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소영, 『우리의 사랑이 의롭기 위하여』
서정민, 『겨레사랑 성서사랑 김교신선생』
양현혜, "김교신의 '전적기독교' 신앙과 그의 기독교 사상" 세 권의 책에 대한 종합서평 (각주 생략, 참고문헌 참고)
김교신과 무교회주의에 대해서
Ⅰ. 서론
1. 연구동기와 책 소개
한국교회가 점차 힘을 잃어가는 것 같고, 그간 교회 성장주의가 주는 두려움과 불안함, 세속화되어 가는 교회의 현실적 문제 앞에서 미래에 대한 좌절과 낙심마저 들게 하는것 같다. 이런 시점에 우리는 존재의 이유와 정체성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게 되는 것같다 그래서인지 한국교회가 점차 해가 가면서 스스로가 한국교회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진정한 기독교란 무엇인지를 질문하기 시작하는 것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대학원에서 한 학기동안 한국교회사 과목을 수강하면서 필자 역시 끊임없이 들었던 고민도 그런 것이었다. 가장 한국적인 기독교는 무엇일까? 한국교회는 단기간 엄청난 성장을 보인 교회이며 세계의 교회가 오늘날 한국교회에 거는 기대가 크다는 사실을 늘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갖는 우리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이런 고민속에 '조선산 기독교'라는 말은 굉장히 흥미로운 주제였다.
김교신의 무교회주의에 대해서는 이미 들은바 있었지만, 그것을 설명해 보라한다면, 고작 교회가 없는 교회의 제도권을 반대하는 성도들이 모인 모임 정도로만 대답할수 있었다. 그런데 한가지 드는 의문은 그렇다면 그것이 정말 한국적인 기독교란 말인가?
그래서 서점에 가서 책을 두권 골랐다. 백소영의 "우리 사랑이 의롭기 위하여" 와 서정민의 "겨레사랑 성서사랑 김교신 선생"이라는 책이고 두 권의 책이 전기와 무교회에 대한 소개의 글 정도로만 여겨져 용어 정의와 체계적인 연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양현혜의 "김교신의 '전적기독교' 신앙과 그의 기독교 사상"라는 아티클을 골라 전체적으로 읽어 보았다.
서정민의 책은 신앙전기와 같은 형식으로 써내려갔으며, 시대적 배경 김교신의 일차자료들을 잘 정리해 준 느낌이었다. 그는 교사와 종교인의 두 관점으로 김교신을 전체적으로 쭈욱 정리를 해주었다.
두 번째 책인 백소영의 글은 여성이 쓴 글 답게 조목조목 섬세하게 이야기하는 어투로 썼다. 특별히 김교신을 유교적 도덕적 교사로 소개하며, 그의 신앙관인 전적 기독교와 무교회주의를 함께 연결하여 한국적인 기독교를 '서당식 기독교'로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실제로 경험한 무교회와 그의 삶을 통해 진지한 도전을 주고 있다.
세 번째로 양현혜의 글은 김교신의 전적기독교가 무교회주의와 성서조선과 어떻게 연결을 시킬 수 있는지를 잘 써주셨고, 연구동향에 대해서 곳곳마다 잘 정리해 주었다.
본 서평자는 책을 한 권씩 요약정리 하기 보다는 기왕에 이렇게 좋은 시간을 갖게 된것 김교신과 무교회주의에 대한 세 저자의 의견들을 하나씩 정리해 나가려고 한다. 작은 소논문 형식이지만 조금은 가벼운 형태로 서평을 해나가고자 한다.
중간중간에 조선산 기독교, 한국산 기독교, 한국적 기독교 등등의 용어들이 자유롭게 쓰여지고 있어서 혼란을 주기 쉬운데, 저자의 표현을 그대로 쓰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Ⅱ.본론 (본문의 요약정리 및 연구)
1. 김교신 그는 누구인가?
