, 너른 품에 안아주는 산으로 보일지 모른다.
모든이들을 받아주는 따뜻한 환대의 장소일지모른다.
그러나 가까이갈수록 그곳은 생명의 온기라고는 찾아볼수 없는 차갑고 배고픈 장소요. 어두운 장소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그리로 몰아가셨다. 복음의 진수는 바로 차가운 곳을 그리스도의 피로 뜨겁게 만들고, 생명의 온기가 없는 곳, 멈춘곳에 그리스도의 생명을 심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의 발걸음이 우리에게 넘어왔다. 사실 야성이란 그런 것이다. 산지라도 평야라도 개척해내고 누군가의 발걸음이 되도록 먼저 밟아가는 것 그것이 개척이요 야성이다. 사도바울은 엄연히 개척자이다. 
복음의 진수를 우리에게 전달했다. 하나님나라의 과제를 우리에게 남겨주었다. 그러면 우리는 그가 밟은 걸음을 그대로 걸어가면된다. 아니 뛰어넘어야한다. 바울이 이룬 하나님나라를 더 확장시켜야할 의무를 가진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야성일 것이다. 그리스의 산맥들을 보며 사도바울이 위험과 수고를 떨쳐내고 치열하게 다녔을 그 모습을 상상해본다. 

테르모필레 위치

아테네 도심에서 벗어나 3시간여를 버스를 타고 갔다. 산과 바다에 눈이 피곤하거나 심심할 틈이 없었다.
한 지점에 멈추었다. 그저 보기엔 휴게소의 한 기념탑이나 서울 인근 지역에서 지나가다가 으례 볼법한 전쟁 기념탑 같은 것이 세워져있는 광장이었다.
내륙쪽으로는 거대한 산맥들이 펼쳐져 있었고 바깥쪽은 낭떨어지가 펼쳐져있는 지형이었다. 
 


넓은 광장에 동상이 세워져있었는데, 청동으로된 멋진 고대의 근육질 청년이 자기 몸만한 거대한 방패를 들고 적군을 향해 창을 전질 기세로 서있다. 여기가 바로 테르모필레(Thermopylae)이다. 
2차 침공을 한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와 레오니다스가 이끄는 스파르타군 300명과 헬라스의 동맹국 7천명과 각축전을 펼친 전투가 바로 테르모필레 전투(the battle of Thermopylae)라고 할수있다. 이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2007년 잭 스나이더(Zack Snyder)가 연출한 '영화 300'을 보면 엿볼 수 있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테르모필레에 대해 이렇게 소개한다. 

크세르크세스 왕은 트라키스의 멜리스에 진을 치고 헬라스인들은 고갯길에 진을 쳤는데 이 고갯길을 대부분의 헬라시인들은 테르모퓔라이라고 부르지만, 이지역 주민들과 인근주민들은 퓔라이('문' 이란 뜻, 테르모필라이는 온천길이 솟는 고갯길 이란 뜻)라고 부른다. (역사 7권 201장)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는 아테네로 향하는 길목인 테르모필레를 반드시 차지해야했다. 그리고 헬라스인들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했다. 전쟁은 치열했다. 고갯길은 수적인 우세로 밀어붙여 전쟁하기에는 좁은 공간이었다. 게다가 페르시아의 창은 헬라스 군의 창보다 짧았다. 페르시아는 퇴각을 반복하였다. 


풀리지 않은 전쟁으로 인해 페르시아 왕이 난감해하고 있을때 에우뤼데모스의 아들 에피알테스라는 멜리스인이 왕을 찾아온다. 그가 테르모필레에 이르는 오솔길을 알려주게 된다.  역사는 기억이다. 기억을 위해 기록이라는 방법을 사용한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기원전 약 424년경 발행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역사가는 기억을 위해 기록해주는 것을 사명으로 가진다.
때로는 밀고자 같은 느낌도 소심하여 일기에 기록해 놓은 속좁은 양반으로 기질이 다분히 보일때가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불구하고 한 조각의 역사적 기록들이 역사의 분기점을 이루기도하고 흐름을 바꾸기도한다. 
헤로도토스의 역사가 다운 기질이 보이는 대목이 있다..

"산을 넘어 오솔길을 따라 페르시아인들을 안내한 것은 다름아닌 에피알테스며 그래서나는 그를 범인으로 기록해둔다."

