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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든지 죽든지 (신학)/교회사

Mark A.Noll의 복음주의 역사시리즈 1: 복음주의 발흥을 읽고.....2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15.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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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대륙의 경건주의

17세기 행로에서 독일어 사용국가들은 신앙생활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는 것을 목격했다. 루터파와 개혁파 내부에 강경 개신교 정통파가 생겼으며 교리적 정확도를 꼼꼼히 챙기는 특징이 있다. 이들중에 주요한 인물이 요한 아른트(Johann Arndt) 독일 북부 브룬스윅의 루터파 목사인 그는 17세기 초 여러권으로 이루어진 호소력있는 제목의 참된기독교(on True Christianity,1605-1610)을 내놓았다. 경건주의 운동은 여타 운동들과 영어 사용국가에 일어난 미래의 복음주의 대각성에 중요한 동기가 된다.

1675년 요한 아른트 의 설교집에 장문의 서문이 덧붙여져 출간한 사건이 가시화된 운동으로 경건주의의 시작이라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바로 필립 야콥 슈페너(Phillip Jakob Spener)가 이 중요한 서문의 저자다. 우리가 바라는 경건(Pia Desideria)이라는 제목으로 독립되어 출판되었다.

슈페너의 영향으로 조직의 천재인 아우구스크 헤르만 프랑케 (August Hermann Francke,1663-1727)가있다. 1694년 할레 대학 설립 대규모 경건서적과 영적 서적 출간 유럽에서 가장큰 고아원 설립,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파송이 이들의 활동이었다. 또한 활동 기금 마련의 한방도로 의약품 제조와 배포의 효과적인 개발도 들어있었다.

슈페너를 통해 경건주의에 헌신한 신비주의 역사가 고트프리드 아놀드(Gottfried Arnold 1666-1714)는 호기심으로 널리 읽힌 교회와 이단에 관한 편견없는 역사(Impartial History of Churches Heretics,1699-1700)로 자기 방향성을 모색해 나갔다.
경건주의의 영향력은 곧바로 독일의 나서부 뷔르템베르크에도 미치게 되었다. 몇 년만에 성경학자인 요하네스 알프레히트 벵엘(Johannes Albrecht Bengel 1687-1752)dl 신약문서 비평과 주석연구를 시작했다.

1722년 프랑케의 제자인 작센의 니콜라스 루드비히 폰 진젠도르프(Nicholas Ludwig von Zinzendorf) 백작이 실레지아에서 망명온 소규모 그룹에 피난처를 제공했다. 젊은 진젠도르프는 작센 남동부에 실질적인 영지를 얻자마자 가톨릭 당국의 억압으로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서 추방당한 피난민을 위한 장소를 마련했다. 이들은 후스파 교회의 후예로 형제단 즉 모라이바파 교인들이었다. 진젠도르프는 프랑케로부터 배운 자신의 경건주의 루터파 신앙과 모라비아 교도들이 고향에서 가져온 부흥신앙이 결합되어 새로운 신앙운동이 자기 영지인 헤른후트(Herrnhut)가 형성되는 것을 앞서서 볼 수있었다.

향후 영미 복음주의의 주요 인물인 길버트 테넌트, 조나단 에드워즈, 존웨슬리는 개인적 또는 서신연락을 통해 경건주의자들과 접촉하고 있었다. 1746년 존 웨슬 리가 감리교 순회설교자들을 위해 기독교 선집을 시작할 때 첫 시리즈가 아른트의 참된 기독교를 요약한 것이다. 나중에 웨슬리의 신약노트도 대게 벵엘의 주석을 요약한 것이다.

경건주의자들의 거룩성 추구가 개인 성경공부를 통해서 인정받고 하나님의 사역을 내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라는 정의를 받게되면서 영국과 식민지의 복음주의자들을 고무 시켜 경건주의 예배스타일과 설교, 자발적 조직을 모방하게 만들었다. 경건주의자들이 고아와 노예 공동체 내의 특수그룹과 한번도 복음을 듣지못한 사람들을 위해 조직한 선행의 실천 사례는 18세기 영미 복음주의자들이 행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실천 작업 대부분에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4. 고교회 영성