2010년 8ㆍ15 광복절에 김교신(1901~1945)에게 건국 포장이 추서되었다. 그 동안 그의 수형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독립운동이 공적을 인정받지 못했었다. 그러나 2010년 일본인 검사 이시카와의 함흥 지역 3ㆍ1운동 수사 기록에서 김교신의 이름이 발견되어, 독립운동과 관련된 많은 기록을 모아온 유족들의 노력이 드디어 열매를 맺게 된 것이었다. 건국. 포장이 추서된 김교신은 그 유해가 북한의 함경남도에 있기 때문에 현충원에 묻히지 못하고, 유족들의 뜻에 따라 2011년 8월 30일에 대전 국립 현충원에 그 위패가 모셔지게 되었다. 개구리를 빗대 잠자는 민족을 깨워 희망의 싹을 돋아나게 하기 위해 「성서조선」1942년 3월호에 쓴 “조와(弔蛙)”가 문제가 되어 1년여간 수감되고, 이어서 함흥 질소 비료 공장에서 회사내의 발진티부스 환자를 밤을 새워 간호하던 중 병사한 후, 꼭 65년 만의 쾌거였다.
서정민 교수는 그의 『겨레사랑 성서 사랑 김교신선생』책에서 김교신을 이해하기위해서 몇가지 배경을 설명해준다. 먼저 교육자로서 김교신이다. 그는 고등학교 평교사로서 청년들을 가르쳤던 교육자였다. 그는 다른 근대 민족사의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격동과 수난의 시대를 살아야만 했고, 그러한 시대적인 어려움 속에서 나름대로 교육자의 사명을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인물이었다. 두 번째로 그는 종교인이었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삶을 살았다는 점이다. 기도와 성서연구를 통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민족을 향해 꺾이지 않는 희망을 제시하는 일에 온힘을 쏟았다.
백소영은 김교신은 유학자적 기독교 도덕 교사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는 철저히 그리스도인이었으며 평생을 유교의 선비적자세로 살았고, 평생을 한국인의 도덕적 영적 거듭남에 관심을 가지면서 교육을 통해 이루려 했던 교사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의 삶은 '무교회주의'라 불리우는 그의 기독교에서 드러난다. 그는 서양의 선교사들이 가져다 준 교회의 외형적인 모습이나 제도를 일단 거부하고 오직 순수한 한국인의 문화와 전통속에서 성서의 진리를 발견한다는 '한국적 기독교'의 뜻을 지닌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가 왜 무교회주의의 기독교를 지향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민경배 교수는, 1920년 유학중이었던 동경에서 노방전도에 의해 예수를 믿기로 결심하고 성결교회에서 세례를 받지만 그곳의 순박한 목사가 교인들의 궤술에 말려 쫓겨나는 모습에 비애를 느껴 그해 11월에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1861-1930)들어 갔다. 그리고 그는 우치무라의 신앙에 흠뻑 빠지게 된다.
2. 왜 '한국산(조선적) 기독교'를 '무교회주의'라고 하는가?
이 시점에서 서정민교수는 이 무교회주의를 '한국적 기독교'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우치무라의 무교회주의는 엄밀히 일본의 기독교 아닌가? 왜 그는 굳이 이 무교회주의를 '한국산 기독교'라고 하고 있는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양현혜는 조선을 구원할 기독교는 서양의 선교사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조선인의 심성안에서 직접 체득된 것이 아니면 안된다고 보았다고 밝히고 있다. 그래서 김교신은 '조선산 기독교'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였고 그가 자신의 신앙잡지를 '성서조선'이라고 명명한 부분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고 하였다.
백소영 역시 이를 한국적 형태의 기독교라 하였는데, 김교신의 기독교는 '서당식' 기독교였음을 밝히고 있다. '서당식' 무교회는 무조건 서양 것을 거부하는데 그치지 않고 나름으로 한국적 형태의 기독교 공동체를 시도했다고 보았다. 유교적 학자였던 김교신이 한국 사람들에게 가장 친숙하게 다가갔던 형태의 기독교 모임을 갖자하니 자연 이 서당의 형식을 취하게 되어다는 것이다. 즉 서당처럼 책을 읽고 강해하는 것이 중심이었고, 자발적인 모임이었으며, 조그마한 모임이었으며, 지역의 주민들과 삶을 나누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서당식 기독교는 삶과 종교가 한데 어우러지는 삶의 기독교 즉 흩어지는 교회라고 한다.
