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글은 논문을 위해 정리해주었던 자료이다. 요즘 단단해져 가는 머리때문에 걱정이다.
틈이나는데로 정리도 하고, 글도쓰고 해야할것같다.
1960년대 군사정권기에 정치적 사회적 배경을 정리하였다. 즉 참고와 정리차원의 글이다.
(각주는 기술부족으로 생략하고자 합니다.)
1960년대 군사정권기 정치적 사회적 배경
a. 4.19 혁명
3.15 정. 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에 승리하기 위해 이승만(李承晩)과 여당(與黨)인 자유당은 반공개 투표, 야당참관인 테러, 득표수 조작 발표등 부정선거를 자행하였다. 이에 야당(野黨)인 민주당은 선거의 무효선언을 하고 선거 무효소송을 제기하여 정치적 법적투쟁을 결의하게 된다. 같은 날 3월 15일 마산에서는 민주당이 시당 당사에서 자유당의 부정선거로 선거포기를 발표하였고, 경남도의회 민주당 원내총무인 정남규등 민주당 간부들이 앞장서고 학생과 시민 1000여명이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에 시 당국과 경찰은 총격과 폭력으로 격렬한 진압에 나서 무고한 학생과 시민이 큰 부상을 입게 되었다. 이것이 제 1차 마산시위이다.
이후 4월 11일 1차 마산시위에서 실종되었던 열 다섯살의 김주열군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중앙 부두앞 바다 속에 내던져졌다가 바다위로 떠오르게 되었고 이러한 소식이 마산시민들에게 전해져 3일간 항쟁이 이어졌고 제2차 마산시위가 일어났다. 이에 자유당 정권은 제 1차 마산시위와 마찬가지로 제 2차 마산시위도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것으로 몰고 가려 했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특별담화를 발표하였는데, 마산시위사건은 공산당의 개입에 의해 일어난 사건으로 단정짓게 된다.
”이대통령(李大統領) 마산사태(馬山事態)에 거듭담화(談話), “마산에서 일어난 폭동은 공산당이 들어와 뒤에서 조종한 혐의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공산당의 선전에 속아서 이런 일을 한다면 가증가탄(加增可歎)할일인 것이다. (...중략...) 그러니 난동을 일으켜서 결국 공산당에게 좋은 기회를 주는 결과밖에 되지 않는 것이니 이러한 일이 없도록 모든 사람들이 다같이 노력해서 만전을 기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이에 4월18일 고려대학교의 3천여 학생은 “이제 질식할 듯한 기성 독재의 최후의 발악은 바야흐로 전체 국민의 생명과 자유를 위협하고 있다....오늘은 진정한 민주이념의 쟁취를 위한 반항의 봉화를 높이들어야겠다”는 선언문을 낭독 후 광화문을 거처 국회의사당까지 五(오)킬로의 데모를 하였다. 시위대가 해산하고 귀가하는 도중에 100여명의 정치 괴한들로부터 청년 200여명이 습격을 당하였고 50여명이 부상을 입게 되었다. 이 소식에 분노한 시민과 학생이 다음날인 4월19일 일제히 데모에 나섰다. 120만명으로 불어난 데모 시위는 걷잡을 수 없게 되었고 이에 이승만은 오후 3시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시위를 진압하였다. 전국적으로 4월19일 이날 쓰러진 피해자는 서울에서 104명, 부산에서 13명, 광주에서 6명 등이었다.
4월25일 서울시내 각 대학 교수단 258명은 시국 수습안을 제시하는 것이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는 길이라는 데 의견을 내놓았다. 시국 선언문을 채택하고 학생, 시민들과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번 4.19의거는 이나라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중대한 계기다. 이에 대한 철저한 규명 없이는 이 민족의 불행한 운명을 도저히 만회할 길이 없다. 이 비상시국에 대처하여 우리는 이제 전국대학교수들의 양심에 호소하여 아래와 같이 우리의 소신을 선언한다.”
