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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한 기대 (삶)/책과 삶

권석천, 사람에 대한 예의 를 읽고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20.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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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천 이라는 작가를 처음 접한 건 수년전 교회에서 청년사역을 감당했을 때이다. 
당시 "정의" 라는 단어가 우리 사회 변두리에서 중심 언어로 부각되면서 
서점에는 정의와 관련된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예컨데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말 할것도 없고, 강남순 교수의 '정의를 위하여' 라는 책도 등장했다.
특별히 강남순 교수의 '정의를 위하여' 는 정의에 대한 지성적 이해, 정의란 곧 비판적 성찰 이라는 명쾌한 정리가 무감각한 우리의 지성에 예리한 칼날과 같이 파고들었다. 

이시대 교회는 공공신학, 공적신학이라는 화두가 떠오르는 시점이었다. 공적영역의 교회의 역할, 하나님나라와 같은 핵심 단어에 가장 필요한 동기부여는 '정의로움' 이었다. 
정의로움은 사회와 공정영역에 교회는 어떻게 존재해야하는가? 에 대한 질문과 사역에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다. 

특히 당시 청년사역을 하는 내내 청년들에게 묻고 답하는 모든 부분에서 정의로움을 답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시기에 권석천의 정의를 부탁해 라는 책은 내게 꼭 필요한 책이었다. 이것이 권석천 이라는 작가를 처음 접했던 상황이다.

권석천 작가는 기자다. 대학에서 법을 전공했다. 어떤 이유로 법을 전공한 이가 기자 생활로 전향했는지 궁금하다. 
그의 글은 굉장히 치밀하다. 기자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개인적으로 일면식도 없기에 어떤 성격 성향의 소유자인지는 알수 없지만, 글을 읽는 것만으로 풍기는 느낌이다. 
게다가 기자이기에 차갑고 냉철할 것만 같은 그의 책은 세련된 언어들을 구사면서도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이야기들, 인간적 본성을 자극하면서도 빠져나갈수 없도록 코너로 몰아치는 강한 펀치 같은 언어들, 잃어버린 감수성들을 자극하는 언어로 가득차 있다.
이것은 '정의를 부탁해'를 이어 '사람에 대한 예의'라는 책을 읽으면서 다시금 동일하게 느끼는 것들이다.  그의 책을 읽을때마다 동일하게 느끼는 것이기에 이는 권석천이라는 작가가 가지는 능력 지수라고 믿는다.

사람에 대한 예의 라는 책을 집어 든것은, 최근에 김누리교수의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와 악셀 하케의 책 '무례한 시대를 품위있게 건너는 법' 두 권의 책을 읽으면서이다.

 

 



코로나 시대를 겪으며 우리가 몸으로 접하는 가장 큰 이슈는 '인간 됨' 이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 우리가 사는 이 공동체는 안전한지에 대한 끊임 없는 확인 작업이 필요하다. 
악셀하케는 '품위는 인간으로서 함께 사는 방식을 골몰하며 사는 것'이라고 한다. 어쩌면 품위와 예의는 매 한가지다. 
둘다 사람으로서 함께 더불어 살아갈수 있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좀더 우리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직면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왜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사는 것이 살마에 대한 예의를 갖추며 사는 것인지를 진실하게 숙고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그가 쓰는 도구들은 날카롭기도하고, 핵 펀치처럼 강하다. 
섬게하기도하면서 사늘하기도 하다. 어둠과 그늘진 지하 감옥방 같기도하고 그나마 한 줄기 빛이 임하도록 희망이라는 작은 사치를 허용한다. 

이러한 것들을 그의 책의 도구로 쓰는 이유는 그의 책에서 밝히고 있다.

첫째, 사람에 대한 온전한 이해 때문이다.

' 오롯이 인간으로 살고 싶은 마음... 악에 무릎 꿇지도 용서하지도 않겠다는 마음이다. 그리하여 인간이라는 한계는 오히려 구원이 된다.'(36쪽) 

그는 오롯이 인간으로 살고 싶은 마음에 대한 응원이요. 인간으로 살고 싶은 마음에 대한 정직한 반응을 요구하는 것이다. 악에 무릎꿇지도 용서하지도 않겠다는 마음 이러한 정직한 반응은 구원으로 나아가게 한다.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은 사실 정직한 반응 즉 인간의 한계를 직면함으로 시작된다.