그러나 백소영의 '서당식 기독교'에 대해서 양현혜는 좀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양현혜는 백소영의 의견에 김교신이 조선산 기독교의 집회 형식을 ‘서당식’이라고 생각했는가 여부에 대해서도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하며, 그가 자신의 집회의 특징을 조선인들에게 익숙한 서당식 공부 방식에 비교해 설명한 점은 인정해야 하겠으나, 이것을 그가 자신의 독창적인 집회형식으로 고안 했다기 보다, 우치무라의 성서연구집회에 발단을 둔 무교회집회의 일반적인형식을 취한 것 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어째든 김교신의 ‘조선산 기독교’의 내용에 대해서 학자들 사이에 일정한 합의내용은, 대체적으로 조선의 정신문화의계승과 구체적 역사 현실에 대한 참여라는 점과, 이러한 조선산 기독교에서 유교의 영향력이 인정되고 그 기능이 긍정적이라고 평가되는 점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무교회주의가 한국산 기독교 내지는 조선적 기독교라고 하는가?
그것은 우치무라의 신앙과 관련이 있다. 우치무라의 성서중심주의는 '일본적 기독교'와 접맥되었다. 그에 의하면 복음과 신앙은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지역에 따라 고유한 옷을 입고 나타난다. 따라서 일본인은 유럽적 기독교나 미국적 기독교와 같은 서구적 기독교를 그대로 따를 것이 아니라 일본의 토양에 맞는 일본적 기독교를 창출해야한다. 그는 두 개의 J(Jesus와 Japan)를 사랑한다고 고백했는데 이는 진정한 기독교인은 자신의 민족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에 근거한 것이다.
김교신은 이러한 우치무라의 신앙에 매료된 듯 하다. 그는 1920년 무렵 성서연구와 기독교 운동에 몰두하고 있었는데, 기존교회에 상처를 입은 김교신은 우치무라 선생의 성서 강의 집회에 매번 참석하여 그의 신앙과 애국심에 큰 감동을 받게 된다. 이러한 우치무라의 독특한 기독교 사상과 자기 민족에 대한 참된 사랑은 그대로 김교신의 '한국적 기독교 운동과 민족 정신'으로 옮겨졌다. 그것이 바로 '성서조선' 이었다.
한국 무교회는 하나님과 조선을 사랑하는 모임이라고 하였다. 성서조선의 발간사를 보면, "아무런대도 너는 조선인이구나." "성서조선아, 너는 소위 기독자보다도 조선혼을 가진 조선사람에게 가라, 시골로 가라, 산촌으로 가라, 거기에 나무꾼 한 사람을 위로함으로 너의 사명을 삼으라"(전집 2:19-20)며 한민족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불태우고 있다. 그리고 이 성서조선은 한국사와 조선인들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실현하는데 귀히 쓰이는 적극적인 주체라고 믿었다.
양현혜는 이를 두고 기독교를 통해 자신의 주체성을 재구성하면서도 그것을 서구 근대적 주체와 구별하는 김교신의 식견은, 그가 기독교와 서구 근대 문명을 엄격히 준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서구 근대 문명의 주체성과는 다른기독교의 본래적 주체성을 가짐으로써 스스로를 조선의 독립이라는 사명을 담당할 주체로 정립하고 나아가 모든 조선인을 이러한 기독교인으로 만듦으로써 조선독립을 이루고자했다. 그의 교육활동도, 「성서조선」을 통한 ‘조선산 기독교’의 고취도 바로 이를 실천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성서조선』의 중요한 간행 목적의 하나는 한국 민족의 미래에 희망을 거는 일이었다. 그래서 성서와 민족을 하나로 연결시키고자 했다. '성서와 조선' 이라고 이름을 지어야 더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르는데, 성서와 조선사이에 '와'와 같은 글자, 곧 조사 하나마저도 허락할수 없을 만큼 그둘사이를 가깝게 해두고 싶었던 것이 이 잡지를 간행한 사람들의 소원이었다. 이러한 김교신의 나라사랑 정신은 그의 글 '성서와 조선의 이해에 잘 나타나 있다.