4월26일 이승만은 결국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4월26일 이승만 대통령직에서 사임하면서 이승만 정권당시 외무부장관이었던 허정이 대통령권한 대행이 되어 과도정부를 구성하게 된다. 과도정부 하에서 개헌안을 국회에 상정하고 내각책임제를 채택하고 7월 29일 총선거를 거쳐서 제2공화국인 장면 내각 정부가 탄생하게 된다.
b. 5.16 군사정변(쿠데타)
1961년 5월16일에 군사정변(쿠데타)이 일어났다. 당시 육군 소장이었던 박정희는 장면 내각 정부을 무너뜨리고 개발독재시기의 개막을 선언한 것이다. 5월18일 쿠데타 발발 직후로부터 55시간 동안 잠적하고 있던 장면 국무총리가 내각 총사퇴를 발표하고 정권을 군사혁명위원회에 이양했다.
“今般(금반) 軍部(군부) 쿠데타 發生(발생)에 대하여 우리 一同(일동)은 政治的(정치적), 道義的(도의적) 責任(책임)을 痛感(통감)하고 總辭退(총사퇴)하는 바이니 國民(국민)諸位(제위)의 諒解(양해)가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 그리고 事態收拾(사태수습)에 있어서는 流血(유혈)을 防止(방지)하고 反共態勢(반공태세)를 强化(강화)하며 國際的(국제적) 支持(지지)를 確保(확보)하는 方向(방향)으로 나아가기를 希望(희망)한다. 단기 4294년 5월18일 국무총리 장면외 국무위원일동,”
5월 19일에 군사재건최고회의로 명칭을 바꾸고 20일에는 모두 군인으로 이루어진 ‘혁명내각’을 발표하게 된다. 혁명내각과 동시에 발표한 그의 혁명공약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 반공체제(反共體制)의 강화(强化)
이. UN 헌장(憲章)과 국제협양(國際協約)의 준수(遵守)
삼, 부패일소(腐敗一掃)
사, 계획성(計劃性)있는 경제발전(經濟發展)으로 국민생활(國民生活) 향상(向上)
오, 공산주의(共産主義)와 대결하여 국토통일(國土統一)의 성취(成就)
혁명공약을 통해 박정희정권의 시작은 반공주의 강화, 국제협약 준수 및 국민생활 향상을 중심으로 하였다. 이러한 그의 혁명공약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은 대체로 우호적인 입장이었다. 왜 5.16 군사쿠데타에 대해서 대체로 동의하는 반응을 보이고 있을까? 5.16군사쿠데타 이후 『경향신문』 1961년 5월17일자의 1면 사설란에 無血(무혈) 쿠데타에 성공한 군사혁명위원회의 布告文(포고문)에 대해서 냉철하고 침착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무혈 쿠데타에 성공한 軍事革命位(군사혁명위)가 앞으로 성실하게 과업을 수행할 것과 국민의 민생문제의 圓滑化(원활화)는 시급한 社會安定(사회안정)과 평온회복에 不可缺(불가결)한 前提(전제)임을 강조하면서 군사위의 때를 놓지 않은 勇斷(용단)이 있기를 再三苦待(재삼고대)하는 바라고 말하고 있다.
4.19혁명 이후 장면정권이 정치나 경제면에서 무능하다고 느낀 언론과 국민들은 5.16쿠데타를 대체로 환영하는 입장이었다. 『동아일보』는 1961년 5월 17일자 석간일보 제1면에서 “當面重大局面(당면중대국면)을 收拾하는 길”이라는 사설을 통해서 쿠데타는 군에 의한 장면정권타도의 신호였으며, 4.19학생혁명의 産物(산물)로서 장면정권은 집권 아홉달을 넘도록 빈곤하고 우유부단한 정치역량이 부패하였으며 금번 쿠데타는 ‘피를 보지 않은 그것’이 불행 중 다행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5.16 군사쿠데타의 당위성이 언론과 시민들에게 긍정적인 이미지가 부각된데에는 장면정부에 대한 무능을 평가하는 비판이 있다. 또 한 가지 역할을 했던 것이 반공주의에 대한 강화이다. 박정희정권이 제시한 혁명공약에 가장 첫머리에 둔 것이 반공체제의 강화라는 사실만 보더라도 반공주의는 박정희 정권의 쿠데타 당위성의 가장 큰 무기였다.
