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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성지순례 기행

[튀르키예 여행/ 성지순례 여행] 이스탄불/ 소피아 성당/ 동 서방 교회 분열의 역사, 그 한 가운데서....

by 바울과 함께 걸었네 2019.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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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소피아성당 에서....  


서론: 장소는 의미를 지닌다.

장소는 어떤 사건을 기억나게 한다. 장소는 현재의 위치를 발견하게 한다. 그리고 미래를 향해 가도록 한다. 장소는 미묘한 요소다.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장소와 만남을 갖는다는 것은 설레는 일이다. 성지순례 여정 초입에서 만난 장소는 바로 터키의 이스탄불이었다. 이스탄불은 만남, 공존 그리고 조화의 장소이다. 보스포로스 해협을 중심으로 동 서양이 만나는 지점이다. 과거 기독교 초기 교회의 흔적들과 현재 이슬람의 화려함이 공존하고 있는 곳이다. 동 로마 비잔틴제국의 영광과 오스만 터키제국의 웅장함이 미묘한 신비감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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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여행기를 토대로 성경의 배경과 교회사를 이해하고 인문 고전의 깊은 상상력까지 풍부하게 더할 수 있는 책이 나왔다. 역사신학을 전공한 함신주 목사가 코로나19로 세계 여행의 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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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의 최고의 명소는 단연 성(聖) 소피아 성당일것이다. 비잔틴 건축양식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현존하는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비잔틴 건축양식의 가장 큰 특징은 중앙에 돔을 얹은 형태이다. 높은 천정과 아치형의 돔의 건축양식은 웅장함을 가미할뿐아니라 그자체로 경외심을 불러일으킬만하다. 실제로 돔은 하늘이라는 개념을 상징화 시킨 공간이다. 그 공간은 거룩의 영역인 하늘과 세속의 영역인 땅이 통합(統合)되는 곳이다. 그렇게 성스러운 예배의 공간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지점이 된다.
그러나 모든 역사가 그렇듯 그곳은 처음부터 통합과 조화의 장소는 아니었다. 그곳은 사실 분열(分列)의 현장이요 상처의 현장이다. 교회사(敎會史)에서 분열은 역사의 판단 문제다. 어떤 분열은 부흥의 시기를 만들어냈다. 어떤 분열은 상처와 아픔을 낳았다. 역사가와 후대들이 그것을 어떻게 판단해내고 해석해 내느냐가 문제인것이다. 그런이유로 우리는 역사가 주는 교훈들과 기억들을 마주대해야 한다. 그곳에서 바른 판단과 해석이 나오기 때문이다.

 

본론:
1.
역사적 배경

터키는 동로마 비잔틴 동로마 제국의 영광을 가지고 있던 곳이다. 콘스탄티누스 1세(272- 337)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된다. 그후 324년 동로마 지역에 비잔티움(Byzantium, 비잔틴)을 건설하고 그곳을 새로운 로마 제국의 수도로 천도(遷都)하게 된다.

이곳이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동서 교역의 중심지인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이다. 이후 테오도시우스 1세(347~ 395)에 이르러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380)로 지정된다. 그리고 두 아들에 의해서 로마제국은 양분화 되는데, 동로마는 아르카디우스가 서로마는 호노리우스가 통치하게 된다. 이렇게 서방과 동방교회의 분열의 역사는 서로 다른 통치자와 문화로 부터 시작된다. 동로마 제국은 헬라어를 사용한다. 헬라어는 철학적이며 사색적인 특징을 가진다. 이런 특징은 고스란히 교회에 영향을 미쳤다. 당시 동로마 교회는 4대 교구(콘스탄티노플, 예루살렘,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로 이루어져 있었고 각 주교들은 동등한 위치에서 종교회의를 이끌었다.

이런 배경을 토대로 동로마 제국은 ‘신학의 발전’을 이루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70명의 학자가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Septuagint, LXX)이다. 반면 서로마가 사용하는 라틴어는 실용적이며 체계적인 특징이 있다. 라틴 문화권내에서 서로마는 신학의 발전 보다는 교회조직의 발전을 이뤄내는데 교황이 독재적 군주역활을 하였다.

 

2. 동 서방 교회 분열, 4가지 원인
1) 필리오케(Filióque, 'and the Son 그리고 아들')

( 성소피아 성당의 모자이크  ‘ 데이시스 ( 간청 ,  기원 )’  그리스도께 간청하는 마리아와 세례요한 @ 함신주 )

분열의 역사를 다루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그 안에 논쟁이 있고, 해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열의 역사를 다루는 것은 중요하다. 현재를 직시하고 미래를 조망(眺望)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동 서방 분열의 역사의 중심에는 신학적 논쟁이 있다.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동방과 서방교회는 성자는 성부와 본질상 동등하다.” “성부로 부터 성령이 나온다.” 라고 결정하였다. 이를 니케아 신조라고 한다그런데 서방교회가 동방교회와 상의없이 성령은 성부 그리고 아들(필리오케 and Son)’ 로부터 나온다.”라고 한 문장을 삽입한다.

서방교회는 당시 이단사상들로부터 삼위일체 교리를 확립하기 위해서 아들로부터라는 단어를 넣은 것이었다. 문제는 동방교회와 아무런 상의도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동서방 교회 충돌을 불러오게 된다. 게다가 로마 교황이 동방교회로부터 교황의 사도의 계승권과 서방교회의 우위권을 인정해주면 이 단어를 빼겠다고 절충안을 내놓는다. 그러나 동방교회는 이를 거부하게 된다.  