역사가라기 보다 아니 밀고자 같다는 느낌마저 든다. 소문대로 탁월한 이야기꾼 임이 분명하다.
레오니다스와 헬라의 동맹국들은 패전의 분위기를 감지했다.  패전의 신탁을 들은 이후 동맹국들이 전쟁에 대한 의견이 나뉘어지자 레오니다스는 그들을 떠나보낸다. 물론 스파르타의 용맹함 때문이기도 했지만, 용사가 사명으로 부여된 장소를 떠나는 것을 치욕으로 아는 이들의 습성때문이었을 것이다. 결국 페르시아의 군대들이 진격해왔다.
스파르타인들은 용맹스럽게 싸웠다. 페르시아는 많은 전사자들을 냈다.
좁은 지역에서의 치열한 전투로인해 바다에 빠지기도하고 전우들의 발에 밟혀죽기도했다. 
헤로도토스는 페르모필레 전투의 마지막 장면을 이렇게 묘사한다.

'헬라스인들의 창은 이제 대부분 부러졌다. 그래서 그들은 칼로 페르시아인들을 도륙했다. 레오니다스는 이 혼전중에 용전분투하다가 전사했고 그와함께 내가 이름을 알고있는 다른 저명한 스파르테인들도 기억에 길이 남을 인물들로 전사했다. 사실 나는 300명 전원의 이름을 알고있다.'  (역사 7권 224장) 
왜 300명이었을까? 사사기에 보면 기드온과 300용사의 이야기가 나온다.
사실 레오니다스의 300용사와 기드온의 300용사는 선발 과정부터가 다르다.
레오니다스의 300용사는 스파르타에서 훈련받은 용사들이었다. 일당백의 용사들말이다. 자신의 몸만큼 큰 방패와 긴 창으로 덤벼오는 적군들을 단번에 두 동강이 낼 수 있었다. 용사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싸웠다. 죽음을 예견한 레오니다스도 스파르타가 모든 명예를 얻도록 하기 위해 동맹국들을 되돌려 보냈다. 

이에 비해 기드온의 300용사는 스파르타의 300용사와 엄연히 다르다.
하나는 방어와 패전의 이야기요 하나는 승리의 이야기이다.
기드온의 300명 용사, 그것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기 위해 인간의 노력이나 전술을 최소한으로 하기위한 시도였다.  인간의 용맹스러움이나 전술로 이일들이 가능했다는 평가가 아니라 전술에 능하신 하나님이 승리하셨다는 말하자면 표적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고 인간편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가? 그렇지 않다. 
기드온의 300용사에게 그리고 레오니다스의 300용사에게 동일하게 필요한 것은 다름아니라 용맹함이었다.
레오니다스의 용사들의 용맹함은, 두려움을 떨치기 위한 몸부림 이었다.
레오니다스로 보이는 테르모필레의 한 용사의 동상에는  ‘몰론 라베(Molon Labe)’. 라고 적혀있었다.
'와서 가져가라.'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가 레오니다스에게 사절단을 보낸다. 그리고 '무기를 내게 바치면, 살려주겠다.' 라고 한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몰론 라베'(Molon Labe, 와서 가져가라" 영웅은 영웅이다. 
그의 용사다움과 기개는 헬라스의 도시국가 연합을 하나로 단결시킬만한 예가 되었다. 

 ' 몰론 라베'(Molon Labe,  와서 가져가라)


용사는 죽음앞에서 두려워하지 않는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려면 죽음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야한다. 
생명에 대한 욕심이나 지나친 집착은 금물이다. 오직 생명을 넘어서는 가치가 죽음을 이기게한다. 용사들은 그 가치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사소해 보일지라도 그것에 생명을 건다. 이것이 바로 레오니다스와 300용사들이 가진 용맹스러움이었다. 용맹스러움은 죽음과 전쟁을 치루어야 하는 용사에게 가장 필요하다.