전인수는 그의 글에서 김교신은 자신의 글에서 ‘조선산’이라는 용어를 총3회, ‘조선산 기독교’ 라는 용어는 단 한 번만을 사용하고 있다. 그의 글에서 ‘조선산’ 이라는 단어는 1934년 처음 등장한다.
"세상에 삼용사(三勇士)라는 것이 있거니와, 이 삼용사라는 신어(新語)가 주조도 되기5-6년 전인 1927년 봄날에 조선산 ‘육용사’(六勇士)가 출현된 일이 있었다. 저들은 소유를 바치고 생명을 다하여서라도 반도의 영계를 폭격하지 않고는 마지않을 기세이었다. 부산으로부터 의주까지의 전도여행도 기도하였으나 가장구체적으로 여섯 어깨를 나란히하여 메고 돌격한 강력한 뇌관으로 출현한 것이「성서조선」이었다."
즉 조선에서 나온 기독교라는 의미로 '조선산 기독교'가 된것이다. 전인수는 계속해서 '조선산 기독교'란 김교신의 무교회주의만 고유한 명칭이 아니라 최태용의 복음주의 교회 역시 조선산 기독교라고 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그 특징은 무엇인가? 무엇이 조선산 기독교라고 할수 있는가?
그는 조선산 기독교의 특징을 네 가지로 정리하고 있는데, 첫째로 조선어를 사용하는 기독교 둘째로 조선에서 성장하는 기독교 셋째로 성서적 진리를 조선의 것으로 쉽게 표현하는 기독교 넷째로 조선식 성경공부를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고 정리하고 있다.
여기까지 정리하면, 김교신의 조선산 기독교에 대해서는 첫째, 우치무라의 신앙과 애국심에서 비롯된 독특한 '일본적 기독교'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다. 둘째, 조선산 기독교는 당시 유교적 선비였던 김교신으로 하여금 한국의 독특한 공동체인 서당의 문화를 그대로 사용하여 서당식 기독교로 토착화 시킨것이다. 셋째로 조선산 기독교는 조선어를 사용하고 조선에서 성장하고 조선의 것으로 쉽게 표현하며, 조선식 성경공부를 특징으로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산 기독교는 김교신에 의해 무교회주의와 성서조선의 발간으로 시작되었다.
3. 그렇다면 무교회주의란 무엇인가?
민경배교수는 김교신은 무교회주의자로 출발하여 그렇게 살다가 죽었기 때문에 그를 평가해야 마땅하다고 한다. 그가 그의 평생에 그렇게 살다가 죽었던 무교회주의란 무엇이었을까? 흔히 무교회주의 하면, 일단 교회 건물을 지양하는 공동체, 기존의 교회의 정치나 제도가 없는 공동체를 무교회주의라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일부 보수적인 교단의 경우 이단이나 분리주의자들이라고 비판을 하기도 한다. 무교회주의가 과연 김교신의 신앙의 어떤부분과 연결이 되었을까? 무교회주의가 갖는 정신은 무엇인가? 이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일단 '한국적기독교'인 무교회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전에 잠깐 시대적 배경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서정민 교수는 한국에 뿌리내린 기독교의 독특한 부분을 제시한다. 한국산 기독교의 시작은 민족기독교로서 역할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서양제국의 동양의 여러나라에 대한 정치적, 결제적 침략과 함께 선교되었다는 비판을 통해서 서양의 기독교 제국주의 국가로부터 대부분의 제3세계 지역 민족들은 기독교를 제국주의 종교로 여기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한국기독교는 비기독교 세력인 일제의 식민지의 위협으로 인해 오히려 서구 기독교는 민족교회로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조건 중에 하나였음을 밝히고 있다. 두 번째는 기독교는 민족의 편에 서서 민족수난에 함께한 민족교회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전래되고 수용된 과정이 남달랐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수용과정에서 서양 선교사들에 의한 것이기보다 한국인들 스스로에 의해 전도가 진행되었고 성경도 번역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리하여 기독교는 민족종교로서 민족의 어려움과 함께 하였다.기독교는 서양종교이지만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긴 시대에 민족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하는 운동에 있어서 중요한 바탕을 이룩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김교신은 기독교는 민족종교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성서조선을 발행하였고, 그의 무교회주의는 기독교 신앙을 통해 어두운 시대를 통해서도 한국 민족의 희망을 꿈꾸어온 사상이라고 평가한다. 그것은 제도와 교리의 문제가 아니라 민족의 현실과 미래의 차원의 문제로 여겼다. 그래서 오직 성서를 통해 순수한 기독교 신앙 그리고 신 앞의 단독자로서 참다운 신앙의 길을 찾을수 있다고 보았다. 서정민 교수는 이것에 전적 기독교라고 명명하지는 않았지만, 나중에 잠깐 살펴볼 전적 기독교의 정신을 보여준다. 이러한 전적 기독교 운동은 신앙 민족 기독교 운동으로 발전하게 된다고 평가하고 있다.