2) 성상숭배 논쟁

( 그리스의 한 수도원에서 프레스코 벽화  @ 함신주 )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그리스 정교회와 터키안에 존재하는 교회의 유물들을 마주대할때면 늘 거리끼는 문화가 바로 성상일 것이다. 성상숭배는 신비주의의 기초가 되는 신플라톤주의가 배경이 된다. 신플라톤주의는 이 세계엔 눈에 보이는 현상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은 이데아 세계가 있다고 믿는다. 이런 사상은 교회안에 깊이 스며들었다. 성상숭배는 눈에 보이는 성상에 보이지 않는 신성한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그것을 믿는자들에게 은혜가 전달 된다고 믿는 것이다.

비잔티움 황제인 레온 3세(685~741)는 미신적 성상숭배를 격렬하게 반대한다. 이는 결국 서로마 교회에 반발을 사게 된다. 당시 서로마 교회는 성상과 이콘을 선교의 주요 도구로 삼았으며, 글을 모르는 이들을 위한 교육의 차원으로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동 서방 교회의 성상숭배 논쟁은 더욱 심화되고 분열의 주요 원인이 된다.
3) 교권 다툼.

 

(정교회의 상징 안드레와 로마 가톨릭의 상징 베드로, 교권다툼으로 인해 형제사이는 갈라지게 되었다. 사진은 1964년 정교회가 화해의 뜻으로 선물한 이콘)  

1052년 동로마 제국은 노르만족에게 침략을 받는다. 이에 동로마 제국은 서로마 교황 레오 9세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이에 교황 레오 9세는 교황의 우위권을 인정해주면 도와주겠다고 제안을 하게 된다. 그러나 결국 노르만족에게 패배를 하게 된다. 그런데 서로마 제국은 동방교회의 전통을 따르던 이탈리아 반도 남부를 서방교회 전통으로 바꿔버린다. 격분한 동로마는 서방전통의 수도원들을 폐쇄조치를 내리게 되고 동서 갈등과 논쟁이 시작이 된다.

결국 1054년 7월 16일 성 소피아성당에서 동방교회가 예배를 드리고 있는 중에 서로마 교황청에서 파송한 훔베르트 감독이 “하나님께서 보시고 너희를 심판하실거다!!” 라고 하며 교황의 파문장을 놓고 가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로써 동방과 서방교회는 완전히 나뉘어지게 된다.
4) 4차 십자군 전쟁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보스포러스 해협에서 바라본  블루모스크 사원 @함신주)  

1202년 10월 8일 이노센트 3세는 제 4차 십자군 원정대를 모집하게 된다. 베네치아에서 운집을 하기로 하였으나 사람들이 오지 않았다. 배 삯을 지불할 형편도 되지 못하다가 베네치아 공화국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베네치아에서는 배삯을 댓가로 헝가리령의 자라(ZARA)를 탈취해줄 것을 요구한다. 결국 이들은 자라를 탈취하게 되고 이에 이노센트는 격분하게 되어 십자군을 파문하기에 이른다. 배삯을 마련한 십자군은 전력을 다시 재정비 하게 된다.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알렉시우스 3세의 폭정이 절정에 다를 무렵 망명 황태자 알렉시우스 앙겔루스 가 자신의 아버지 이사키우스 2세의 제위를 되찾기 위해 십자군의 대표 보나파치오 에게 찾아가 몇 가지 제안을 하게 된다. 그 제안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이집트 정복을 위한 병사 1만 명 기사 500명을 제공하겠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을 서로마 교회의 관할로 주겠다.” 결국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로 향하게 되고 두 차례의 공격끝에 함락하게 된다. 동 서방 교회 완전히 분열하게 되고 결국 1453년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비잔티움 (동로마)는 멸망하게 된다. 이후로 서방은 로마 가톨릭교회로 그리고 동방은 그리스 정교회(러시아정교회)로 나뉘어지게 된다. 무엇보다 가장 가슴이 아픈것은 찬란한 교회의 역사와 유산을 이슬람에게 내주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론: 장소는 의미를 지닌다.장소는 의미를 지닌다.

터키 이스탄불은 옛 동로마 비잔틴제국의 영광이 있던 장소다.
인간이 욕망이 가득 넘쳤던 곳이며,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형제간에 상처와 분열의 장소이다. 그 장소는 말없이 그 곳에 있다. 우리에게 그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라고 그곳에 있다. 지금은 박물관과 기념장소가 되었다. 박물관과 기념장소는 기억에 생명을 부여하는 곳이다. 그곳에서 우리의 기억은 되살아난다.
상처와 분열과 아픔의 의미를 되살려 우리에게 교훈한다. 되풀이하지 말라고 한다. 우리가 역사를 바로 이해하고 기억의 좋은 도구로 삼을 때 그 역사는 우리의 발걸음을 지탱해주며 끝까지 걷게 동력을 부여한다.
이 귀한 장소에서 잠시 하나님나라를 묵상한다. 기억해내고 떠올려낸다. 신앙도 역시 기억 하는 것이라 하지 않았는가 무엇을 기억해야 할까?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러한 분열과 상처와 아픔의 장소가 존재한다.
우리는 우리의 후손들에게 무엇을 기념비로 남길것인가.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러한 분열과 상처와 아픔의 장소가 존재한다   우리는 우리의 후손들에게 무엇을 기념비로 남길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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