"유머는 두려움에 대한 생리적 반응이다. 프로이트는 유머가 사람이 좌절했을때 생겨나는 몇가지 반응중 하나라고 말한바 있다. 개는 문이 열리지 않으면 문을 긁거나 땅을 파거나 으르렁거리는 따위의 의미없는 행동을 하는데 이는 좌절이나 놀라움 또는 두려움에 대처하기위해서다." (22)

정직한 반응은 구원의 중요한 요소이다. 두려움의 감정은 정직하기 쉽지 않은 감정이다. 그래서 인간은 유머로 반응하기도 하고, 두려움으로부터 피하기 위해 고립을 선택하기도 한다. 
하지만 두려움은 인간됨의 정체성중 하나다. 인간이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두려움을 정직하게 표현하는 것은 인간으로 살고싶은 마음의 발로(發露)일 것이다.
기독교에서 용서하기 싫은 마음에 대한 발현, 분노, 두려움, 거절감, 불안함과 같은 감정은 하나님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인간의 정직한 반응은 인간이라는 한계를 직면하게 한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함과 동시에 구원을 호소하게 된다. 
저자는 기독교인 인지 의심하게 만드는 요소들을 책의 곳곳에 설치해 놓았다. 하지만 거슬리지않는다. 
위의 말 그대로 인간이라는 한계는 구원이 된다는 말에 충분히 공감이 된다. 

하지만 고민해야 할것은 두려움에 대한 나의 반응이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에 직면했을때 공동체는 무엇을 선택하며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이다. 보호장치를 통해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피해버리지는 않는가? 유머나 분노, 냉소로 두려움이라는 정직한 반응을 잘라내지는 않은가. 결국 그 삶에는, 그 공동체에는 구원과 무관할 것이다. 


둘째, 공동체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위해서다. 

예의라는 말 자체가 타인과의 관계속에서 드러나는 관계적 용어다. 인간에 대한 정직한 반응은 곧 함께 사는 세상으로 나아간다. 함께 살기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타인을 너로 대하는 것. 그것이나, 저것 또는 비인격체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요 너로 대하는 것 이것이 예의라고 하겠다. 악셀 하케가 말하는 것처럼 함께 사는 방식을 고민하는 것이라 할수 있겠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은 배제와 혐오, 소외로 도배되어있다. 가족애가 사라졌다. 부부의 세계는 섬뜩하고 불안하기만하다. 우월감과 열등감에 지배당하고 있다. 잉여인간들은 더이상 하나의 인격이요 존재로 인정받지 못하는 세상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사람에게 할수 있는 가장 잔인한 일은 혼잣말 하게 내버려두는 것이다(59)' 
소외다. 차별이다. 적극적인 의미로 혐오와 배제다. 혐오와 배제의 가장 잔인한 방식의 행동은 혼잣말하게 내버려두는 것이다. 마스크를 쓰고 사는 세상 저마다 할말들을 SNS에 적어가는 세상 유튜브를 보면서 누리는 세상은 혼잣말 하는 세상이 되었다. 혼자말하는 세상은 그렇다쳐도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둔다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혐오와 배제로 얼룩진 세상을 이렇게 표현한다.
'인간이란 성냥개비로 지은 집 같습니다. 마음속 작은 나사 하나만 틀어져도 망가지기 쉬운 존재입니다. 남들이 눈치채지 못해도 스스로는 서서히 망가지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반대로 굳게 쥔 주먹하나가 사람을 완전히 다른 존재로 만들기도 합니다.'(77) 

저자는 우리가 만든 상황이 한 존재를 어떻게 파멸로 이끌수 있는지, 우리가 굳게 쥔 주먹이 다른이들에게 어떤 존재가 되게 한다고 밝힌다. 이 책에서 굳게 쥔 주먹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부조리한 세상, 혐오와 배재로 둘러싼 세상을 향해 부당함을 호소하는 것을 말한다. 어떤 의지를 말한다. 부조리함에 대항하고 비판적 성찰을 통해 보다더 나은 미래를 준비하고 만들어 감을 의미한다. 정의로운 세상은 굳게 쥔 주먹으로 시작된다. 