놀은 복음주의에 선행한 세 번째 중요 흐름의 출처는 고교회파 잉글랜드 국교회(Hight Church Anglicans). 잉글랜드 국교회 내 고교회파는 1740년 이전 두세대에 걸쳐 큰 손상을 입었다. 추방된 군주인 제임스 2세의 후예에게 왕위를 찾아주려고 시도한 야곱파와 연루되면서 고교회파의 운명은 바닥으로 전락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런던과 많은 지역교구에 고교회파가 살아남는데, 이에 대해서는 윌리엄 케이브(William Cave)와 에쏘니 호넥(Anthony Horneck)등이 초교회의 성도들의 믿음과 삶의 모방, 자아를 위한 금욕적 실천 ,사회에 대한 거룩한 규율, 교회성례예식의 정기적 참여라는 이상이 드러났다.
존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의 부모인 새무얼 웨슬리(Samuel Wesley)와 수재나 웨슬리(Susannah Wesley)도 고교회의 사도적 고대성을 열렬히 지지했다. 고교회의 영성은 기독교의 고대성이라는 이상의 추구와 초대교회의 모델로서 사도행전을 강조하였고 복음주의의 탄생에 있어 초대주의자들의 노력은 고교회가 남긴 중요한 유산이라고 할수 있다.

당시 잉글랜드 국교회에는 특별한 목적을 수행하는 두기구가 있었는데. 잉글랜드 국교회의 사회적 관점의 확장인 셈이다. 기독교지식 진행회(SPCK, Society for Promotin Christian Knowledge 1698창설)는 성경과 기독교 서적을 배포하고 잉글랜드와 웨일즈 기타 식민지에 자선학교를 설립하였다. 해외복음전도회(SPG, 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 on Foreign Parts,1701)는 해외의 잉글랜드 국교회 예배를 관장하고 군주의 범위안에 있느 불신자의 복음화라는 목표를 가졌다. 이 두기구 모두 지역 종교협회를 통해 잘성장한 고교회 행동주의를 확대시켰다. 그리고 복음주의자들에게 다양한 기독교적 봉사를 모색할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5. 합류점


1720년대 말 옥스퍼드와 헤른후트 사이에서 서로 연결되지 않은 두가지 사건이 일어난다. 1728-9년사이에 옥스퍼드 대학 당국은 이신론의 위험성에 관한 공식 경고를 발하고 있었다. 이시기에 찰스 웨슬리는 크라이트 처치(Christ Church)의 학부생이었다. 이들은 기도, 영적 독서, 자기성찰 불우한 이웃을 위한 선행을 목적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옥스퍼드안에서 고교회파 색채를 드러내며 협회조직이 견고해진다. 그래서 많은 청교도와 경건주의 책들이 출간되었다.

작센의 헤른푸트에서는 근대 모라비아 운동이 태동된다. 모라비안들이 개인의 영적여정을 일기와 편지로 기록하기 시작하였고, 개인의영성을 드러내었다.

 

 

6. 시작

 

웨일즈 내부에서 젊고 열정적인 잉글랜드 국교회 목사 그리피스 존스(Griffice Jones)가 목회를 하고 있었다. 존스는 지방의 문법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1716년 남부 웨일즈 카마덴셔(Carmarthenshire)에 있는 쌍도우로르(Llanddowror)교구의 잉글랜드 목사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731년 순회학교가 설립됨으로서 웨일즈어 교육이 공식화되었다. 이학교는 교사들이 교구에서 교구로 이동하면서 가르쳤다. 순회학교가 웨일즈에서 가장 잘 진행되었기 때문에 후에 감리교가 이 지역에서 가장 빨리 전파되는 요인이 되었다.

뉴잉글랜드 내부에서는 1712년에 솔로몬 스토다드(Solomon Stoddard)가 영혼의 추수사건이 일어난다 대체로 마이클 크로포드(Michael Crawford)는 뉴잉글랜드의 추수에 대해 최소 열다섯개 이상의 기록을 발견했는데 1712~32년사이 코네티컷 강 주변마을에 집중되어 있었다고 밝힌다. 1920년대 초 네덜란드 정착지의 목사로 테오도르 프렐링하이젠(Theodore Frelinghuysen)이 부임한다. 그는 회심메세지를 설교하면서 회중을 소그룹공부와 기도모임으로 재편, 공개적이며 즉흥적인 기도를 하게 했다. 1727년 길버트 테넌트(Gilbert Tennent)는 뉴브룬스웍(New Brunswick)장로교회의 목사직을 맡자마자 프렐링하우젠식의 경건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잘츠브르크(Salzburg)시 및 근교에서 대규모 개신교 추방사건이 일어났다. 이지역은 가톨릭의 통제를 받고 있었지만 개신교들은 재정적으로 기여할 힘이 있어 관용을 누릴수 있었다. 따라서 개신교 추방사건은 국제적 이해관계에 맞물린 충격적인 사건이라고 할수있었다. 1720년대는 활동적 경건주의자들이 마을과 시골을 순회방문하였다. 1731년초 광부들이 이웃사람들에게 복음전하기 시작한다. 173111월 대주교는 지역내 개신교들에게 지역을 벗어나는데 겨우 8일간의 말미를 주었다. 그 다음주 이만 오천명의 개신교가 행진을 시작한다. 많은 사람들이 북쪽 먼지방인 프러시아로 향했고 네덜란드와 잉글랜드나 개신교 국가로 떠나야했다. 잘츠부르크 사람들의 곤경은 북유럽 대중매체에 즉각적인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그리고 존 웨슬리, 조지 휫필드, 조나단 에드워즈는 잘츠부르크 피난민에게 영향받은 일부의 복음주의자일 뿐이다.