사상계와 같은 잡지도 5.16 군사쿠데타에 대해서 대체로 우호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1961년 6월호 『사상계』 권두언에 실린 장준하의 “五.一六 革命과 民族의 進路”라는 글에서 그는 이렇게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四.一九(사일구) 革命(혁명)이 立憲政治(입헌정치)와 自由(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民主主義革命(민주주의혁명)이었다면, 五.一六革命(오일육혁명)은 부패와 무능과 無秩序(무질서)와 共産主義(공산주의)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는 民族主義的(민족주의적) 軍事革命(군사혁명)이다. 따라서 五.一六革命(오일육 혁명)은 우리들이 육성하고 開花(개화)시켜야할 民主主義(민주주의)의 理念(이념)에 비추어 볼때는 불행한일이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으나 위급한 民族的(민족적) 現實(현실)에서 볼 때는 不可避(불가피)한 일이다......(중략).....따라서 이런 의미에서는 五.一六革命(오일육혁명)은 四.一九革命(사일구 혁명)의 부정이 아니라 그의 계신 연장이어야한다.”
장준하는 5.16군사쿠데타를 4.19의 혁명의 연장이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민족적현실에서 불가피한 일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c. 한일회담과 반대운동
한국과 일본 사이에 최초로 열린 예비회담은 주일 연합군 총사령부의 주선으로 열렸으며 1848년과 1950년 맥아더의 두 차례의 설득 후에 이승만은 일본과의 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의지로 희담에 참여의지를 밝혔다. 미국은 한일관계에 대한 정상화에 관심이 많았고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미국의 중재와 개입에도 불구하고 회담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미국은 왜 한일의 관계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입을 하였을까? 먼저 1차세계대전부터 한국전쟁까지 1950년대 미국은 사회주의권과 소련의 팽창에 대한 부담이 있었고 이에 미국의 아이젠하우어(Dwight D. Eisenhower) 행정부는 군사력을 강화하고 소련에 대한 봉쇄정책을 강화하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이재오는 소련에 대한 대소봉쇄정책에서 아시아의 역할이 중요했는데, 특별히 한반도와 일본이 공산주의권에 대한 방어기지로 등장했으며 이 지역에 대한 미국의 개입이 강화된 것이라고 말한다.
둘째 1949년 8월 소련이 원자폭탄실험에 성공하고 1949년 10월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하게 되었다. 아시아에서 공산주의 영향력이 고조대자 미국은 수세에 몰리게 된다. 이때 1950년 6월25일에 시작된 한국전쟁이 중국연안을 봉쇄하는 아주 중요한 거점으로 한반도에 집중하게 된다. 한국전쟁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것이 일본이었다. 1960년에 일본은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을 지원하는 의미에서의 미일상호안보조약을 맺게 된다.
셋째 베트남전쟁으로 한국은 미국의 원조를 얻고자 대규모 군사를 파병한다. 그러나 미국의 베트남전쟁은 실패로 돌아가고 미국은 아시아정책에 대한 부담을 느끼게 되고 동아시아 봉쇄정책에 동요가 일어나자 유일한 동맹국으로 일본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일본이 한일회담을 통해 아시아 태평양지역의 반공군사동맹을 결성하려는 미국의 아시아 정책은 극히 중요한 부분이었다.
미국은 한일회담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즉 한일국교정상화는 한일간에 이해관계의 일치라는 점에서 타결된 사실을 인정해야 하지만 이러한 과정의 배후에는 미국의 세계적 지역적 냉전 수행전략과 이를 위한 역할 분담 체제라는 요인 또한 강력하게 작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종원은 한일회담은 그 출발에서부터 타결까지 미국의 아시아 정책이라는 국제정치의 냉전논리가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음을 말하고 있으며 이는 역사의 논리를 외면한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어째든 미국의 이러한 적극적인 개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회담의 성사는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가 5.16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국가차원의 쿠데타의 정통성을 입증받아야 했으며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한 경제발전에 필요한 자금과 기술적 지원을 받아야 했다. 이를 위해 일본과의 회담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박정희와 쿠데타 군사정부는 5.16 직후인 1961년 5월22일 박정희의 군사정권은 일본에 회담을 요청했다. 결국 5.16 쿠데타로 중단된 5차 회담은 1961년 10월20일 동경에서 다시 시작되었다. 당시 회담의 주요 현안은 다음과 같다. 1. 한국의 대일 청구권 2. 평화선 3. 한국선반 반환요구 4. 외교관계 정상화 5. 재일한인 북송문제 6. 한국문화재 반환요구 7.재일 한국인의 법적지위 이 중 청구권문제가 쟁점의 중심에 있었다.