 

 

 

마지막으로 인간다운 삶의 방식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다.

인간다운 삶의 방식을 잃어버린 세상. 답다는 말은 유교식표현이면서 바른 세상을 창출해내는 표현이었다면
오늘날에는 꼰대식 표현이다. 어쨰거나 저자는 인간다움을 강조하는 듯 보인다. 

"베네틱트 16세도 프란치스코 앞에서 고해성사를 한다. 그는자신이 아동을 성추행한 사제를 방치했다고 고백한다. 역설적으로 두 교황은 잘못을 범하지 않음이 아니라 잘못이 있는 그대로 고백함으로 교황다움을 드러낸다. " (194)

그렇다 교황다움은 죄를 범하지 않은 완벽한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잘못을 그대로 고백함으로서 그도 완벽하지 않은 인간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나는 목사다. 목사다움은 뭘까? 오늘날 목사다움, 교회 다움에 대한 질문과 고민이 커지는 시기를 살고있다.
과거 나는 사실 '목사도 인간이기때문에.....' 라는 말을 싫어했던 적이 있다. 젊은 목사 라는 말도 싫어했다. 
하찮게 보이거나 얕보이는 말들에 애써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게 권위고 그 자리를 지키는 방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순간 부터 목사됨이란 결국 같은 인간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목사도 인간이기 때문에.... 이말은 현실적 죄와 잘못을 면피해주는 말이었다. 잘못을 짓고는 '목사도 인간이다.' 라는 말로 멀찍히 도망갔다.
그러나 '목사도 인간이다.' 라는 말은 잘못을 덮어주다. 목사도 인간이니까 허물과 잘못이 있을수 있으니 이해하고 눈감아 주자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분명 이 말은 목사도 잘못을 저지를수 있는 인간이라는 뜻이다. 인간이기에 목사 역시 회개와 죄 고백의 장소로 들어가야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이런의미에서 우리는 목사다움과 교회다움을 너무 잃어버렸다. 
 
저자는 저널리스트이다. 그는 끊임없이 고뇌한다. 기자로서 사는 삶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가야할 것인지. 고민한다. 자기 기준의 원칙을 고수함으로서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 불편한 존재가 되기로 결단한다. 그는 원칙이 승리하는 삶에 대한 확신이 있는 것같다. 

"현실은 순정만화가 아니다........ 세상이 그러니 어쩔수 없지 않느냐고 대충 타협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기회주의자들이 돌아설때 혁명이 성공하는 것처럼 보다 많은 이들이 원칙편에 설때 원칙이 승리한다. .....그 점에서 서로 마음을 터놓을수 있는 파트너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혼자서는 끝까지 갈수 없다."(218)

글의 말미에 밝히지만, 여타 다른 책들은 애써 그길을 보여주려고 한다. 하지만 이책은 그저 인간다움을 고민하는 책이어서 이책이 좋다. 한 저널리스트가 영화도 보고 삶에서 느낀 것을 분위기에 취해 고백하듯 이야기해준다. 
피곤한 저녁 넥타이를 풀어헤치고 쓰디쓴 커피한잔 머금고  진지한 이야기를 오거니 받거니 좋은 친구 혹은 선배를 만난 기분이다. 

"저를 포함한 기자들도 공포산업의 공범입니다. 수많은 충격 고로케를 만들면서 정작 무서워해야할 것은 알려주지 않으면서, 아니 못하면서 가짜 공포의 비상벨만 눌러왔습니다. 그릇된 시그널을 보냄으로써 기득권을 더 공고하게 가난한 자를 더 비참하게 했습니다. 기득권이 던져주는 서푼짜리 향응에 키득되면서 공포가 횡행하는 사회에서 공포 영화의 역할은 분명합니다. 현실을 안전한 것이양 오판하게 하는 것이죠 우리는 조금도 안전하지 않습니다......"(2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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