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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한 기대 (삶)/책과 삶

단 샐리어스의 하나님의 임재로 나아감 거룩한 예배(김운용교수)를 읽고 2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10.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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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기도로서의 예배

5장 찬양,감사,축복

예배를 위해 모이는 모임은 그것이 평일에 모이는 것이든 특별한 절기에 모이는 것이든, 그것이 단순한 것이든, 정교한 것이든, 평이한 것이든 화려한 것이든지 간에 미래를 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의 모습은 공동체적인 것이라 하겠다.

모든 에배는 미래를 가득 담고 있다. 모든 예배는 미래를 담고있지 않은 것에 대해서 저항의 형태를 취하는데, 희망없고 무정하며, 불의하며, 믿음없는 세상을 향해 저항하는 형태를 취한다고 말할수 있다. 그래서 성경의 끝부분 (계22:20)에 기록된 가장 오래된 예배기도문 “주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는 우리의 시작이 된다. 만약 기독교 예배가 이세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을 통해 주님의 계속적인 기도가 될수있다면 모든 인간의 약점 복잡성 우리의 가장 원초적인 욕구는 단지 우리인간의 존재의 근원이시고 장점이신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것으로 돌아가게 된다.

우리 모두는 성령님과의 교통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그분과 함께, 그분을 통해 찬양과 감사를 드리기 위해 존재한다.

6장 성령님의 초대와 탄원

우리의 찬양과 감사가 가지는 상호 연관성을 탐구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신비와 인간이 가지는 공동의 특성으로 동시에 더 깊이 들어가게 된다. 하나님을 알게 되면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올려드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중의 여정은 준비되어야 하고 학습되어야 하며 도움을 필요로 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어떻게 삶의 자리에서 고통이 존재하지 않을수 있을까? 하나님을 아는 것과 예배드림의 사이에 공존하는 하나님의 부재에 대한 인식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존재해야 하는가? 이에대해서 예전의 기초로 저자는 우리를 인도한다.

“예배를 드리고 나아가는 삶의 자리가 아주 극심한 고통으로 얼룩져있기 때문에 드리는 기도이든지, 혹은 지금 잘 갖추어진 예배의 순서를 따라 그가 드리는 기도이든지 간에 기도한다는 것은 복합적인 희망의 행위이다. 이러한 점에서 바르트가 기도는 그자체로 인간 영혼가운데 일어나는 영광스럽게 만들어주는 갈망일 뿐만 아니라 영광스럽게 만들어주는 인식이라고 주장한 것은 옳은이야기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약속을 받은 우리들의 반응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예배를 통해서 경험하는 것은 과연 하나님은 어떤분이신가에 대한 약속이다. 이것은 자동적인 임재를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성만찬의 기도에서 우리가 경험하듯 성만찬의 기도의 중심에는 담대함과 과묵함이 존재한다. 저자에 의하면

“모든 것을 지으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행위에는 담대함이 있다. 이것은 액면 그대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나아가는 행위이다.”

다시말해서 이러한 침묵과 과묵서은 하나님을 초대함의 토양이되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그것의 열매가 된다. 성령의 초대의 기도가운데 날마다 새롭게들어가지 못한다면 우리의 기도는 하늘에 상달되지 못하는 메마른 기도가 되고말 것이다.

 

7장 탄식는 것과 고백하는 것: 신실한 기도

기독교의 예배는 그 처음과 나중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축을 드리며 감사를 드리는 일이다. 그것은 세상을 위해 하나님 자신을 내어 놓으신 자기 드림에 대한 감사와 찬양을 드림을 통해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이다. 때로는 이것은 모든 창조의 우천이신 바로 그분을 향하여 최고의 찬양을 올려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기도의 양태는 우리의 삶의 경험가운데서 신실함과 정직성을 시험하는 형태로 주어져야 한다. 이러한 시험을 통한 연단의 도가니는 탄식과 죄의 고백 가운데서 조성된다. 탄식은 모든 감사와 희망,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고백하는 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가장 진실한 차원으로 나아가게 한다.

저자는 시편에 나타나는 여러 탄식기도의 예들을 통하여 진실하게 예배하는 것이란 한나을 명확하게 진실하게 대면한다는 것임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우리가 악과 고통 그리고 우리들이 안고있는 복잡한 문제들에 직면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맹목적인 우상숭배가 될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안에서 그리고 그분을 통해 그분의 이름으로 계속해서 기도를 드린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드리는 기독교 예배생활의 영역은 우리로 그냥 그렇게 살도록 하지 않을 것이다.

 

8장 중보사역: 하나님앞에서 세상을 기억함

세상을 바라보며 드리는 탄식이 없다면 우리의 감사와 탄원은 모두 침몰하고 말 것이다. 메츠의 용어를 빌리자면 감사를 드리는 것은 쉽게 “우리 실체에 대해 공치사를 하면서 정말 있어야 할 것을 회피하는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의 고통과 찢김 때문에 터져 나오는 탄식은 우리 자신과 우리가 안고있는 복잡성에 대한 진실에 직면하고 언급하는 것을 동반해야 한다. 우리는 탄식하고 통탄해 할 수밖에 없는 악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고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의 고통을 위해 중보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행위 그 자체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회적 정치적 힘이 작용하는 이 세상에서 함께 연대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기도하는 사람들과 함께 전념하여 중보하는 것이 기도의 행위이다. 이와 같이 예배가운데 드리는 중보기도는 세상을 향한 연민을 훈련하는 장이된다.

또한 그리스도의 삶은 역동적인 기도와 기도를 통한 행동으로 채워진 생애였다. 즉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사랑과 복종을 통한 계혹적인 자기드림의 삶이었다.

이것은 우리의 기도가 어떠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 느끼도록한다. 우리의 삶의 예배는 과연 고통받는 사람들과 연대감을 가지고 사는 것을 배우는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가?

이렇게 기도와 행위사이의 철저한 동일시 없이는 온전한 예배란 있을수 없다. 죄악된 세상을 돌아보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약속을 돌아보는 기회를 만들어 준다. 또한 우리로 하여금 악과 불의 가운데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서 경험하게 되는 혼돈스러움을 고백하도록 인도해준다.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삶의 실제가운데서 기도하고 저앙하며너 갖게되는 진실성은 우리로 하여금 온세상을 위해 중보하도록 만들어 준다.


거룩한예배임재와영광에로나아감
카테고리 종교 > 기독교(개신교) > 기도/설교/전도 > 예배
지은이 단 샐리어즈 (WPA,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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