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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든지 죽든지 (신학)/교회사

길선주 목사와 3.1 운동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18.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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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선주목사와 3.1운동-

길선주 목사와 그의 민족운동에 대해 짧게 정리하여 남겨본다.

길선주 목사는 3.1 독립선언서에 인장을 맡겨 민족대표로서 서명을 하였다. 그러나 사경회등으로 3.1운동의 태화관 독립선언식 모임에 참석하지 못해 비판을 받은 글들과 자료들을 본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길선주 목사는 이후 자진하여 투옥이 되었고 또한 아들 길진형이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심한 고문뒤에 죽은 사실들은 그가 민족대표로서 자질이 충분하다라는 것을 입증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러한 사실들이 아쉽게도 묵인된 것은 한국교회 후손들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1. 길선주 목사의 애국심 그리고 애주심

길선주 목사의 대부흥운동 기간 전후의 그의 삶의 여정을 보면, 위국 기도를 통한 국권회복의 강한 소망이 있었으며 나라사랑(애국심)과 주님사랑(애주심)이 분리될수 없음을 확인할수 있다.
길선주 목사를 비롯한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참가자들에 의해 한국교회가 정교분리주의와 비정치화로 편향되었다고 매도되서는 안된다.

2. 위국기도회와 국권회복을 향한 소망

길선주목사는 일제를 향한 의병운동이 구국의 해답이라고 보지않았다. 그는 오히려 평화주의적인 위국기도회를 시작했다. 그 결과 한국교회 사방에서 나라를 위한 기도가 불일 듯 일어나기 시작했고, 그해 11월 을사늑약이 발표되자 상동교회에서 수천명이 모여 연일 기도회가 일어났다. 길선주목사를 중심으로 일어난 위국기도회는 당시 국권회복을 향한 강력한 소망을 표현한 것이며 민족운동이었다.

3. 길선주 목사의 민족운동

길선주 목사는 독립청원의 뜻으로 3.1 독립선언서에 인장을 맡겨 서명했으나, 부흥회를 인도하느라 3.1 태화관 선언식에 참여하지 못했다. 동지들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진 출두하여 1년간 8개월간 미결수로 재판을 받고 무죄석방된일이 있었다. 게다가 장남 길진형이 105인 사건으로 인해 심한 고문뒤에 1918년에 죽게 된다. 이러한 사실들은 그가 민족대표로서 자질이 충분하다라는 것을 입증한다.

4. 길선주목사의 민족의식과 말세론

1919년 이후에 그의 종말론이 두드러지게 형성되는데, 감옥에 투옥되면서 요한계시록을 수차례 정독한이후에 1920-30년에 걸쳐 독특한 말세론이 형성하게 된다. 대부분이 길선주 목사가 1920년 이후에 시한부 종말론에 빠진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이땅에 이루어질 평화와 자유의 세계인 ‘말세삼계설’을 가르쳤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길선주 목사는 우리가 모두 애국심과 애주심으로 함께 달려갈 때 또한 모세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므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이 일제로부터 우리 민족을 구원하고 국권을 회복시켜 주실것으로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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