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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든지 죽든지 (신학)/교회사

Mark A.Noll의 복음주의 역사시리즈 1: 복음주의 발흥을 읽고.....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15.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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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m을 졸업하고 한 순간에 뭔가 바보가 되어가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었다.

처음 내가 공부를 시작하고 역사신학에 열정을 가졌던 것은 다름아니라 "복음주의"때문이었다.

 

여전히 복음주의에 대한 정의를 내릴수 없는 형편이고 복음주의를 어떤 조직이나 틀로서 규정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현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세계 기독교와 한국사회에서 복음주의에 대한 영향은 지대하다고 볼수있다.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주의는 한국교회에 많은 부분에서 보수적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경건주의, 사회복음주의 등등으로 점차 영향력을 확대해가고 있는 상황이다.

 

든 한국의 복음주의를 깊이 이해하고 통찰하기 위해서는 세계복음주의를 지나칠수 없다. 우리가 받은 영향이 깊기 때문이다. 특별히 오늘 발췌하고 정리한 글은 영국 IVP가 기획을 시작하면서 미국 IVP에 협력을 요청하고 두 IVP의 협력 아래에 2003년 부터 출간한 복음주의 역사시리즈 이다. 관련해서는 이재근박사의 "세계복음주의 지형도"라는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글을 보면 좋겠다.

특별히 이재근박사의 "세계복음주의 지형도"라는 책은 2014년 현대기독연구원과 느헤미야 기독연구원 공동주최로 6월 17일부터 7월 22일까지 6주간 이루어진 '20세기 세계 복음주의 지형도 그리기' 강연을 토대로 집필된것을 책으로 낸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20세기 복음주의의 개념과 그 판도를 역사적 맥락을 통해서 살펴보고 있다. 어떻게 복음주의가 세계기독교의 형성의 중요한 흐름가운데로 들어가게되었는지 어떤 성격이며 역사적 상황과 맞물려있는지를 잘 살펴주고 있다. 복음주의의 훌륭한 개관서라고 생각한다. 물론 한국복음주의와 세계기독교와 관련해서 한국의 복음주의의 형성과 영향 그리고 세계 근현대 복음주의(WCC와 로잔언약등)에 의한 한국 복음주의의 형태와 개념에 대해서 궁금한 것도 있지만, 일단 오늘 잠깐 소개하려는 복음주의 역사시리즈를 읽기전까지는 뒤로 미루고자 한다.

 

오늘 잠깐 소개하고자 하는 부분은 "제2장 복음주의 과거의 사례와 시작"에 대한 부분이다.

(Noll)은 영국에는 복음주의 부흥으로 미국에는 대각성으로 알려진 대중의 경건성 고양이 희박한 공기속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고 하고 있다.

부흥의 시작은 옛날부터 존재하던 세가지 기독교 운동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형태가 갖추어 졌다고 본다.

 

즉 잉글랜드 청교도가 핵심적 지위를 점유한 국제 칼빈주의 네트워크 유럽 대륙의 경건주의 부흥 그리고 열성적 영성과 혁신적 조직을 갖춘 고교회파 잉글랜드 국교회 등이다. 한 편 종교개혁으로 시작된 거대한 종교적 변화의 구체적인 증거가 이 운동들이기도 했다. (p.61) 놀은 복음주의의 부흥운동은 국제 칼빈주의 네트워크, 경건주의 부흥, 고교회파 영성의 3가지 기독교의 운동에 의해 형태가 갖추어졌다고 본다. 그래서 그는 복음주의 운동의 영향을 역사적 맥락을 통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이책을 완전히 탐독한것은 아니지만, 마크 놀 이라는 학자에 대해서 진심으로 존경을 표한다. 그의 폭넓은 역사적이면서 지리적 문화적 배경지식과 함께 엄청난 자료들 특별히 복음주의자들을 일일이 열거하며 그들의 저서에 대한 특징들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너무황홀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이 작은 페이퍼는 그저 마크 놀의 책을 요약과 발췌 한것에 불과하다.

 

 

1. 폭넓은 유럽배경


1520년 개신교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150년동안 유럽은 신앙에 따라 변모했다. 17세기 중엽 1618년에서 48년까지 30년 전쟁동안 끔찍한 유혈사태 그리고 1640년에서 1660년까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에서 일어난 청교도 혁명은 공통의 유럽 통일된 유럽 모두를 포괄하는 유럽의 기독교 국가 연합이라는 오랜 이상에 치명타를 가했다 종교적 대의와 비종교적 대의 모두 변화를 촉진시켰기 때문에 곧이어 유럽사회에서 종교가 차지하는 지위 그리고 신앙적 삶의 실천 또한 변하기 시작했다.