성경에 등장하는 기드온의 300용사 이야기로 넘어가보고자 한다. 굉장히 성대하면서 도전을 주는 레오니다스의 용맹스러움과는 달리 기드온의 이야기는 뭔가 어설프다. 시작부터 한 용사의 용맹스러움과는 거리가 멀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 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함이라." (삿7:2) 
  
미디안과 전쟁을 하기위해 달려온 삼만여명의 용사들을 집으로 귀가시키고 남은 건 300명, 기드온에게 있어서 너무도 적은 수였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되돌려보내신다. 왜냐하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많으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되고 소위 교만해 진다는 것이다. 전쟁 기념비를 세우고 탁월한 전쟁 용사인 기드온을 높일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300명만 세우신다. 그들은 용사라기 보다 단지 물을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떠 먹는 이들 중 한 부류였다. 남은 300명, 그들은 용사라기보다 전략과 전술이라는 것을 알턱이 없는 오합지졸같이 보이는 그들 기드온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는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다. 탁월한 전략가 이신 하나님께 맡기게 된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용맹함은, 다름아니라 믿음이다. 뛰어난 전략가이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말이다.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믿음과 하나님나라의 확장이라고 하는 영원한 가치에 우리 마음을 둘때에 그리스도인들은 용사가 된다. 

우리가 하는 모든 전쟁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믿음, 이 믿음이 우리에게 있으면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한 하나님나라의 가치를 가지고 어디라도 간다. 산으로 들어간다. 바다 한복판으로 들어간다. 불속이라도 물속이라도 상관없다. 그곳으로 들어가 그곳을 하나님나라로 만든다. 이를 성경에서는 세상이 감당할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히11:38)   
그리스도인들의 야성은 그곳에서 나온다.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믿음... 그리고 하나님나라를 위한 영원한 가치. 

분명 300용사를 이끌고 간 두 지도자는 전술도 다르고 훈련하는 방식도 달랐다. 상황도 전혀 다르다.
그러나 그들에겐 두려움에 맞설 용맹스러움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 용맹스러움도 달랐다. 
한 부류는 명분과 가치에 둔 용맹스러움이었다면, 한 부류는 전적인 믿음이었다.  
무엇이 옳다고 말할수 없다. 그러나 지금 현재 우리는 명분과 가치보다는 생존과 목숨을 연명하는데 집착하고 있으며, 
전적인 믿음 보다는 두려움과 불안함에 서있다. 
그래서 지그문트 바우만( (Zygmunt Bauman))은 그의 책 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에서 이 시대는 생존과 두려움에 집착한 나머지 세상을 개인주의적인 세상으로 만들었고, 다른이들의 성공을 위한 도구로  동시에 자기 혼자 힘으로 살아가도록 방치되는 세상이 되었다고 평한다.
그리고 '이런 세상이 그런 괴물들이 출몰하는 곳이다.' 원색적이고 적나라한 표현이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미친듯이 분노하며 살아간다. 실패의 두려움속에서 살아간다. 낙심과 좌절이 삶의 전부인양 살아간다. 그 속에 흐르는 것이 바로 공포다. 

공포가 저변에 흐르는 세상, 같이 살아가기보다는 혼자살아가는 세상에서 명분과 가치는 쓸모없는 것이다. 전적인 믿음은 시간낭비이다. 그러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용사들의 용맹스러움은 찾아보기 힘들다. 
영웅(英雄,Hero)들이 사라진 세상은 이제 극장에서 마블 영화에서나 볼수 있다. 
에너지를 통해 날라다니고 철갑옷으로 무장한 능력자, 돌연변이, 하루아침에 건물을 세우고 온 갖 좋은 무기들을 만들어내는 자산가들에게 찾아볼수 있다. 그리고 그 영화를 통해 인간들의 영웅심리를 발현하고 영화를 끝나고 나온뒤에는 시원하게 해소하고 나온다. 그게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서 만들어내는 괴물들이다.  
 
테르모필레의 레오니다스 동상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기억의 도구는 다양하다. 어떤이는 펜으로 기록을 남기고, 어떤이들은 사진을 찍어 장면을 남긴다. 어찌되었든 그날의 감동을 남기려는 것이요. 작은 몸부림이라도 역사에 기여하고 싶은 인간의 본성이라하겠다. 사진을 남겨봄으로 나의 삶의 변화를 기대한다. 변화야말로 역사에 기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 연구의 중요한 방법이 한 존재, 한 시대의 변화의 꼭지를 살피는 것이다. 
어떤일이 그 사람을 변화시켰는지, 무엇이 이 시대를 바꾸어 놓았는지 그 분기점을 살피는 것이다. 
사진으로 남겨 봄으로서 그 분기점이라는 것이 내 삶에도 시작되기를 기대해 본다. 
용맹스러움, 이시대에 안겨진 과제요 살맛나는 세상을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인간다움의 요소이다. 

먹구름이 잔뜩 끼더니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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