군사정부는 국민들에게 식민지배에 대한 보상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소위 청구권을 한일협정체결과 일본의 보상을 받으려는 정당성을 보이려하였다. 반면 일본은 미군정 법령에 의해 미군정이 몰수한 한국 내 일본인 재산과 일본정부의 재산은 1948년 11월 재정 및 재산에 관한 최초 협정(Initial Financial and Property Settlement)을 통해 대한민국 정부에 이양되었다.는 것을 통해 일본은 청구권은 사실상 유효하지 않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정부는 일본정부에 대해 총액 8억 달러의 청구권 금액을 요구하였고, 이에 대해 일본정부는 요구한 청구권에 대한 5천만 달러와 경제원조를 제안하였다. 결국 1962년 10월 21일과 11월 12일 회담에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일본외상이 회담을 가졌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김종필. 오히라 메모’이다. 이렇게 청구권 합의가 이루어졌으나 한일회담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른바 민족주의세력의 5.16군사 정권에 대한 강한 비판 때문이었다. 박동철은 4.19혁명으로부터 형성된 민족주의세력이 강하게 비판하고 나선 이유에 대해 한일회담을 반민족적인 굴욕외교라고 하였고, 일본의 경제적 침략 즉 일본의 도움 없이 경제적 발전도 반공도 없다는 패배주의를 우려하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결국 1963년 10월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는 승리를 거두고 정권을 수립하게 된다. 1964년 1월8일 미국 법무장관 로버트 케네디(R. Kennedy)가 일본에서 이케다와 만난후 방한하여 박정희에게 한일회담의 타결을 협의하였고 1월29일에 미국무장관 러스크(D.Rusk)가 한일회담의 조속한 타결에 합의하는 한미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렇게 조속히 한일회담이 진행되자 민정당과 삼민회 소속의 야당의원들은 3월 6일 투쟁위를 조직하였고 3월9일은 재야인사들이 시민회관에 모여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이러한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한일회담을 진행할 의지를 분명히 하자 1964년 3월24일 대학생들이 5.16쿠데타 이후 대규모 가두시위를 벌이고 288명의 학생들이 연행되었다. 5월20일에는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선언문’이 있었는데 ‘시체여 너는 오래전에 이미 죽었다. 죽어서 썩어가고 있다. 넋 없는 시체여! 반민족적 비민주적 민족적 민주주의여!’ 라고 선언하며 상징적인 시위를 하게 된다. 결국 6월3일 마치 4.19시위를 방불케 하는 5.16이후의 최대의 한일회담 반대 시위항쟁을 벌였다. 박정희는 계엄선포를 하였고 계엄군의 시위해산 압박으로 인해 자정 무렵 시위대는 해산되었다. 6.3시위로 채포된 학생과 시민이 1,200이 넘었고 그중 91명이 구속되었다 학생부상자도 200여명이 되었다.
참고문헌
한국민주화운동사. 2: 유신체제기
- 저자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지음
- 출판사
- 돌베개 | 2009-12-28 출간
- 카테고리
- 정치/사회
- 책소개
- 한국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총정리한다!대한민국 건국 이후 오늘날까...
한국민주화운동사. 1: 제1공화국부터 제3공화국까지
- 저자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지음
- 출판사
- 돌베개 | 2008-12-03 출간
- 카테고리
- 정치/사회
- 책소개
- 한국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총정리한다!대한민국 건국 이후 오늘날까...
그외 1960년대 신문및 잡지자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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