놀은 새로운 신앙은 가슴의 종교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보다 개인적이며 경험적인 동시에 덜 형식적이며 덜 위계적인 기독교신앙의 사례들이 상존해 온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하였고 이런 사례들이 복음주의로 직접 연결된다고 하였다.(p.64)

 

 

2. 청교도와 국제 칼빈주의자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은 헨리8(henry 8, 1509-47)와 에드워드 6(Edwards 6, 1547-58) 통치시기에 시작되어 메리1(Mary 1, 1553-58) 치하에서 잠시 로마 가톨릭으로 회귀했다가 결국 엘리자베스 1(1558-1603년 통치 )에 의해 공고해졌다. 청교도들은 16세기 잉글랜드 역사의 일반 경로를 밟아가면서 이미 시작된 선한 과업을 완수하려면 열정적인 전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들은 경건서적들을 출판하였고, 이러한 청교도들의 출판서적은 복음주의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와 같은 신학자들에 의해 청교도운동이 지속되었다. 매사추세츠의 존 윈스럽(John Winthrop,1588-1649) 잉글랜들의 호국경인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eh durldp 포함된다. 그들의 공적 삶의 상당부분은 성경적 신앙으로의 회심과 진지한 헌신을 통해 만들어졌다. 청교도들은 또한 존코튼(John Cotton 1584-1652) 과 토마스 셰퍼드(Thomas Shepard, 1605-1649) 같은 은혜로운 설교자들의 인도를 받았다. 그들은 잉글랜드에서 경력을 시작했고 뉴잉글랜드로 이주한 청교도들의 영적지도자가 되었다.

청교도 정신은 기독교신앙을 더욱 개인적이며 더욱 내적인 실천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 기독교 국가 내부의 소속된 전통종교의 자리에 머물렀다. 사회개혁을 위한 강제적인 계획을 추진하게 되었다. 잉글랜드는 1658년 크롬웰이 사망하자 과거로 회귀하였다. 국가교회를 강화시켰다. 결국 1620년 비국교도 식민지 플리머스로 청교도의 뉴잉글랜드 이주가 시작되었다.
놀은 뉴잉글랜드에서 청교도 통치가 잉글랜드보다 더 오래갈수 있었던 것은 교회멤버십의 자격 요건에 있어 회심에 대한 초창기 스트레스를 완화시키려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1662년 중도 언약(The half- way covenant)은 일종의 타협책이라고 밝힌다.

북미교회 내부에는 형식주의의 발호와 재난과도 가은 살렘 마녀재판이 끝났음에도 국가교회의 신앙을 강요하는 국가권력의 위협이 가중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경험적인 기독교 신앙 또한 상당히 강한 흐름으로 살아남았다. 보스턴 올드노스 회중교회의 목사이자 다작가인 코튼마터(Cotton Mather 1663-1693)sms 십여권이 넘는 책을 통해 수많은 미래의 복음주의자들을 고무시킬 원칙을 반복적으로 강조했다. (회심, 성결, 자발적인 교제등등)

스코틀랜들의 상황은 정치사와 교회사 양측면에 걸친 몇가지 이유 때문에 잉글랜드 및 북미 식민지 상황과 구별되어야 한다. 17세기말과 18세기 초 독특한 복음주의 강조점을 고양시켰다. 예를들어 에든버러 남쪽 에트린의 토마스 보스턴(Thomas Boston 1676-1732)은 순결 본성 은총 그리고 영생이라는 4중적 상태와 관련된 주제로 영향력있는 설교자와 저자의 경력을 쌓았다. 보스턴의 영향으로 인해 영적 측면뿐아니라 스코틀랜드의 갈빈주의 장로교 내부의 깊은 개인적 경건의 흐름 또한 복음주의 대각성에 이르는 도상에 중요한 중간기지 역할을 했다.

1730년대 말 근대 복음주의가 등장했을 때 대영제국 전역에서 경험주의적 칼빈주의 전통은 있었다. 이때 이 칼빈주의자들을 묶는 네트워크가 등장한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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