백소영은 네비어스 선교정책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네비어스 선교방식의 예양협정은 종교간의 교파분열에 앞장을 섰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서양의 선교사들과 한국목회자들 사이의 이권다툼 때문에 독립을 선언한 교회들도 등장하였고, 성결교와 복음교회의 최태용목사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이런 상황속에 무교회가 등장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양현혜는 김교신의 신앙에 들어가는 과정에서 영향을 소개하고 있다 김교신에게 기독교 신앙이란 철저히 신의사랑과 그것을 체득한 인간의 응답으로서의 믿음이라는 관계안에서 성립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렇게 기독교신앙을 신앙인의 밖에 있는 종교적 제도로서가 아니라‘ 신과사람 사이의 살아있는 관계성’ 안에서 본 것이 김교신의 기독교 이해의 첫 번째 특징이라 하겠다. 그래서 이를 그는 '전적 기독교' 라고 하는데, 그의 글을 보면,
“기독교의전도는 아름다운 언사나 문구로 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사실과 부활하신 주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되는 일이다. 특히 현대와 같이 기독교의 껍데기만 길가에 뒹구는 세대에 있어서 그러하다. 지금은 설교로 또는 소위문서 전도로써 복음을 증거할 시대가 아니요, 신도의 전 존재 그것으로써 입증해야 할 때를 당하였다.
백소영에 따르면 김교신의 '전적기독교'는 '반만 기독교' 이거나 '주일만 기독교' 익나 '때에 따라 기독교'가 아니라 존재와 삶이 '몽땅 기독교' 이고 '매일매일 기독교'라고 하는 것이다. 김교신의 '전적' 신앙은 초월적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영생의 삶을 '전적으로' 전하는 것을 의미했다.
김교신은 기독교신앙은 ‘전적기독교’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것은 신과인간의 살아있는 관계성, 의뢰적주체성, 직접성, 독립성, 실천성, 복음과예언의 공속성을분명히 하는 사회윤리와실천을 그 내용으로 하는것이었다. 이러한 ‘전적기독교’의 신앙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성서연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그는 보았다. 그 이유는, 그것이 초기 기독교의 신앙적 현실로 되돌아가 그리스도와 살아있는 만남을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무교회인은 성서를 통해 신앞에서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삶의 지침을 얻어 그것을 생활화해야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늘성서를 자신의 생활과의 결합속에서 읽고 성서연구를 통해날마다의 생활에 대한 신의임재와 인도를 만나 일상의 삶속에서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삶을 책임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김교신은 이러한 전적기독교를 지향하는 자유롭고 주체적인 개인이 모여 함께 예배하고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바로 교회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무교회였던 것이다.
백소영은 무교회 모임의 특징을 5가지로 소개하고 있다.
첫째 성서 본문 연구를 주로한다. 둘째 예배의식은 없다. 셋째 헌금을 하지 않는다. 넷째 성도간의 친교는 매주 성서집회와 매달 무교회 잡지를 중심으로 유지된다. 다섯째 매우 학자적인 모임이다. 보다 깊은 성서 연구를 위해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성서를 읽는다.