젊은 옥스퍼드 대학생인 조지 휫필드는 1732-33년 찰스웨슬리를 만난다. 웨슬리는 경건주의 지도자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 그리고 헨리스쿠갈의 책들을 읽었다. 윌리엄 로(William Law)의 책을 xd해서 회심사례가 경험하였고 1740년대 회심경험이야 말로 보다 형태를 갖춘 복음주의 운동의 심장이었다. 그러나 회심에 대한 확신 여부를 둘러싼 고뇌에 찬 혼란과 회심과정에서 하나님과 인간 각자의 역할을 둘러싼 신학적 논쟁이 벌어지기도했다. 1717년 길버트 테넌트는 자신을 율법적 표준에 달아볼 때 자기는 도덕적 실패자라는 정죄감이 심해지기 시작하였다. 1723년 그는 그리스도안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총의 뜻을 깨닫고 미국으로 이민오게 되었다. 그리고 플레링하우젠의 경건주의에 관심을 갖게 된것도 이 회심경험때문이었다. 그렇게 길버트 테넌트가 회심을 확장시키던 1721년 뉴잉글랜드 젊은이 한명이 극적인 심격변화를 겪고 있었다. 조나단 에드워즈였다.
변화가 널리 전해졌다. 복음을 통해 더 많은 개인이 깊은 영향을 받기 시작하였고 그 사람들끼리 서로 연결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부흥이 찾아왔다.

 

정리하면,

 

지금까지는 복음주의 운동의 배경으로서 세가지를 다루었다. 그리고 아주 주도면밀하게 회심의 경험과 경건주의자들의 서적이 교류되면서 하나의 연합이 생겨나고 개개인이 깊이 영향을 받기 시작하면서 서로 연결되기 시작하였고 부흥이 임하였다고 하였다.

놀은 3장에 이르러 1734-1738년의 부흥의 시기에 대해서 적어가고 있다.

 

필자도 대학원 Th.m때 미국교회사 수업시간에 제출한 기말페이퍼 소논문에 "영국 청교도 경건주의가 미국 부흥운동에 미친 영향"에 대한 글을 쓴적 있다. 부흥운동에 있어서 청교도 경건주의의 영향은 지대했다. 놀은 보다더 섬세하게 그들의 서적들과 사상에 대한 분석을 함께하여 책을 읽는데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더나아가 한국 복음주의 운동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 과연 한국의 복음주의는 어떤 영향에의해 형성되었는가 말이다. 한국복음주의는 사상과 신학적 흐름보단 정치적인 색깔이 더욱 성격을 견고하게 한것같다는 생각도 해본다. 예를 들어 일제시대를 겪은 시점에 1800년대와 1900년대 초반에 보수적인 선교사들의 입국 미국의 근본적인 신학 그리고 해방이후 미군정시기의 친미적이며 반공주의적인 색깔에 의해 형성된 개신교, 1960~70년대 유신시대 친정부적 성향과 동시에 성장중심의 부흥신학이 가져온 민족복음화 운동 이러한 배경으로 살펴볼수 있지 않을까.

 

신학적이며 사상에 의한 형성보다는 정치적이며 이데올로기적인 영향을 통해 형성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물론 한국내 복음주의도 규정을 내리기 쉽지는 않다. 가령 개신교의 한 인물을 놓고서도 복음주의자인지 의견이 분분하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교회에도 복음주의가 어느정도 성숙하게 되는 과정에서 형태와 틀을 통해 개념을 규정하고 보다 객관적이며 학문적 연구가 나와야 할것같다.

 

하여간 다음 3장으로 이어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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