여기까지 세권의 책에서 제시한 무교회주의를 정리해 보면 무교회주의란, 첫째로 당시의 상황속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일제의 식민치하에서 기독교의 역할속에 민족주의 종교로 등장한 것이다. 둘째로 무교회주의란, 어두운 현실속에서 참다운 신앙으로 나아감을 위한 전적 기독교로서 등장한 것이다. 셋째로 무교회주의란 전적기독교를 지향하는 것으로 자유롭고 주체적인 개인이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함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Ⅲ. 결론
지금까지 내용들을 정리하면, 김교신은 먼저 교육자로서 김교신이다. 그는 고등학교 평교사로서 청년들을 가르쳤던 교육자이며 종교인이었다. 시대적인 어려움 속에서 나름대로 교육자의 사명을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인물이었으며,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는 유학자적 기독교 도덕교사였다. 한 가지 더 첨부하자면 민족적인 지도자였다. 성서조선을 통해서 민족에 희망을 주었다. 그중에 대표적인 글이 있다면 개구리의 죽음을 슬퍼한다는 뜻의 '조와(弔蛙)'이다.
조와(弔蛙) / 김교신
작년 늦은 가을 이래로 새로운 기도터가 생겼었다.
층암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가느다란 폭포 밑에 작은 담(潭)을 형성한 곳에
평탄한 반석 하나 담 속에 솟아나서
한 사람이 꿇어앉아서 기도하기에는 천성 (天成)의 성전 (聖殿)이다.
이 반상(磐上)에서 혹은 가늘게 혹은 크게 기구하며
또한 찬송하고 보면, 전후좌우로 엉금엉금 기어오는 것은
담 속에서 암색(岩色)에 적응하여 보호색을 이룬 개구리들이다.
산중에 대변사(大變事)나 생겼다는 표정으로
신래(新來)의 객(客)에 접근하는 친구 와군(蛙君)들, 때로는 5,6마리, 때로는 7,8마리.
늦은 가을도 지나서, 담상에 엷은 얼음이 붙기 시작함에 따라서
와군들의 기동이 일복일(日復日) 완만하여지다가,
나중에 두꺼운 얼음이 투명을 가리운 후로는
기도와 찬송의 음파가 저들의 이막(耳膜)에 닿는지 안 닿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이렇게 격조(隔阻)하기 무릇 수개월 여!
봄 비 쏟아지던 날 새벽 이 바위틈의 빙괴(氷塊)도 드디어 풀리는 날이 왔다.
오래간만에 친구 와군들의 안부를 살피고자 담 속을 구부려 찾았더니,
오호라, 개구리의 시체 두세 마리 담 꼬리에 부유(浮遊)하고 있지 않은가!
짐작컨데, 지난 겨울의 비상한 혹한에 작은 담수의 밑바닥까지 얼어서 이 참사가 생긴 모양이다. 예년에는 얼지 않았던 데까지 얼어붙은 까닭인 듯. 동사한 개구리 시체를 모아 매장하여 주고 보니 담저(潭底)에 아직 두어 마리 기어다닌다.
아, 全滅은 면했나 보다!
(성서조선 158호 / 1942년 3월호 권두언에 실린 글임)
결국 이 글은 1942년 3월 30일 성서조선의 관련자 13명이 일본 경찰에 검거된 그 유명한 '성서조선 사건'으로 이어지게 된다. 서정민 교수는 김교신의 민족의 신앙인 다운 면모를 소개하고 있는데 한 가지만 소개하고자 한다.
"너희 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잡아온놈들 중에 제일 악질들이다. 다른 놈들은 결사니 독립운동이니 파뜩파뜩 뛰다가 잡아다 족치면 전향하기 때문에 다루기가 쉬웠는데 너희 놈들은 종교니 신앙이니 이상이니 하면서 500년 후를 내다보고 앉아있으니 다루기가 더 힘들었다."
성서조선 사건을 취조하고 난후 일본경찰이 내뱉은 푸념이라고 전해진다.당시 성서조선의 열정적인 독자들이 지니고 있던 철저한 민족 신앙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증명해 주는 독백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조선적 기독교는 조선의 풍토에 맞고 체질에 맞는 기독교였다. 이것을 '서당식 기독교' 라고 하지만, 보다 더욱 깊은 의미는 조선산 기독교는 조선어를 사용하고 조선에서 성장하고 조선의 것으로 쉽게 표현하며, 조선식 성경공부를 특징으로 하는 것이다. 백소영은 더나아가 '흝어지는 교회'로 삶과 종교가 하나인 기독교로 평가하였는데, 이를 전적 기독교와 연관 시킬수 있다.
그의 전적기독교는 신과인간의 살아있는 관계성, 의뢰적주체성, 직접성, 독립성, 실천성, 복음과예언의 공속성을 분명히 하는 사회 윤리와 실천을 그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것의 실천적인 방향가 무교회주의인 셈이다.
민경배는 이러한 김교신의 무교회주의에 대해서 그것은 하나의 그룹 운동과 같은 것이었고, 구태여 비교한다면 독일 경건주의의eccesiola in ecclesia와 비슷하다고 할수 있겠다. 그의 신앙 동지들 중에 상당수가 기성교회의 충실한 멤버들이었기 때문이다. 즉 경건주의와 그 맥을 같이하며 제2의 종교개혁이라고 불리울만한 운동이라고 볼수 있겠다. 실제로 서정민은 이러한 작은 신앙운동이 민족운동으로 전개해 나감을 말해주었다.
백송영은 그의 10장 한국교회의 무교회적 6가지 제안을 제시해 주고 있다. 그의 제안은 무교회 정신을 교회안에 살리는 그 실천가능성을 6가지로 나누어 제시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귀기울여 볼만 하다는 생각을 했고 오늘날 한국교회가 깊이 고민해 봐야할 문제라고 생각된다.
(1) 한국적이며 동시에 기독교적 정체성을 가질것
(2) 이성적일 것 (역사의식을 가질 것)
(3) 세속생활 속에서 거룩함을 실천할 것
(4) 평신도간에 이루는 평등한 공동체일 것
(5) 교파를 지양할 것 (하나됨을 향하는 신앙공동체 일것)
(6) 제도화되지 않는 무형식의 작은 모임일 것
위의 6가지 제안이 과연 '한국산 기독교'인가? 하는 의문도 들긴했다. 하지만 중요한 문제는 저자가 제안하는 6가지가 오늘날 한국교회가 잊고 있는 부분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깊이 인정하게 되었다. 물론 저자의 말대로 한국교회 모두가 무교회가 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무교회주의가 가지는 성서와 나라사랑 그리고 교회사랑 정신만큼은 담아둘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오늘날 어느때보다 그리스도의 공동체의 연대가 깨지고 무너지고 있는 현실 속에서 정말 기독교의 정체성을 고민해 보지 않을 수 없다. 한국적 기독교가 주는 넉넉함, 친근함 그리고 민족을 사랑하고 어려움을 함께 이겨내기 위한 신앙 공동체적 특징들이 활발하게 일어나게 되길 소망해 본다. 그리고 겨레의 큰 스승 김교신 대선이 치러진 이시점에서 과연 오늘날 우리는 김교신 같은 나라사랑을 가지고 있는지 반문해 보며 이 서평을 마치고자 한다.
참고문헌
서정민, 겨레사랑 성서사랑 김교신선생, 서울: 말씀과만남.2002.
백소영, 우리의 사랑이 의롭기 위하여: 한국교회가 무교회로부터 배워야 할것들, 서 울: 대한기독교서회,2010.
양현혜, 김교신의 ‘전적 기독교’ 신앙과 그의 기독교 사상,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 35호(2011년 9월).
그 밖에 참고자료
김흥수, 서정민 엮음, 한국기독교사 탐구, 서울: 대한기독교서회,2011.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서울:연세대출판부,(2007)
전인수, 김교신의 ‘조선산 기독교’: 그 의미, 구조와 특징,한국기독교와 역사,제33호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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